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85)
이세계 편돌이-284화(285/331)
284. 그럼 이게 맥주라고 치고 (1)
* * *
이 뒤로 엘레나 양이 쏟아낸 톡들 내용이 대충 이러했다. 내가 몇 번 도와줬던 묘약 개발이 이제 막 2상 실험을 시작했는데, 환자들 반응이 괜찮다. 원하는 결과가 잘 나오고 있다.
[ 분류가 의약품이아니라 임상실험 진행이 빠르거든요 ] [ 2상 진행중이고 이대로만갑시다 여러분! 분위기에요 ] [ 물론 3상에서엎어질가능성도 있긴하지만 일단은 잘되고있어요 ]문법이 엉망이었던 탓에 읽기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여튼 임상실험은 자기 팀이 아닌 실험팀이 따로 있고, 업무래 봐야 실험 결과를 취합해 정리한 뒤에 최종 실험에 반영하는 게 전부인데, 이게 꽤 어렵단다.
[ 실험팀이랑 커뮤니케이션하는 게 엄청 중요한데요 ] [ 팀장님께서 저희못믿겠다고 직접 하시겠다고 하셔서요 ] [ 시킬일없으니 이참에 휴가라도 쓰는 게 어떻겠냐고…. ]이런 이유로 6월까지 근무하며 쌓인 연차를 단숨에 몰아 쓰게 됐고, 휴가 기한이 다음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반년 동안 응어리진 연차를 맛보아라…!
여튼 쉬라길래 휴가를 쓰긴 했는데, 막상 휴가가 접수되고 나니 문제가 하나 생겼다고 한다.
[ 뭘 하고 쉬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쉽게 말해 회사 휴가 기간 동안 뭘 할지 추천을 좀 해 달라는 얘기 같은데, 이건 나보다는 제대로 된 휴가를 한 번이라도 받아 본 적이 있는 놈이 더 잘 대답해주지 않을까?
난 해당 사항이 없어서 그렇다. 전 직장에서의 내 주 업무가 설치한 가전제품들을 A/S해주는 거였고, 그 제품들이 내 사정을 봐가며 고장 나 주지는 않았다. 지들 멋대로 드러누웠지.
그리고, 직장상사도 똑같이 내 사정을 안 봐줬었다. 제대로 된 휴가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 입을 빌려 대답할 수밖에.
[ 그건 저보다는 팀 선배분들이 더 잘 아시지 않을까요? 라나, 클로에, 아니면 예전에 휴가가셨다던 셰이 그분도 계실 거고. ] [ 와. 선배님들 성함 전부 기억하고 계시는 거예요? ]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여튼 그분들도 휴가 권유 받으셨을 거잖아요. 업무 얘기 들어보니까 인력이 그리 많이 필요한 일은 아닌 것 같던데 ] [ 그렇기는 한데요. 그게 ]그 셋이 짠 계획이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고 한다. 해수욕장 가서 다른 이종족부터 꼬시고,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흠….
[ 저도 똑같이 안 와닿긴 하네요 ] [ 그쵸! 그래서 선약이 있다고 둘러댔었는데, 선배님들께서 ‘아, 맞다. 넌 선약 있을 법하지―’ 이러시고는 배려해주셨어요. 원래 그럴 분들이 절대로 아닌데! ]평소였으면 자기 손목에 수갑을 채워서라도 해수욕장으로 끌고 갔을 거란다. 놀려먹을 심산으로. 나야 그 서큐버스들 평소 성격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해줄 말이 없긴 하다만….
[ 대체 왜 배려를 해주신 걸까요? ]평소 성격을 아는 입장에서는 어지간히도 궁금한지, 이걸 기어이 내게 묻고 있다. 우선 적당히 대답해봤다.
[ 진짜로 선약이 있다고 생각했다든가 ] [ 그런가? 그럼 누구랑 어떤 선약이 있을 거라 생각하신 걸까요? ] [ 엘레나 양은 짐작 가는 사람 없어요? ] [ 저는 없어서요. 찬이 씨는요? ] [ 아니그걸왜저한테 ] [ 농담이었어요 ]이 주제로 서로 30초가량 톡을 계속 주고받아 봤으나, 서로 전혀 모르겠다는 말 말고는 나오는 게 없더라. 잠깐의 공백 뒤, 톡 한 줄.
[ 찬이 씨 ] [ 예 ] [ 저 내일 잠깐 매장에 가도 될까요? ]오는 거야 상관없다. 껌 한 통만 사도 몇 시간이고 눌러붙을 수 있는 곳이 편의점이니까. 그 몇 시간 동안 폰 들여다보는 것 외엔 할 게 없는 곳이라는 게 문제지.
[ 오셔서 할 일 있으세요? ] [ 많죠! 찬이 씨 얼굴 잠깐 보고, 찬이 씨랑 얘기도 하고 ]별로 많지는 않아 보인다. 날 만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밀린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인데, 이것도 귀찮아서 대충 대답한다는 느낌 같고….
잠깐 고민하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적어 봤다. 찾아오는 게 싫은 건 아니다.
[ 언제쯤 오시게요? ]밤샌 직후라 얘기 도중에 곯아떨어질 것 같아서 이러는 거지. 엘레나 양도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배려해 준답시고 이런 톡을 해 왔다.
[ 찬이 씨 오전 6시 퇴근이시니까… 첫차 타고 갈게요. 어때요? ] [ 그냥 아침 9시쯤 느긋하게 오십쇼, 편의점에 첫차 타고 오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졸린 건 내가 알아서 참든지 해야겠다. 마저 대답하자, 대답 대신 웬 캐릭터 하나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모티콘이 하나 올라왔다. 이후엔 마무리.
[ 내일 봬요, 찬이 씨 ] [ 옙 ]대답한 뒤에는 20초 즈음 톡이 올라오길 기다리다, 폰 덮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님이 두 명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 명은 옆머리 부근에 얇은 소나무 잎 같은 게 자란 식물 반 사람 반의 여성 이종족. 잎이 달린 게 꼭 머리핀처럼 생겼다.
다른 한 명은 식물 기반에 널찍한 잎이 머리에 덥수룩한 남성 이종족이었는데, 처음엔 머리에 핀 식물만 다르지 같은 종족, 같은 가족인 줄로만 알았다. 남자가 해 오는 말을 듣기 직전까진 말이다.
“사장님, 여 매장에 가세 있습니꺼.”
“가세… 가세요?”
“아. 가세가 아니고, 그… 가세를 뭐라 카더라.”
“가위, 가위. 오빠도 참, 그렇게 말하면 사장님께서 알아들으시겠어?”
알아듣기는 했다. 그 가세가 내가 아는 그 가세가 맞나― 순간 헷갈려서 그렇지.
대신 대답한 여자가 타박을 주는 듯 남자 허리를 꾹꾹 눌러대는데, 남자는 또 거기에 엄살을 부려대고 있다. 둘이 남매가 아니라 커플이었나보다.
“맞다. 가위. 니랑 있는 기 하도 편해갖고 말이 자꾸 이래 나온다.”
“난 부끄럽거든! 남쪽에서 자랐다고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둘이 종족은 같은데 고향이 다른 거였다. 여자 쪽은 위쪽 지방 출신이라 머리에 침엽수가 자란 거고, 남자는 아래쪽 지방 출신이라 활엽수가 자라난 거지. 아님 말고….
생각하며 바라보는 사이, 남자가 무안했는지 여자를 대뜸 한 팔로 감아 껴안아 버렸다. 한창 타박하던 여자도 손을 우뚝 멈추고 어깨를 기대는 게 싫다는 눈치는 아니었다.
난 싫었다. 이젠 염장질을 할 게 없어서 식물들까지 날 염장하고 있다. 얼른 가위나 팔아 내보내자는 심산이었는데, 중간에 둘이 찾는 가위가 내가 아는 그 가위가 아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매장에 가위가 있기는 한데, 혹시 가지치기용 가위 필요하신 건가요?”
“네! 사장님. 큰 걸로요. 있나요?”
“그건 저희 매장에는 없고, 근처에 백화점 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여기가 학원지구 정문 코앞이라 어린애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안전상의 이유로 날붙이류도 아기자기한 것들만 취급하고 있다. 기껏해야 새싹 애들이 이파리 모양 낼 핑킹가위 정도?
“백화점예? 밤 10신데 거가 영업을 합니까?”
“거기 11시까지 영업할 거예요. 6월 중순 다 돼서 그런지 영업시간 늘렸더라고요.”
직접 가봐서 아는 건 아니고, 퇴근길에 그 백화점에 불 켜져 있는 걸 몇 번 봤다. 내 대답이 나름 친절하게 들렸는지 남자 머리의 이파리가 확 펼쳐졌다.
“아, 그래요? 고맙심더, 친절하시네예.”
“아이 참, 오빠. 말을… 아니지. 고마워요, 사장님.”
고마우면 염장을 나 말고 딴 사람한테 가서 쳐라. 백화점까지 10분가량 걸린다는 것도 마저 설명하자, 다시 팔짱을 끼고는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백화점 가는 김에 영양제도 좀 사자, 오빠. 나 잎 시든 거 보여?”
“내 눈엔 팔팔하니 걱정 마라. 그리고 그… 자꾸 사투리 써서 미안하데이.”
“나랑 단둘이 있을 때는 써도 돼. 오빠는 그게 매력이거든.”
“그르나! 내 사실 니 좋으라고 이러는 거였다.”
“이럴 땐 얄밉지만.”
이렇게 하하호호 웃으며 정문으로 향했고, 난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직 매장에서 안 나갔으니까 단둘이 있는 거 아니잖아. 근데 왜 이러냐고, 편돌이는 사람도 아니야?
첫 손님부터 내상이 좀 쎄다. 상처 입은 마음을 추스르려 했는데, 둘이 정문을 나가며 열린 문으로 또 남녀 한 쌍이 걸어 들어왔다. 서큐버스랑 뱀파이어.
심지어 이 둘은 더 가관이었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뱀파이어 어깨에 몸을 기대고는, 나른하다는 어조로 서큐버스가 중얼거려댔다.
“오빠, 나 너무 걸어서 다리 아파. 안아주면 안 돼?”
“아까 백화점에서부터 쭉 업어줬잖아. 또?”
“그건 업어준 거구, 안아달라니까. 왜, 싫어?”
“아니. 좋지.”
“거봐. 오빠도 좋으면서.”
이런 염병할….
* * *
이 둘을 내보낸 뒤로 정확히 6시간.
새벽 4시까지 들어오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커플이었고, 그 커플들 모두가 모쏠을 못 놀려 안달이 난 것처럼 굴어대고 나갔다. 그러니까, 보통 연인들이 편의점 거울에 대고 손하트 맞추는 짓거리를 자주 하나?
내가 진짜로 몰라서 이런다. 이 짓거릴 한 커플이 푸른색 계통의 털을 지닌 하피 남녀였는데, 매장에 들어오면서도 맥주 냄새가 아주 풀풀 나더라고?
취한 채로 왔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견과류 계산하다 말고 서로 거울 보고, 자기들 날개 포개서 하트 모양도 만들고 그랬던 거겠지. 그걸 왜 하필이면 내 앞에서 하는지는 쥐뿔도 모르겠지만….
손님이 뜸해진 뒤에도 억울함이 가시질 않아서, 근무교대 직전에 찾아온 유리에게 이 얘기부터 하고 봤다. 내 주절거림을 무덤덤한 얼굴로 다 듣고는, 표정과 똑같은 어투로 자기 의견을 말해왔다.
“블루제이 하피분들이네요, 오빠.”
“뭔 여치?”
“네. 그 종족분들은요. 한번 사귀면 털이 파뿌리가 되도록 평생을 연인관계로 지내는 특성이 있대요. 신기하죠.”
그 덕에 이혼율이 급상승하는 현 시국에 본받을 만한 몇 안 되는 종족 중 하나라는 식으로 유리가 열심히 설명을 해줬는데, 그다지 알고 싶었던 정보는 아니었다.
“그건 좋다 이거야. 좋은데, 왜 나 근무하는 매장에 와서 그 짓을 하냐고. 매장에서 커플 할인을 한 것도 아닌데….”
여기 놀려먹기 좋은 모쏠이 있다고 누가 소문을 내기라도 한 거야, 뭐야. 계산대에 엎드린 채로 계속 하소연했더니, 유리가 못 이기겠다는 어투로 써먹을 만한 정보를 풀어줬다.
“어젯밤에 학원지구 안에서 축구 경기 한 거 때문일 거예요.”
“축구? 어디 프로팀 불러다 친선경기라도 했대?”
“아뇨. 대학리그 라이벌 경기.”
학원지구 안이 대학교만 수십 곳이 넘게 있고, 그 수만큼 축구부가 있는 덕에 아예 자기들끼리 벌이는 리그전이 있다고 한다. TV 중계까지 이뤄지지는 않으나 현장 열기는 결코 무시할 게 못 된다고.
특히 라이벌 매치의 경우에는 그 열기가 훨씬 심해서, 몸싸움 도중 소뿔이 나가거나 오크 뻐드렁니가 부러지는 유혈사태가 심심찮게 일어나고는 한단다. 듣는 도중에 물었다.
“나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그 경기를 어디서 했길래?”
“반대쪽 정문 근처 야외경기장에서요.”
버스로 30분은 족히 걸릴 거리다. 당연히 환성 소리 따위도 들릴 리가 없다. 경기 끝난 뒤에는 학생들이 술 마실 곳을 찾아서 죄다 이쪽으로 몰려온 거고….
“혹시 이번 주에 경기 또 하냐?”
“아닐걸요. 걔네들도 방학인데 쉬어야지.”
“그러냐.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
일시적인 현상이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느릿느릿 계산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사이, 유리가 유니폼을 어깨에 걸치고 와서는 팔을 끼워 넣으며 마저 말해온다.
“인수인계 마저 하고 얘기해요, 오빠.”
“어제 맥주랑 혈액팩 동나서 채워놨고, 재고 거의 다 떨어졌으니까 점장님께 말 좀 해줘. 그리고, 이따 9시쯤 잠깐 들를 거야.”
“왜요?”
“약속 있어서 그런다. 개인적인 거.”
대답해준 뒤엔 나도 옷을 갈아입었는데, 돌아와 보니 이 녀석이 여전히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을 마주쳐도 피하질 않는다. 얜 또 왜 이래?
“뭔데?”
“어떤 약속요?”
“약속이 사람 만나는 거 말고 뭐가 있겠냐고. 너는 이게 뭐라고 그렇게 빤히 궁금해하고 있….”
“그럴 만한 약속 같아서요.”
“나 아직 아무 말 안 했잖아.”
“이제 해주실 거잖아요.”
이 녀석이랑 이런 저세상 대화 하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숨길 일도 못 된다는 생각에 누굴 언제 만날지를 마저 말해줬는데, 이 녀석이 보인 반응이 전에 없이 풍부했다.
“음….”
늘 나사 빠진 표정만 짓고 살던 녀석이 지금은 팔짱까지 껴가며 날 노려보고 있다. 이번엔 내가 궁금해져서 빤히 바라봤다. 잠시 후.
“그거 데이트하자는 거잖아요.”
“아니, 이 녀석은 뜬금없이 또 뭔 소리야. 나사 다시 끼워줘?”
“이건 나사 끼우고 하는 말인데요?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