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94)
이세계 편돌이-293화(294/331)
293. 그냥 아는 사람 얘기 (2)
* * *
유리 녀석이 둘러댄 말들을 늘 곧이곧대로 믿었던 건 아니다. ‘그냥 아는 사람’이라는 짧은 단어 어딘가에 거짓말이 섞여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마법, 초능력, 그 외의 뭐든 간에.
헌데 지금 들어보니 아니었다. 저 녀석은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 오후 4시 27분. 우리 자취방에서 반 블록 떨어진 빌라 건물에 불이 날 거야. 멀티탭에 과전류가 흘러서고, 26분에 소방차를 불러. 미리 부르지도, 너무 늦게 부르지도 말고.
서로 고향, 출신 학교, 현 거주지마저 똑같은 동시에 이름마저 동일한 사람이 아는 사람이 아니면. 대체 누가 아는 사람인데?
이보다 더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동시에, 아는 사람이라고만 둘러대 온 유리 녀석 심정도 단박에 이해가 됐다.
― 오후 8시 49분. TV에 한두 번 언급되고 말 뉴스가 나올 텐데, 나오기 전에 TV 꺼. 보면 며칠 불편할 내용이니까 궁금해하지도 마. 내가 먼저 불편해 봐서 잘 알아.
미래의 자신과 전화통화를 한다는 걸 어떻게 솔직하게 얘기하냐고. 나였어도 똑같이 둘러댔을 거고, 목에 칼이 들이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비밀에 부쳤을 것이다.
그 비밀이 지금 줄줄 새어 나오고 있다. 이게 궁금하지 않았던 건 아냐.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폰을 끄는 게 맞다.
끄고 모른 체하면 된다. 그럼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게 된다. 분명 그러면 됐는데….
― 그리고, 오후 10시 27분에는―
“오빠. 정류장에는 없어서요. 혹시 매장에.”
그 전에 유리가 돌아왔다. 무릎에 모래가 살짝 묻어있는 게, 무릎 꿇고 정류장 벤치 밑까지 샅샅이 뒤진 듯하다.
사실 눈을 마주칠 엄두가 안 나서 무릎만 내려다봤다. 하려던 말을 뚝 멈췄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를 곧바로 깨달은 게 분명했다. 72시간 뒤의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 …아.
짧은 공백조차 없던 설명이 멈추고, 폰에서 탄식에 가까운 한 글자가 흘러나왔다. 뒤이어 한숨 섞인 목소리.
― 그러게, 정확히 6시 5분에 출근하라니까.
이걸 끝으로 음성메시지가 뚝 끊겼고, 나와 유리. 그리고 매장 스피커 출처의 작은 음악 소리만 남았다. 난 아무 말도 못 했고,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안 한 거든가.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일부러 들으려 했던 건 아니야? 전화번호가 네 것과 같아서 잠깐 벙쪘고, 그 사이에 음성메시지가 멋대로 재생됐을 뿐이야?
“오빠.”
“…어.”
“제 지갑 어디 있다고 하던가요.”
그 전에 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을 듣고 나서야 시선을 피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 들어 유리를 바라보니, 오히려 유리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흘러내린 앞머리가 눈가를 가리고 있다. 공회전만 하던 뇌의 엔진마저 꺼지고, 방금 들은 한 문장으로 머릿속이 꽉 차버렸다. 지갑 어디 있다고 했었지?
“두 번째, 테이블 바로 옆 진열대. 그 밑에.”
듣자마자 뚜벅뚜벅 진열대로 걸어가서는 몸을 숙였고, 지갑을 꺼내어 먼지를 툭툭 털어낸다. 저 별거 아닌 동작이 지금은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이제서야 해야 할 말이 떠올랐다. 지금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변명도, 사과를 할 때도 아니다. 저 녀석을 안심시키는 게 먼저였다.
“유리야. 방금 거 나는 전혀 신경 안 쓴다. 신경 안 쓸 거고―”
“그럴 리가요.”
단박에 내 말을 잘라버렸다. 먼지를 턴 지갑을 주머니에 넣은 뒤, 유니폼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두 마디를 더 내뱉는다.
“그걸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주식 얘기도 다 했을 텐데….”
“…….”
“부자 되세요. 오빠.”
직후,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녀석이 버스정류장 쪽이 아닌 쇼윈도 오른편으로 뛰어갔다. 현재 시각이 오전 6시 10분.
목적지가 존재할 수 없는 시간대였다. 이걸 빤히 알고 있음에도 저 녀석을 쫓아갈 엄두조차 내질 못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생각만 자꾸 들어서였다.
“…가더라도 폰은 들고 가든가.”
폰에 메시지가 남아있으니, 메시지 때문에라도 폰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따위로 굴 거면 나이는 도대체 왜 처먹었나 싶다.
* * *
오후 2시까지는 내가 카운터를 봤다.
유리 녀석이 탈주해버린 탓에 매장을 지키는 것도 자연스레 내 몫이 됐다. 16시간 내내 깨어 있는 게 피곤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근무는 제대로 했다. 의도치 않은 추가 근무로 징징대기엔 내 업보가 무척 크기도 했고, 피곤해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마음이 착잡하기도 해서였다.
“어? 오늘은 그 애 말고 다른 분이 근무하고 계시네.”
이 손님 때문이었다. 오전 10시 즈음 골프웨어를 입은 사자 수인이 들어왔는데, 얼굴 주름 배치가 추정 50대 중후반으로 보인다. 그 외에는 여유가 무척 많아 보인다는 점 정도?
“그 애 그만뒀어요?”
“원래 이 시간대 근무자 말씀하시는 거면… 몸이 안 좋아서 쉬겠다 하더라고요.”
“아하. 참 다행, 아니지. 그 애 몸 많이 안 좋대요?”
그리고 실제로도 여유가 많았다. 피로회복제 한 병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는 시간 한번 안 확인하며 말을 늘어놓았고, 대부분이 유리 녀석 이야기였다.
“한번은 그 애한테 골프 얘기를 했는데 그 애가 말을 다 알아듣더라니까. 그래서 골프 쳐봤냐 물어봤는데, 그건 또 아니래. 아는 사람이 골프에 대해 잘 알고, 자기는 옆에서 구경만 했다나?”
유리 녀석 성격상 손님들이 걸어오는 말들을 전부 받아줬을 게 분명하다. 그것도 매장 업무의 일부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아는 사람’에게 미리 물어봐서라도 좋아할 말들을 준비해 뒀을 것이다.
비효율적이기는 하지만, 단골을 만드는 데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다.
“근데, 구경만 했다는 거치고는 웨지나 드라이버, 아이언을 언제 쓰는지까지 다 알고 있더라고. 이제 대학교 다닌다는 애가….”
그래서 유리가 마음에 들게 됐고, 일부러 짬을 내서라도 얼굴을 보러 찾아오게 됐단다. 그 녀석이 나나 점장이 안 볼 때도 열심히 근무했단 거다. 나름대로.
이 해석에 다다르고 나니, 안그래도 착잡하던 마음이 한층 더 착잡해졌다. 마저 말을 이으려다 내 얼굴을 보고는 말을 멈추는 사자 수인.
“혹시 몸 안 좋아요? 표정이 안 좋은데.”
“그… 사실 제가 어제저녁 10시부터 근무했거든요.”
“세상에, 그럼 밤새서 근무하는 거예요? 고생하시네.”
고생은 무슨. 아파서 쉬는 건데, 이건 고생도 아니지….
“이야, 착하시네. 이거 그냥 사장님 드세요. 그 애한테는 몸조리 잘하라고 좀 전해주시고.”
밤을 꼬박 지새웠단 게 안쓰러운지 계산한 피로회복제를 날 주고는 나가버렸다. 뒤이어 갓길에 주차한 고급차를 타고 떠나는 것까지 확인한 뒤, 피로회복제를 계산대 밑 선반에 올려두었다.
주인이 내가 아니라 유리 녀석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 피로회복제는 오후 2시가 되도록 제주인을 찾지 못했고, 점장이 출근했다.
“유리 고생 많았지! 여기 아이스크림 사 왔, 어?”
“오늘 날씨 좋네요. 점장님.”
해맑은 얼굴로 들어오다, 나랑 눈을 마주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툭 떨어트리는 점장. 아침에 있었던 일은 일부러 얘기 안 했다. 그랬다간 점장이 조기출근 해버릴 테니까.
한참동안 눈만 끔벅이다, 얼른 봉투를 주워들고는 종종걸음으로 카운터로 다가와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 점장. 슬쩍 들여다봤는데,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의 물량이다.
“이거 다 먹으려면 날 새겠는데요…?”
“내가 파는 것보다 훨씬 싸길래 잔뜩 사 왔지. 근데 왜 찬이가 카운터 보구 있어? 유리는?”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근데 일이 좀, 심각해요.”
“…아하.”
운을 떼자마자 어리둥절해하던 인상이 싹 가셨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느낌의 표정이다. 점장은 아는 사람의 정체가 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나 보다.
따로 묻기에 앞서 짤막하게 말했다. 아침에 유리 녀석 음성메시지를 엿들었고, 엿듣는 걸 유리가 봤다. 그 음성메시지의 내용이 대충 이러하다.
“오늘 오후 3시, 매직프레셔라는 회사의 주식을 전량 매도해라. 오후 4시 27분, 자취방 근처의 빌라에서 불이 날 거다. 오후 8시 49분. TV에 안좋은 내용의 뉴스가 나올 텐데, 미리 TV 꺼라.”
“엄청 구체적이네.”
“이다음은 유리가 들어와서 못 들었고, 잠깐 대화한 후엔 뛰쳐나갔습니다. 제가 그 녀석을 안심시켜 줬어야 하는데, 얼을 타버려서… 멍해져서요.”
말하다 멈췄다. 이젠 쪽팔려서 말도 못 잇겠다. 고개 숙여 발만 내려다보던 도중, 점장이 내 어깨를 양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일단 앉으라는 의도 같다.
자리에 앉자, 살짝 가라앉은 어조로 묻는 점장.
“우선 알고 싶은 게 있는데, 찬이네 세상에도 예언이라는 개념이 있어?”
“예. 있긴 있습니다.”
“아, 그래서구나. 그럼… 얼마나 정확해?”
“정확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저 살던 곳에서는 예언이라 하면 다 헛소리 취급하거든요. 저도 마찬가지고.”
노스트라다무스, 존 티토, 2012년 지구멸망을 예언한 마야인들의 달력 등등.
미래를 예언했다 주장하는 매체나 예언자들이 툭하면 나타나 세상의 지루함을 달래줬었고, 이 들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지들이 우스갯거리가 될 거라는 점을 예언서에 적어놓지를 않았단 것이다.
물론 노스트라다무스야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그 양반도 일개 사람일 뿐이고, 심심해서 끄적인 일기장이 수백 년 뒤의 후손들의 입에 오르내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겠지.
하지만 나머지 둘은 아니다. 존 티토는 그 난리를 피워놓고도 인터넷에 자기 증명사진 한 장 안 올린 관심병자 놈이다. 그래서 참작이 안 되고, 마야인들은 단체라서 안 된다.
“달력이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 수많은 마야인들 중에, ‘이거 어딜 어떻게 봐도 미친 짓 같은데 그만두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한 사람이 최소 한 명은 있지 않았을까요?”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찬이가 기운을 좀 차린 거 같네.”
“말하다 보니까 좀 나아졌네요. 여튼 저 사는 곳은 그런데, 여기는 어떻습니까?”
“여기는….”
묻자, 바로 대답하는 대신 매장 내부를 한번 둘러보는 점장. 나도 방금 말하기 전에 똑같이 했었다. 매장에 손님이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레 입을 연다.
“옛날에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이젠 없어.”
“그럼 유리 쟤는요. 속단하는 것 같긴 한데, 제가 직접 경험한 것도 있고―”
“표면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길 하는 거야.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인터넷도 복권도 없고, 때문에 ‘저 사람이 예언이란 걸 할 수 있대!’ ‘진짜? 내일 복권번호도 예언할 수 있겠지?’라며 장거리 문의 메일을 보내는 게 불가능했던 옛날에는 예언자가 실존했다고 한다.
그것도 왕가 공인 직업으로 말이다. 그 시절에는 뭔가 특이하다 싶은 마법이 있다면 일단 왕이 나서서 관리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고, 예언자들도 자기 재능을 드러내는 걸 꺼리지 않았다. 시키는 것만 예언하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냐. 옛날처럼 특정 계급층이 자신들만을 위해서 예언자를 고용해 운용한다 하면, 세상이 용납해줄까?”
“…아뇨. 민원 엄청 넣겠죠.”
“그래서 표면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거야. 예언자라는 걸 들키면, 그때는 국가가 보호한다고 선언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어디 비밀연구소로 끌려가든, 옛날에 찬이가 말한 대로 지하에서 설렁탕을 먹든….”
내가 근무 초창기에 했던 얘기들까지 끄집어내고 있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점장이 이 말을 꺼낸 의도가 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됐다.
늘 내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지 모르겠다. 계산대 밑의 공간이동 스위치, ‘찬이네 세상’이라 적힌 라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랑 비슷하네요. 처지가요.”
“그치. 나도 그래서 말 안 했던 거야. 찬이 착잡할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