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304)
이세계 편돌이-303화(304/331)
303. 걸어서 게이트 나들이 (4)
* * *
대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종족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미처 완성되지조차 않은 마법들을 닥치는 대로 내보였다. 예를 들어 인간.
인간들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공간을 잇는 아공간 생성 마법을 주로 사용했다. 용도는 대규모의 물자 혹은 병력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수송하는 것.
또, 엘프들은 세계수 묘목을 보급기지에 심어 마력을 산출하는 유전으로 사용했다. 드워프들은 마석을 동력원으로 삼는 병기들을 만들기 위해 망치를 두들겼고, 고블린들은 피폭된 지역 일대의 마력을 오염시키는 생화학 마력 폭탄을 쏘아댔고…
“그러다가 전쟁 끝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거야. 안정화가 덜 된 마법들이 서로 뒤섞이면 아주 엿같은 결과가 일어난다는 거.”
그때서야 깨달았다기보다는 위험한 걸 알아도 멈출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전쟁인데 안정화 따위를 할 시간이 어디 있어. 여튼….
우선, 아공간에 마력을 오염시키는 폭탄이 떨어진다.
그 결과로 출입구를 유지하는 마법진에 변질이 일어나 주변 환경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다, 제멋대로 소멸한다. 하여 출입구도 없고, 통제도 불가능해진 아공간만이 남았다.
아공간 내부에 떨어진 마력 폭탄들이 빨려 들어온 것들을 계속해서 변질시킨다. 세계수가 이슬을 양분 삼지 않아도 시들지 않도록 변이하고, 사라져야 할 아공간이 끊임없이 마력을 공급받아 영구적으로 유지된다.
그러다 소멸할 때에 그러했듯 제멋대로 현실에 출입구를 드러내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이 현상이 종전 후 수년이 지나도 멈추질 않자, 사람들은 이를 자연재해라 규정해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게 게이트다?”
“어. 그래도 처음 관측됐을 땐 저렇게 탱크나무가 자라날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다고 하거든?”
수십 년간 독자적으로 변질되어온 끝에 이 꼴이 나버린 거고, 마수도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자기 영역으로 돌아간 동물들이 게이트에 빨려들어가 최초의 마수가 되어버린 거라고.
어째 내가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나는 이게 매-직 기원전부터 전해내려온 유서깊은 괴현상일 거라고만 짐작해왔기 때문이다.
최소한 원인이 사람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다. 이딴 걸 만들어내고 싶어했을 놈은 세상 천지에 아무도 없었을테니…
“그리고… 아. 이것만은 아무도 책임 안 졌대.”
“웬 책임?”
“아공간을 만든 건 너희 인간들이지 않냐, 세계수를 심은 건 너희 엘프들이지 않냐, 늬들 고블린들 폭탄때문에 그런 거 아니냐- 따져대면, 밑도 끝도 없잖아?”
다 같이 잘못한 거니까 책임도 우리 모두가 다같이 져야한다- 라는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갔다는 얘기인 듯 한데, 이 즈음부터 누나 설명이 점점 애매모호해져갔다.
자세히 좀 설명해달라고 해봤더니, 역으로 가슴을 펴고는 떳떳하게 대꾸해온다.
“사실 나도 잘 몰라. 정기교육 시간마다 졸기 바쁘거든.”
“아. 그러세요…”
“내가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나도 필기는 답이 없단 걸 알아서, 동기들 참고서 달달 읊고 다닐 때에도 센터에서 훈련용 골렘 하나라도 더 박살내고 다녔-”
“그럼 역사 얘기는 그만하고, 다른 얘기 좀 하자. 누나.”
“어떤 거. 근데 넌 왜 그렇게 표정이 우울하냐?”
“난 매사 우울한 놈이라서 이런 거고, 누나는 지금 무진장 기분이 좋아보이거든. 근데, 우리가 마냥 기분 좋을 상황은 아니지 않아?”
지금 소풍 왔냐며 누나를 맥이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누나 표정이 상황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활기차게 보인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한쪽 장갑을 벗어 손을 내밀자, 만면에 미소 가득한 얼굴로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누나. 그러다 덥석 붙잡았고, 동시에 올라가있던 입꼬리가 평탄해졌다.
내 추측이 맞았던 것 같다. 여기가 색만 이상한 곳이 아니다. 공기중에 뭔가가 있다.
“오늘따라 이놈이 왜 이렇게 우울한가- 했더니, 내가 문제였네.”
“이거 환각마법 같은 거야?”
“원류는 진정 마법일 걸? 환자들한테 자주 쓰였다고 하니까.”
“아하. 환각이 아니라 모르핀 마법이다….”
“뭐, 그런 거지. 평소라면 몸으로 때우다 다 끝날 즈음에나 알았을 텐데, 역시 전문가 데려오니까 좋긴 좋다, 야.”
여전히 말투가 가벼운 걸 보니, 뭔가가 있긴 해도 아주 위험한 것까진 아닌 모양이다. 반 발자국 다가와 내 손을 고쳐잡고는 마저 묻는 누나.
“내친김에 의견 더 있으면 말해봐 봐. 전문가답게.”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 쥐뿔 모르겠고, 집중했을 때랑 안 했을 때랑 서로 색깔이 다른 곳이 한 군데 있단 말이야. 그게…”
탱크나무인지, 나무탱크인지 뭔가가 질주하고 있는 방향. 저게 대체 어딜 가는 건가 싶어 유심히 바라봤었는데, 탱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상한 점이 튀어나왔다.
저쪽 하늘 일부분이 초록색이었다. 다른 곳은 죄다 연두색인데 저쪽만 검은 물감을 몇 방울 떨어트린 마냥 짙다.
말해주자마자 내가 보던 곳을 따라서 바라보고는 입을 여는데, 이제야 말하는 내용들이 현장 전문가다워졌다.
“이렇게 색이 반전되어 있는 곳 말인데. 시각뿐만이 아니라 감각 대부분이 반전된 경향이 많아. 거리감 얘기야.”
“물리적인 건 또 뭔… 아, 거리감.”
“여기 평야처럼 보이잖아. 넓어 보이니까 오히려 좁을 거라고. 그래서 너가 말한 곳부터 시작해볼 건데, 가는 동안 나한테 말 좀 걸어줄 수 있어?”
“거는 거야 되는데, 왜?”
“방금 봤다시피 환각 걸린 건 스스로는 알기 힘드니까. 너가 계속 말 걸다가 내 대답이 이상하다 싶으면 알려달라- 이거지.”
만에 하나라는 게 있고, 환각에 이렇게 대처하는 게 버릇이 들어버려서 어쩔 수 없단다. 근데 대뜸 말을 걸라고 해도 떠오르는 게 있어야지…
고민하다, 겨우 떠올린 말이 이거였다.
“우리 언제까지 손 잡고 있어야 됨?”
“일 끝날 때까지. 절대 안 놓을 거야.”
“……”
“야, 이찬. 니가 대뜸 장갑 벗어버렸으니까, 이러고 있었다고 핑계라도 대야 문제 생기더라도 보험처리 받을 수 있을 거 아냐.”
“……”
“불편하겠지만 너도 손 뗄 생각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바로바로 해. 너 입 멈췄다.”
* * *
걷는 내내 제일 하고 싶었던 말 대신, 그 다음으로 하고 싶은 말들만 쉴새 없이 꺼냈다. 누나가 자기가 꺼낸 말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진짜 절대로 안 놓더라.
“보통 D급 일 끝내고 나오는 데에 얼마나 걸려?”
“30분. 그때그때 다른데, 오늘은 너 있으니까 좀 일찍 끝나겠다.”
“그게 긴 거야, 짧은 거야. 우리 전에 물난리 난 거 해결할 때에는 2시간 좀 안 되게 걸리지 않았나?”
“그건 특수 케이스지. 언니가 도와준 게 제일 크고, 당장 현역 하셔도 될 어르신께서도 도와주셨었고… 그 분 성함이 울프셨던가?”
“어. 늑대인간.”
“내가 잘 기억하고 있네. 거기에 멍멍이랑 엘레나 그 분도 필요하다는 거 딱딱 만들어주셨었고. 경관 분도 협조 잘 해주셨었고…”
도중에 말을 늘이다,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으로 급하게 말을 맺는다.
찰리 양반한테 고맙다는 말만은 죽어도 하기 싫은 모양이다. 하기사, 고맙다는 말을 건네더라도 바로 쌍욕으로 대꾸해버릴 양반이니…
“까놓고 말해서, 그땐 죽을 각오 하고 들어간 거였으니까. 누구 덕분에 살았지.”
“그게 누군데.”
“짜식이 남일인 척 하네. 너는 또 신기한 게, 고생은 제일 많이 해놓고도 어디에 자랑질 한 번을 안하더라? 그 정도면 어디 뻗댈만도 한데-”
“그 일로 뻗대려면, 내가 그때 뭔 일을 했는지 기억해내면서 뻗대야 되잖아. 누나. 근데 난 그때 일이 기억이 거의 안 나거든?”
“기억이 안 난다고?”
“어. 딱 허언증 환자 취급받을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음.”
“그러냐. 하긴, 이찬 너가 제일 정신 없었을테니…”
이건 거짓말이다. 어제도 세수 끝내고 세면대 물 빠지는 거 보고 반사적으로 흠칫했거든. 물 빠지는 소용돌이가 날 노려보던 뭔가랑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강한 트라우마까지는 아니어도, 게이트가 사람 잡는 곳이란 사실만큼은 그날 확실하게 체감했다. 안 잊어지는 것조차 서러운데, 서러운 일을 일부러 주절대고 다닐 필요는 없지 않나.
그래서 기억 안 나는 척 했고, 이 대화 이후로는 누나 손을 잡고 있던 것도 부끄러움보다는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 더 가까워졌다. 이후로 마저 나눈 대화 주제가 두 개.
“누나. 소장이랑은 친해?”
“그 곰탱이랑 내가? 야 이찬, 술 대작할 때마다 첫 마디로 ‘나 때는 말이야-’ 운 떼고 시작하는 곰탱이랑 내가 친하겠냐?”
“아무튼 같이 술은 마신다는 얘기네.”
“같이 마셔주는 거지, 내가. 그러게 진즉에 같은 곰이든 누구든 만나서 결혼 좀 하라고 누누이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서로 친한 게 아니고서야 결혼이나 좀 하라고 핀잔을 줄 일도, 누누이 핀잔받을 걸 알면서도 술 마시자며 부를 일도 없었을 터다. 친한 거 맞네.
아까 짐작한대로 친구보다는 삼촌과 조카딸 관계에 더 가까워보이지만 말이다. 이게 첫 대화주제였고, 다음 대화도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부모님께선 누나 헌터 일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셔?”
“응? 언니는 별 말 없는데?”
“점장님 말고 누나 부모님 말야. 기특하게 여기신다던가, 걱정을 하신다던가, 뭐…”
삼촌이나 조카딸같은 단어를 생각해서 그런가, 자연스레 누나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게 궁금해졌다. 내가 누나 부모님이었거든 딸 안위가 걱정돼서라도 매일 밤잠을 설쳤을 테니까.
아니면 30살 먹은 딸을 우리가 언제까지 걱정해야 하냐며 서로 다독이고 계실 수도 있겠다. 대답을 기다리던 중, 단단하던 손아귀 힘이 확 풀렸다.
이후엔 질문에 대해 생각하려는지, 전자담배 파이프를 손에 끼워 빙빙 돌리기 시작한다. 한참 뒤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글쎄.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어…”
“정말 해본 적 없어서 그래. 기뻐하시지 않았을까?”
대답이 과거형이다.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걸 그랬다.
“나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여쭤본 적은 없는데, 말을 하긴 하셨었거든. 헌터 좋은 일 하는 분들이니까 안좋게 보지 말고, 좋은 생각만 하라고-”
“누나. 부모님 얘기 오늘 나한테 처음 하는 거 알어?”
“어머. 그래?”
눈이 크게 떠지는 걸 보니, 처음 대화해보는 주제라는 자각이 아예 없었나보다. 파이프를 돌리던 손을 멈춘 채로 날 바라보다, 피식 웃고는 덧붙이는 누나.
“언니랑 착각했나 보다. 미안.”
“…살다 보면 착각할 수도 있지.”
“그래도 대답하려면 해줄 수는 있어. 20년도 더 전의 일이라 이제는 뭐-”
“나중에 해줘, 누나. 나중에.”
내가 먼저 끊었다. 말을 돌리려는 건 아니었다. 게이트 내부의 하늘 중, 지금 우리가 서있는 위치의 하늘이 제일 어둡다. 확인한 뒤, 정면을 바라보며 마저 말했다.
“여기가 거기 같거든. 게이트핵 있는 곳.”
동굴이었다. 갈림길은 두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