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90)
이세계 편돌이-289화(290/331)
289. 그럼 이게 맥주라고 치고 (6)
* * *
“아무리 친한 사람한테라고 해도요.”
마저 말하고는 힘없이 웃는 얼굴로 날 바라보는데, 부모님의 이혼이 친한 사람에게 쉽게 꺼낼 수 없는 주제인 건 맞다. 꺼내기 직전까지의 분위기가 좋았다면 특히 더 그렇다.
오늘 중에 이런 대화는 단 한 마디도 한 적이 없고, 덕분에 온갖 길을 거닐며 잘 놀 수 있었다. 잠시 후엔 힘없이 웃던 웃음기마저 사라져서는 한숨을 푹 내쉰다.
“죄송해요, 찬이 씨. 날씨도 좋은데, 괜한 얘기를 꺼낸 것 같네요….”
아까까지의 명랑한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물어봐서 미안하다며 받아 줄까 하다, 좋은 대처가 아닌 것 같아 말을 바꿨다. 나도 슬쩍 넘어가고 싶지는 않다.
“저희끼리 괜한 얘기가 어디 있어요. 그냥, 하고 싶은 얘기 하는 거지.”
“네. 죄송… 하고 싶은 얘기요?”
“하고 싶은 얘기요. 어렸을 때부터 혼자 묵히고 고민하고, 다 커서 어디 모임을 가더라도 ‘내가 이 얘기를 해도 될까?’ 하며 술잔만 들여다보게 되고, 말해도 분위기만 가라앉을 게 뻔하다는 결론밖에 안 나와서 결국 말 안 하고 집에 들어오고….”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 한 마디마다 눈이 커지고, 굽히고 있던 허리가 서서히 펴져 간다. 마저 말했다.
“아무한테도 못 물어보고 스스로 답을 내렸는데, 그 답이 맞는지 아닌지 확신이 없어서 또 고민하게 되고. 고민만 하다가 시간 훌쩍 지나는 그런 고민요.”
“…….”
“언제 누구한테 꺼내도 애매한 주제고, 어차피 애매한 주제면 아무 때나 꺼내도 상관없지 않나… 저도 똑같은 고민 해봐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말이 점점 길어진다. 중간에 끊고 이실직고하자,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을 꿈벅이는 엘레나 양. 그러다 조심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리듯 묻는다.
“찬이 씨도 똑같은 고민을 해보셨다는 게….”
“저도 어렸을 때 부모님 이혼하셨거든요.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요.”
나도 부모님의 이혼에 깊은 의문을 가지고, 타인에게 언제 어떻게 얘길 꺼낼지를 잡히는 술자리마다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딱 24살 즈음이었던가?
그러다 이 주제가 사람들 술맛을 잡칠 뿐이라는 걸 깨달은 뒤엔 관뒀고, 몇 년 후에 어머니께 이유를 직접 들은 뒤로는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살았다. 별로 좋은 이유는 아니었다.
여하튼 이 시절을 한 번 겪어서인가, 누군가가 이혼 얘기를 꺼내거든 그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말을 꺼냈는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추론력을 지니게 됐다. 가령 지금 경우에는….
“이유는 잘 모르지만요. 엘레나 양께서는 얘기 들으셨었어요?”
엘레나 양이 지금 딱 24살이다. 에둘러 묻자, 앉은 자세를 바로잡고는 마끼아또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기 시작한다. 당황하긴 했어도 말하기 싫다는 눈치는 아니다.
“이유는… 알고는 있는데, 잘 이해가 안 돼서요. 그래도.”
아직은 딱 눈치만 그렇다. 여전히 망설이는 것 같아, 내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농담 삼아 말해 봤다. 내 경우엔 이게 도움이 됐었다.
“엘레나 양. 그럼 이게 맥주라고 치고.”
“네?”
“농담 삼아서 하는 말이에요. 농담이긴 한데, 저도 부모님 얘기 제대로 꺼낸 건 딱 한 번뿐이거든요? 고향에서 옛 직장 다닐 때, 직장 상사랑 술 먹으면서 한 번.”
그 양반이 내게 물었었다. 찬아, 니 부모님께서는 뭐 하구 사시냐? 여기에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어머니께선 돌아가셨고, 남자는 몰라요. 그러자 그 양반 왈.
[ 이찬 인마, 나랑 팔자가 비슷했네? 나도 와이프 간 지 한참 됐는데! ]유교 사회의 반항아 같은 양반이었다. 그 양반이 이참에 다 얘기해 보라며 맥주만 주구장창 시켜댔고, 난 얼떨결에 그걸 넙죽넙죽 받아먹고….
그러다 부모님 얘기도 하게 됐는데, 진지하게 들어주더라고. 고마웠다.
“술이 들어가니까 그나마 얘기가 잘 나오더라고요. 대낮에 카페에서 맥주를 찾을 수는 없으니까, 그 대용으로. 어떠십니까?”
말하며 커피잔을 들어 권해 봤다. 라지사이즈로 주문했으니 못해도 1,000cc쯤은 되겠지. 이렇게 권한 뒤에야 엘레나 양이 결심이 섰다.
“…네.”
“좋아요. 그럼, 짠.”
“잠시만요. 빨대만 빼고… 짠.”
서로 커피잔을 맞부딪친 뒤, 동시에 들이켰다. 난 반 컵, 엘레나 양은 세 모금. 원래 주량이 별로 세지 않은 모양이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자기 잔을 내려다보며 입을 연다.
“저희 가족이요. 엄마께서 서큐버스시거든요. 아빠께서 인큐버스시고.”
“아하… 예? 인큐버스?”
“인큐버스이시긴 한데, 그! 변호사세요! 성격이 엄청 정직하셔요. 사리분별이 지나치신, 그러니까… ‘아빠! 우리 잠깐 산책 나온 거잖아. 길가의 쓰레기를 다 줍고 있으면, 우린 언제 집에 가?’ 하고 핀잔을 줄 정도거든요?”
횡설수설하는 걸 어떻게든 정리해보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인큐버스가 아니다’라는 걸 에둘러 어필하는 것 같다. 직업도 그래서 제일 먼저 말한 거고.
“그래서요.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 하시는 분이세요. 그런데, 엄마는요….”
“서큐버스라고 하셨죠.”
“…네. 서큐버스요.”
아버지 쪽은 지나치게 정직한 반면, 어머니 쪽은 내가 생각하는 서큐버스 그 자체. 서큐버스가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에 무척 개방적이고, 관심이 많은 종족이다.
문제는 이 서큐버스의 사랑이 한 방향이 아니었다는 것. 100명의 서큐버스가 있다고 치면, 그중 50명 정도는 결혼과 동시에 사랑의 방향이 내조로 향한단다. 뚜렷하게.
나머지 중 30명가량은 새로운 사랑을 바라기는 하나 실천에 옮기지는 않는다. 나머지 20명 중 19명이 그걸 한 번 이상 실천에 옮긴 뒤,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 마음을 접는 쪽이라 하는데….
“바람을 피우셨대요. 아빠 말로는요. 그것도 자주, 꽤 많이.”
100명 중의 한 명꼴로 극단적인 타입이 나온단다. 그러니까, 소란을 일으키고도 마음을 접질 않고 역으로 이렇게 말하는 거다. ‘난 종족의 본연에 충실할 뿐이라고. 뭐가 그리 호들갑이야?’
“그래서 아빠도 제 교육에 문제가 된다고 판단하셨다 하고, 아빠가 먼저… 말을 꺼내셔서.”
“어머니께서는요. 뭐라고 하셨답니까?”
“저를 데려가겠다고 하셨대요. 이렇게 엄마가 먼저 소송을 하셔서요….”
양육권 소송은 아빠의 아슬아슬한 판정승으로 끝났다고. 판사 집에 사과박스가 배달된 게 아니고서야 당연한 결론이 난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단다.
“종족 특성과 관련된 법이 있는데, 그 법에 걸쳐서 아슬아슬했대요. 판례를 섣불리 남겼다간 종족 특성이 무시당하거나, 보장받지 못하게 되니까.”
가령 샐러맨더. 이 종족들은 원본이 파충류라 스스로는 체온조절이 불가능하다.
하여 아이스크림이나 손난로 등에 의존해야 하고, 이걸 법적으로 보장을 해준다. 회사에서는 샐러맨더를 채용할 시, 샐러맨더들에게 매년 일정 금액 이상의 체온유지비를 어쩌고….
이걸 보장 못 받을 경우, 그때는 일일 10개 이상의 아이스크림의 제공을 바라는 샐러맨더들의 집단시위가 벌어질 거라나, 뭐라나. 그 마음을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10개는 좀 많지 않나?
이런 이유로 종족 특성과 관련된 사건들은 법조인들이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았다. 하긴, 아버지 쪽이 변호사라 하셨으니까.
“아빠가 이런 일이 전문이셨거든요.”
“아. 종족 관련법요?”
“아뇨? 이혼전문변호사세요.”
“어… 그렇군요.”
“융통성은 없으시지만, 일은 엄청 잘하세요.”
서큐버스를 제외한 종족들의 소송에 한해 102전 101승 99KO의 전적을 보유한 아주 능력 있는 변호사시란다. 이만큼을 말한 뒤, 목이 타는지 마끼아또를 한 모금 더 들이켜고는 중얼거린다.
“아무튼요. 그렇게, 엄마랑 아빠가 서로 헤어졌고….”
“예.”
“헤어졌고, 잠깐만요. 목이 좀 타네요.”
2분 사이에 30분어치 말을 쏟아내긴 했다. 한 모금을 홀짝이고는 한참 모자란지 빨대로 마끼아또를 연거푸 빨아들여 댄다. 보던 도중에 궁금한 게 하나 떠올라 물어봤다.
“엘레나 양. 특별한 의도는 없고, 순수하게 궁금해서 여쭙는 건데요.”
“아, 네. 찬이 씨.”
“엘레나 양은 보통 부모님 중 어느 분이랑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저요? 어… 머리 색이나 얼굴 형태 같은 건 엄마를 많이 닮았대요. 성격은 아빠를 많이 닮은 것 같고….”
그럴 것 같더라. 엘레나 양이 날 만날 때마다 늘 꺼내는 얘기가 있잖은가. 사랑.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늘 궁금해하는 서큐버스고, 그래서 엄마 쪽을 닮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내 물음에 대답한 뒤, 물고 있던 빨대를 놓고는 말을 늘인다.
“아무튼 그렇게 두 분이 헤어졌는데… 마지막에 헤어질 때요.”
“예.”
“두 분이 엄청 싸우셨거든요. 막 소리 지르고. 쌩판 남처럼 너 실수하는 거야, 네가 나한테 이러기야… 전부 다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일단 기억나는 건 이래요.”
이게 못해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일일 텐데, 그럼에도 이만치를 기억하는 걸 보면 실제 발언 수위는 훨씬 더 과격했을지도 모르겠다.
떠올리자마자 울적해졌는지 고개를 푹 떨구는 엘레나 양. 시선을 커피잔을 지나 거의 무릎 언저리로 옮기며 중얼거리는 게, 이게 원래 하고자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때 뭘 생각했는지도 기억나요. 우리 부모님, 서로 사랑을 하긴 했던 걸까?”
“…그건.”
“저요. 이걸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요.”
시작이야 사랑으로 했겠지. 양측이 따로 목적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대부분의 결혼은 서로 간의 사랑이 얼마인지를 확인한 후에 이루어진다. 최소한 아예 없으면 못 한다.
이걸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엘레나 양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말들이 목소리는 작아도 또렷하다. 한두 번 생각해서는 떠올릴 수 있는 말들이 아니었다.
“두 분이 싸우는 모습만 봐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는 전혀 짐작이 안 됐어요. 어렸을 때 기억이라 왜곡된 걸 수도 있지만 아빠한테도 말을 몇 번 했었단 말이에요.”
“네. 그래서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엄마랑 사랑하긴 했었냐고 물으면 늘 맹하던 아빠가 그때만큼은 뚜렷하게 말을 했어요. 우리 서로 사랑했었던 거 맞으니까 이 주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그랬었어요.”
높낮이의 변화도 없고, 단 한 번도 쉬지를 않는다. 막막함에 아메리카노를 마저 마실 때까지도 엘레나 양이 말을 멈추질 않았다. 참 오래도 쌓인 말들이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정통지서에 부모님 이름을 적을 일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 이름을 먼저 적고 아빠한테 줬어요. 아빠가 통지서를 보고는 볼펜으로 엄마 이름을 슥슥 긁는데 그때 순간 화가 나서 또 물어봤어요. 둘이 사랑했던 거 맞아?”
“…….”
“아빠가 진짜로 사랑한 거 맞는데 그만 좀 물어보라고 하지 않았냐고 대답하셔서 제가 그때 거의 꼬치꼬치 캐묻듯 말했어요. 진짜 사랑한 거 맞아?”
그 순간에는 매번 인내하던 아버지께서도 순간 울컥하셨는지, 엘레나 양을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 한다.
“엘레나, 진짜 사랑이란 게 뭔지는 알고 아빠한테 그런 걸 묻는 거야?”
“…아.”
이게 발단이었나 보다. 이제서야 말을 멈추고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적거리며 말을 맺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대답했죠. 진짜 사랑이란 게 뭔지 알아내면, 그땐 제대로 대답해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