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301)
이세계 편돌이-300화(301/331)
300. 걸어서 게이트 나들이 (1)
* * *
지금이야 카운터를 보다가도 툭하면 자격증 수첩 내밀며 ‘나 반마법사요―’ 하고 전문가 행세를 하며 다니고 있지만, 이게 순수하게 내 힘으로 일궈낼 결과물은 아니다. 빚을 진 게 하나 있다.
반마법사 시험 실기 단계에서 벌어진 일이다. 실기시험 도중 누나 소속 헌터 사무소의 활동 계좌 잔고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적이 있었고, 그 잔고 자체는 하루 만에 복구가 됐다. 문제는 그 하루 동안 사무소 활동이 아예 멈춰버렸다는 것.
이에 대해 사무소 소장이 직접 찾아와서는 하루를 보상받겠다고 했었고… 또 뭐라고 했더라. 난 네게 돈을 받을 생각이 없다. 대신 두 건 정도 우리 사무소 일을 내게 외주계약하겠다….
“이거 소장이랑 협의 된 거야? 누나?”
누나가 내밀어온 종이가 그 두 건 중 한 건으로 보인다. 외주계약서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게 보인다. 물어본 뒤엔 소장 생김새가 어땠었는지를 한창 떠올리고 있었는데, 누나가 대신 대답해줬다.
“곰탱이? 곰탱이 절대 모를걸? 책상에 올라가 있던 거 냉큼 주워 온 거라서.”
기억났다. 불곰, 그것도 이세계 시베리아 출신으로 추정되는 낚시조끼 걸친 불곰 코볼트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 양반 생긴 것도, 이 건에 대해서도 반쯤 잊고 있었는데….
“…주워 왔다고? 그건 또 뭔 소리임?”
도중에 누나 말이 이상하게 들려 물어봤다. 누나가 왈가닥 기질이 다분하긴 해도 할 때는 하는 성격이고, 일과 관련된 얘기를 할 때는 늘상 진지하게 군다.
헌데 지금은 잇몸이 만개한 것에 더해 말투도 농담조로밖에 안 들리고 있다. 묻자, 종이를 팔락이며 기다렸다는 듯 대답해 온다.
“그 곰탱이가 사람 부릴 때 말야. 사람을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딱딱 집어넣으려 드는 고집같은 게 있거든?”
“뭐… 그러니까 소장하고 있는 거겠지. 합리적이잖아.”
“그렇긴 해. 그 고집이 또 발동된 건지, 널 어디 어떻게 써먹을지 눈에 빤히 보이게 고민을 하더라고. 한 달 내내.”
내가 여태껏 게이트에 끌려가지 않은 것도 그 고집 덕이고, 누나는 이와 상반된 고민을 해왔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이 녀석이 일을 최대한 날로 먹게 할 수 있을까?
“너 잘못돼서 병원 신세 지면. 카운터는 누가 보냐?”
“아, 그거 참 눈물 나게 고맙네….”
“여기까진 농담이고, 이 계약서가 그 고민의 결과물이라― 이거야. 게이트. D급.”
“……어휴.”
“왜. 싫냐?”
한숨을 푹 내쉬자, 들뜬 표정을 가라앉히고는 전자담배 파이프를 꺼내며 묻는 누나. 그래도 대답 안 했다.
이게 내가 이 동네에 가지는 가장 큰 불만이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의 게이트.
이것만은 아무리 접해도 익숙해 지지가 않는다. 나 살던 동네는 산에서 불이 나면 경보가 울리고, 비가 많이 오면 침수 피해가 예상되니 외출을 삼가라는 재난 문자가 전송된다. 대비가 된다는 뜻이다.
근데 이 게이트란 놈은 그렇지가 않다. 잘만 영업하던 편의점 밑바닥에 느닷없이 수백m 깊이 동공이 뚫리질 않나, 외눈박이 블랙홀 같은 게 한눈 시퍼렇게 뜨고 사람을 노려보질 않나….
더 익숙해지지 않는 건, 이 예측불허의 자연재해를 대하는 사람들 태도다. 게이트를 언급하는 누나 태도가 어째, ‘쓰레기 수거함에 작게 불이 났다는데 잠깐 끄러 갔다 올래?’ 이러는 것 같어.
듣고 있는 점장은 ‘수거함에 불이 났어? 그거 참 큰일이네.’ 이러는 것 같고. 그래도 나랑 눈 마주치자마자 쓴웃음부터 짓고 보는 게,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훤히 짐작이 되는 모양이다.
“찬이, 오늘 밤길 조심 잘했어?”
“예. 나름 잘 조심했는데 이렇게 되네요… 잠시만요.”
주머니에서 톡알림이 진동해댄다. 적당히 답장하고 다시 집어넣을 생각이었는데, 톡 발신자가 점장이었다. 아까부터 왜 계산대 밑에 손을 감추고 있나 했다.
[ 미리 얘기 들어봤는데, 전에 찬이가 겪었던 만큼 큰일까진 아냐. 그 규모면 이 세상에서도 진짜로 큰일 맞기도 하구. ] [ 그런 일 겪은 다음이니까 찬이가 걱정하는 거 백번 이해해. 이해하구… 찬이도 윤하 얘기 다 듣고 나면 신경 엄청 쓰일 걸. ]이 세상 저 세상 얘길 대놓고 할 순 없으니 톡으로 대신한 거다. 나와 점장을 번갈아 바라보다, 내 폰쪽에 얼굴을 기웃거리며 묻는 누나.
“뭔데. 중요한 톡 왔냐?”
“나중에 알아서 대답할 거니까 걱정 말고, 이거 사인하고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야. 당장 안 하면 내일 중에 또 물난리 나는 건가?”
“그 정도까진 아닌데, 우리한테 급한 일은 맞아.”
이게 곰탱이 소장을 거치지 않은 일이라, 언제 그 양반이 눈치채고 계약서를 회수하려 알 수 없단다. 그때면 날로 먹는 것도 불가능해지고, 그래서 급하다. 이게 첫째.
그리고 둘째 이유. 이건 누나가 설명 대신 계약서로 대답했다. 간이 계약서인지 기본 서식에 휘갈기듯이 장소나 일정, 공략 과정 등의 항목이 채워져 있었는데, 이게… 그러니까….
“아니, 누구 작품인진 몰라도 지렁이 예술로 그려놨네.”
“그거 내가 쓴 건데?”
“용이 승천하는 과정을 아주 웅장하고 위엄있게 묘사했단 얘기였어, 누나. 근데 이거 진짜로 속뜻이 뭐임?”
“맨 밑이 공략 과정. 막 발견했고 발생 초기 단계라 경찰이랑 협조해서 시민들 접근금지부터 시킬 거고, 진입 가능하다 싶으면 바로 진입할 거야.”
“그리고?”
“그 위에 공략 기한은 오늘 오후에 발견했으니 오늘 오후 적었고, 길어야 3일 걸릴테니 3일 적어놓은 거고. 규모는 D급에 예상 피해 반경은 지름으로 500m쯤….”
남은 항목이 발생 장소였는데, 주소지를 듣자마자 귀에 무척 익은 장소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학원지구 정문에서 7분가량 떨어진 주택가, 골목길이 많은 지점.
“…거기 우리 집 근처 아냐?”
“근처는 아니고, 도보로 1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골목이지.”
다시 누나를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하고는 덧붙인다.
“그러니까 사인부터 하라고 했잖아. 이 녀석이 속고만 살았나.”
* * *
내 인생 두 번째로 반차를 썼고, 인생 첫 번째로 직장상사에게 교대 직전에 연장근무를 부탁했다. 다행히도 점장이 보살의 마음으로 이해해줬다.
“솔직히, 아까 장소 듣자마자 이렇게 될 거라구 예상은 했어.”
“죄송합니다. 제가 어지간하면 근무 끝나고 할텐데, 제 집이… 아니 근데 이 망할 것이 저희 직장 한 번 적셨으면 그걸로 만족할 것이지, 왜 기어이 제 집까지 박살내려 드는 걸까요?”
“그러게. 비틀린 애정표현 같은 건가?”
“이 녀석 팔자가 사나워서 그런 거지. 별 이유 있겠어?”
서로 벗거나 입었던 유니폼을 다시 갈아입으며 짧막하게 대화했는데, 누나가 툭 던진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힌다. 아니, 진짜로 많고 많은 곳 중에 왜 하필이면 내 집 근처에 이게 나와?
하도 억울해서 중얼거렸는데, 내 유니폼을 받아든 누나가 비수 위에 비수를 한 차례 더 꽂아버렸다. 원래 헌터라는 직종이 팔자가 사납기로 유명하고, 내 팔자가 자기가 만나본 일반인들 중에는 독보적으로 사납댄다. 말인 즉.
“이찬 넌 아무리 봐도 이쪽 체질이야. 몸이 허약한 게 흠이긴 하지만.”
“앞으로도 평생 허약할 예정이니까 꿈 깨셔, 누나.”
“맞아. 찬이는 평생 허약할 거니까 꿈 깨, 윤하야.”
“애초에 꿈도 안 꿨어.”
점장이 앞에 있어서인지, 누나도 단 둘만 있을 때처럼 적극적으로 놀려대지는 않았다. 정문 밖으로 나와서는 점장에게 잘 다녀오겠다고 말 건네고, 점장은 잘 다녀오라며 등 툭툭 두드려주고―
이렇게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것도 보통 거리가 아니라 6월 중순, 밤 10시의 방학맞은 대학가 앞을 낀 번화가 앞 거리다.
어떤 드워프는 수염 대신 머리가 풍성한 여성 드워프와 팔짱을 낀 채로 거리를 거닐고 있고, 어떤 하피들은 가로수 가지에 설치된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한가하게 다리를 휘젓고 있고… 참.
도보로 7분 떨어진 곳에서 게이트가 생기는 중인 거리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북적거리고 있다. 나오자마자 전자담배를 한 모금 깊게 마시고는, 저 멀리 비틀거리는 고블린을 바라보며 내뱉는 누나.
“어우. 나도 한 번은 저렇게 아무 생각없이 취해서 걸어보고 싶네.”
“요새 바빠? 나 딱지 칠 때는 인형옷 입고 있었잖아. 그거 사이즈만 좀 작았으면 어울렸을―”
“이찬 니가 한 번 입어봐라. 사이즈고 나발이고 덥다는 소리밖에 안 나올 걸.”
“그럼 말 안함. 여튼, 바빴냐고.”
“그거 때문에 그나마 바빴고, 그 외엔 다른 이유로 바빴지. 슬슬 제철도 됐고….”
지난 달에는 5월엔 게이트가 덜 나온다― 이 얘기만 들었었고, 이 이후 얘기는 처음이었다. 매년 6월 경에는 게이트 발생 빈도가 어떻느냐.
“지역별로 달라. 한적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녀석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여긴 그나마 한가하거든.”
“왜. 그쪽 터가 안 좋아?”
“터는 똑같이 안 좋은데, 이 근방은 나라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시니까 한가하다고. 딴 곳에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해야되니까. 발생 지점 파악이라던가, 규모 파악이라던가.”
“시 별로 배정된 예산에 따라 다르단 얘기네.”
“억울하면 상경하란 얘기기도 하지. 여튼, 이번엔 절차 정상적으로 밟아서 지원 널널하니까 너무 걱정 마라.”
이러고는 등 툭툭 두드리는 걸 보니, 누나도 전에 내가 죽어라고 굴렀던 걸 은근히 신경 쓰는 것 같다. 뒤이어 피식 웃으며 전자담배 두어 모금 더 마시는 걸 마저 지켜보다, 먼저 걷길래 따라갔다.
걷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았다. 지금 할일 얘기 잠깐에, 평소 하는 일 얘기를 좀 섞어서 했다.
“누나가 걷고 있어서 나도 똑같이 걷고는 있는데, 게이트 이거 못 없애면 개판나는 거잖아. 이렇게 여유 부려도 되는 거임?”
“이번 건 못 없애도 개판까진 안 나. 기껏해야 땅 조금 기울고, 물 좀 새고… 재수 없으면 마수들 튀어나와서 전선 물어뜯고 그러겠네.”
“그럼 그 근방 입주민 입장에선 개판 난 거 맞잖아.”
“개판 아냐. 그 지경까지 가면 보상 다 해주고, 그 지역 담당 사무소 헌터들 세워놓고 24시간 철통감시 시키거든. 오히려 다른 사무소에서 ‘어머어머. 얘네 일하는 꼴 좀 봐―’ 이러면서 놀리러 오는 게 개판이라면 개판이지.”
헌터에게 있어 개판이 난다면 이것 말곤 없댄다. 수습 가능한 수준의 개판이 날 경우엔 소속 사무소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수습 불가능한 상황엔 모가지가 떨어지는 것.
“허, 참.”
“그리고 이번 건 꽤 빨리 발견한 편이니까, 걸을 여유 정도는… 얼씨구.”
한창 말하던 도중, 대뜸 우뚝 서서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따라 멈춰서 누나 시선 끝을 확인했고, 나도 절로 한탄이 나왔다.
낯익은 얼굴, 낯익은 풍채가 하나씩 서있는 게 보여서였다. 낯익은 얼굴은 팔에 출입금지 테이프를 둘둘 말고 있고, 풍채의 주인은….
“서 부소장.”
“…아, 왜요. 소장님.”
“요새는 현장 출동할 때 걸어서 출동하나?”
낚시조끼를 입고 있었고, 불곰이었다. 이제 날로 먹긴 글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