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92)
이세계 편돌이-291화(292/331)
291. 그럼 이게 맥주라고 치고 (8)
* * *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정신이 멍했다. 버스는 내려야 할 곳에서 반 정거장 지나치고, 내린 뒤엔 엄한 골목길로 빙 돌아서 들어가고, 집 비밀번호는 두 번을 잘못 누르고….
“고롱… 고롱….”
털뭉치가 텅 빈 고양이 우유 박스 위에서 골골대고 있는 걸 봐도 아무 생각이 들질 않았다. 이놈은 1주일 동안 먹으라고 사놓은 걸 반나절 만에 다 처먹어버렸다.
“매아아옹.”
“뭐야. 깼냐?”
“냐옹, 냥. 냐앙. 냐아앙.”
도어락 소리에 잠이 깬 건지 상자 밖으로 걸어 나오며 냥냥대는데, 울음소리가 얄미운 게 ‘우유…? 아아. 그것 말인가? 내가 다 먹어버렸지…’라며 적반하장을 부리듯이 들린다.
평소의 나였으면 킷사마아아―!! 하며 리본부터 부여잡고,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우유들의 복수를 해줬을 텐데 말이다….
“바늘로 배 찌르면 우유 새어 나오겠어, 아주. 어?”
“먕?”
“갈구려는 게 아니라, 훔쳐 갈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살살 좀 먹으라고. 살살.”
여전히 멍해서인지 피식 웃고 우유나 재주문하고 말게 되더라. 폰을 조작해 구매를 마쳤더니, 이번에는 리뷰를 남겨주면 감사하겠다는 배너가 하나 떠올랐다.
누른 뒤, ‘저희 집 털뭉치가 밥은 안 먹고 이것만 먹어요’라 적고 별점 5개를 줬다. 다음엔 폰을 대충 던져놓고 빈 우유곽들을 치우는데, 다리에 부드러운 뭔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털뭉치 놈이 앵겨붙은 거였다. 하던 걸 멈추고 가만히 내려다보니, 염동력으로 내 바람막이를 툭툭 건드리며 몇 번을 더 냐옹거린다.
“매야옹?”
이놈이 안 하던 짓을 하고 있다. 늘 그렇듯 뭘 묻는지는 짐작이 안 가서, 나름대로 추측해 대꾸해주고 말았다. 이 녀석한테 데이트를 다녀온다는 얘기는 해뒀었다.
“그래. 잘 갔다 왔다.”
“먀옹, 먕.”
“니가 우유 다 해치운 것도 봐줄 정도로 잘 다녀왔지. 진짜 별짓 안 하고 봐줄 테니까 너도 니 볼일이나 보라고. 저기서 마저 골골대든, 쓰레기통을 헤집어놓든―”
“냐옹. 먕. 먕.”
“썰은 뭔 놈의 썰이야. 나 잘 거니까 냅둬. 인마.”
마지막은 적당히 해본 말이었는데, 말을 끝내자마자 발목에 냥냥펀치를 날려대기 시작했다. 정말 썰을 듣고 싶어서 이러는 게 맞았나 보다.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무시한 채 씻고 옷 갈아입고 이불 위에 누웠는데, 잠이 안 온다. 눈을 감아도 아까 내릴 정거장을 지나쳤던 기억만 자꾸 떠오르더란다.
살면서 처음 해본 실수였다. 시간도 자원이잖은가. 멍때리다가 내릴 때를 놓치면 그만큼 자원을 손해 보는 셈이 된다. 다음에는 같은 실수를 안 해야 될 텐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평소였다면, 매장 앞에 멈췄을 때 당연하다는 듯 내렸을 것이다. 근데 그때는 반대쪽 창밖 상가들 간판에 신기하게 관심이 가더라. 카페, 마법 VR실습장, 무인 인형뽑기 오락실, 등등.
이 주변이 놀거리가 꽤 많더라. 내가 관심이 없어서 몰랐을 뿐이지. 이 생각을 하고 있었고, 다음에는 ‘엘레나랑 어딘가를 같이 갈 일이 생긴다면, 저 중에….’
* * *
“그거, 들떠서 그랬던 거 아냐?”
저 생각을 하다 나도 모르는 새 잠들었고, 눈 떠보니 창문에 달이 걸려있었다.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매장으로 달려갔는데, 점장이 내가 들어온 걸 확인하자마자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란다.
이 입꼬리가 유니폼을 갈아입고 인수인계를 받는 동안에도 가라앉질 않아서, 인수인계 끝낸 뒤에 내가 먼저 물어봤다. ‘혹시 저 오후에 뭐 했는지 유리한테 들으셨어요?’
그러자 점장이 씨익 웃으며 마저 말한 내용이, ‘찬이가 나한테는 쉽게 말 못하더라도, 분명 아주 즐겁구 재미난 경험을 했을 거라고 하던데?’
이러길래 그냥 다 이야기했다. 염치없게 인생 처음으로 여자 사람 친구랑 동물원을 가봤고, 가서 아주 즐겁고 재미난 경험을 마친 뒤엔 내려야 할 버스 정거장을 지나쳐버렸다고.
이 부분에서 점장이 저렇게 답변했다. 순간 놀리려는 건가 싶어 뚫어져라 얼굴만 바라봤는데, 마저 말하는 걸 들어보니 아니었다.
“봤던 간판 목록까지 다 기억하구 있는데, 그게 어떻게 멍한 거야? 정신 똘망똘망한 거지.”
“아니, 똘망똘망까지는….”
“둘이 같이 놀면서 엄청 재밌었나 보네, 찬이.”
내가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은 편이어서 그런 거 아니냐. 대꾸해봐야 들은 척도 안 할 것 같아 말을 바꿨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질문이긴 하지만….
“그, 사람이 들뜨면 안 하던 실수도 하게 되고 그래요?”
“그야― 엥? 질문 의미를 잘 모르겠는데?”
“말 그대로예요. 제가, 그… 솔직히 말씀드리면요.”
이렇게까지 아무 생각 없이 놀아본 건 어제가 처음이다. 이 동네에서도 처음, 원래 살던 곳에서 주민등록증 발급받은 이후로도 처음.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어렸을 때는 머릿속에 놀 생각만 가득 채우고 살았던 거 같은데,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는 즐겁다는 말을 입에 담아본 적이 손에 꼽는 것 같다.
일부러 즐길만한 뭔가를 찾아다녔던 기억도 없고. 애써 즐긴다 한들 며칠 뒤면 그 기분이 다 희석될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애초에 뭔가를 즐길 여유가 없기도 했다.
“이렇게 동물원이든 어디든 놀러 간다고 하루 일 비워버리면 그달 수입이 1/30 떨어진단 말이죠. 당장 하루 기분 좋아도 월급 내역 보면 이틀 우울할 거 다 아는데. 다른 직장인들도 다들 비슷하지 않습니까?”
“음….”
“그래서 일 없을 때 빼곤 거의 놀아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반나절 날 잡고 논 걸로 안 하던 실수를 하게 되니까, 좀… 찝찝하네요. 기분이.”
여기에 푹 빠졌다가는 출근도 늦어지고, 나중에는 놀 생각에 머리가 꽉 차서 자기 할 일조차 제대로 안 하는 놈이 되는 거 아닌가. 그걸 방지하려면 스스로 자제를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내가 망가진 놈이라 이런 생각을 하는 건가. 요새 옛날에 비해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어서인지 배부른 고민을 자꾸 하게 되는 것 같다. 이걸 점장은 이렇게 해석했다.
“이건 딴 얘기지만, 지금도 따로 취미생활 같은 건 없다는 거네.”
“취미생활은 뭐… 혹시 추천해주실 거 있습니까?”
“찬이 말대로면, 지금 말해줘도 ‘내가 취미생활에 빠져서 일을 제대로 못 하게 될 수도 있겠다―’ 이러면서 안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럴 거 같은데?”
“그렇게까진… 아니지. 그러겠네요. 예.”
내가 순순히 인정한 게 오히려 의외였는지, 말하려던 걸 멈추고는 코로 작게 한숨을 내쉬는 점장. 29살 먹고 애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한심하게 보이겠지. 나도 인정한다.
잠깐 말없이 바라보던 중, 뭔가를 깨달았다. 점장한테 이런 말을 한 건 아예 처음이었다. 하루를 쉬면 한 달 수입이 1/30 떨어진다.
“…예전에는 30일을 꼬박 다 일했다는 얘기겠네.”
“이건 전에 말씀 안 드렸었죠?”
“말 해줬었으면 진작에 내가 뭐라도 해줬겠지. 유급휴가를 좀 더 챙겨준다던가, 근무시간을 조정한다던가.”
“아니, 그걸 왜 점장님께서 챙겨주십니까.”
“내 맘인데? 억울하면 찬이도 점장 하던가.”
이러고는 니가 어쩔 거냐는 듯 혀를 빼꼼 내미는데, 난 놀러 가라고 휴가받더라도 쓸 생각 전혀 없다. 억울하면 직원 하던가.
말없이 어깨만 으쓱하자, 내밀었던 혀를 집어넣고는 자기 유니폼을 벗어 툭툭 털기 시작했다. 다 털어낸 후엔 별거 아니라는 듯, 지나가듯이 툭 한 마디를 묻는다.
“지금 찬이 옛날에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면, 대답 해줄 거야?”
“잘 아시잖아요. 전 직장이 망해서 저도 망했고, 점장님께서 망한 놈 주워주셨고….”
“그거 말고, 그 이전에.”
“그건 말씀드릴 수 있죠. 필요한 거 몇 개만 구해주신다면요.”
“어떤 거?”
“사과나무 묘목 한 그루랑 제 머리 위에 떨어질 운석 한 개, 그리고 모종삽.”
“머리에 운석 떨어지면 말은 어떻게 하게?”
말은 두개골이 소멸된 미래의 내가 알아서 꺼내겠지. 이런 거창한 것들이 아니더라도, 대체품이 곁들여진다면 말을 못 할 건 없다. 손님 없는 적당한 호프집 한 곳, 맥주 두 잔.
순수하게 내 의도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난 스스로에게조차 하기 싫은 이야기를 남에게 들려주고픈 마음이 결코 없다. 그 대상이 날 주워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내가 작고 소중해서 말하기가 싫다?”
“절반 정도는요.”
“둘 중 어느 쪽으로 절반인데.”
“점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그게 맞을 겁니다. 여튼 지금 10시 다 됐는데, 퇴근하실 겁니까? 점장님?”
“찬이 얄미워서라도 더 있구 싶기는 한데… 지금 안 가면 내일 출근 못 할 것 같아. 힘들어.”
월요병 소독을 위해 체내에 알코올을 접종받고 온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밀려들었고, 그래서 죽을 맛이었다고. 그래도 점장이 조기퇴근은 안 했다.
“아직 2분 남았으니까, 그동안 할 말마저 하구 갈래.”
“아무렴요. 어떤 얘기요?”
“오늘 같은 날은 말야. 더 생각하지 말구 그냥, ‘아. 즐거웠다―‘ 하면 돼.”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게 안 되는 놈이라서 그렇지. 점장도 나에 대해 알 건 다 아는 사람이었고, 여기서 말을 멈추지도 않았다.
“막말루, 엘레나 그분이 한 번 더 같이 놀아달라고 부탁하면 찬이 무조건 뛰쳐나갈 거잖아. 그걸 즐길 수 있든 없든 간에 말야. 아니야?”
“그건, 그렇다 칠게요.”
“그래. 다른 사람들 신경 쓰고 얘기 들어주는 거 안 멈추는 이상, 찬이는 앞으로 평생 놀러 다니고 하하호호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구. 그럼 고민을 하더라도 다르게 해야지.”
안일해질 게 싫어 안 놀 게 아니라, 실컷 놀고 난 다음에 어떻게 정신줄을 붙들어 맬지를 더 걱정하라는 조언이었다. 그럼 정신줄을 붙들어 맬 생각조차 안 들 경우엔 어떻게 해야 되냐?
“그건 전혀 걱정하지 말구. 찬이가 지각하고 전화를 안 받거나 애매하게 약속 있다는 말 하거든, 이 별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혼내줄 테니까.”
“예. 그땐 달게 받겠습니다….”
“애초에 그럴 일도 없을 것 같지만 말야. 매장이 물에 잠겨도 카운터 지키는 애가 지각은 무슨.”
그거야 내가 여기 망하면 갈 곳이 없어서 그런 거였지. 반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어깨에 핸드백을 들춰메는 점장.
말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리고, 이게 찬이 꿈이랑도 관련이 있어.”
“제 꿈이요?”
“잘 먹고 잘 사는 거. 오늘 잘 먹고 잘 살았잖아. 그치.”
이 말에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더라. 순간 아찔해져서 머리만 매만지고 있자니, 점장이 허리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고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 갈게. 수고해, 찬아.”
이렇게 나가버렸고, 약 30초가량을 현금 세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가만 서 있었다. 손님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 일요일 밤 10시 전후로는 손님이 없다.
겨우 현금시제 생각을 해낼 즈음, 톡 알람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폰을 꺼내서 확인해봤다. 점장 거였다.
[ 아까 물어보려다 만 거 하나 더 있는데 ] [ 나 VR 마법실습장 가자구 하면 같이 가줄 거야? ]언제요, 라고 답장을 보냈다. 상사가 가자는데 안 갈 수는 없잖아. 답장하는 동시에 톡이 한 줄 더. 이건 발신자가 점장은 아니고….
유리 거였다. 내용은 다소 뜬금없었다.
[ 내일 4분 정도 늦을 거 같아요 ] [ 안 하면 안 되는 일이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