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308)
이세계 편돌이-307화(308/331)
307. 걸어서 게이트 나들이 (8)
* * *
내가 살아온 곳. 내 고향은 서울에서 1시간 30분가량 떨어진 시골이었다.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리면 옆에 올림픽대로가 보이고, 그 버스를 쭉 타고 계속 가면 홍대입구. 아직도 농업용 트랙터가 돌아다니는 깡촌이긴 하지만, 교통만은 나쁘지 않다.
그 외의 별다른 특징은 없다. 이 중 할 수 있는 말을 골라 대답해 줬다.
“별거 없는 곳이었어. 거기서 별거 없이 살다 왔고-”
“이 짜식이 또 말 돌리네. 말 몇 마디 한다고 세상이 망하냐? 망해?”
말한다고 세상이 멸망하지야 않겠지. 허나, 우리 관계가 지금처럼 편하게 유지되지도 않을 거라 생각한다.
유리 녀석에게 털어놓는 데에도 큰 결심이 필요했었으니까. 그 녀석 비밀에 대해 먼저 알고, 그 비밀이 내 출신에 준하는 비밀이란 걸 확신하고 나서야 내가 살던 곳에 보여줄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아예 고려 안했다. 내가 먼저 잘못한 일인 만큼, 그 녀석이 날 외계인 보듯 보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거기까진 가지 않았지만….
“별게 없으니까 별거 없다고 말하지, 그럼 뭐라고 하냐고. 지어내서라도 말해줘?”
“지어내면 그게 무슨 의미냐고. 됐어, 짜샤….”
난 두 번 다시 그 경험을 하기 싫었고, 가능하면 상대방에게도 그 경험을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다. 끝까지 말을 돌리자, 김이 샜는지 재킷 가슴팍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누나.
잠시 후 파이프를 꺼내 물고는 내 어깨에 축 늘어져 버렸는데, 파이프를 문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어지간히도 상심이 큰 듯했다.
미안한 마음에 집 근처 맥주집에서 맥주 몇 병과 안주를 싸들고 나왔는데, 그사이에 누나가 전봇대 옆에 주저앉아서는 끙끙대고 있더라.
“…누나.”
“뭐, 짜샤. 이젠 니가 사줘도 맥주 더 안 먹을 거야….”
“누나는 내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그렇게 궁금해?”
측은지심 반, 의아함 반으로 물었다. 누나가 나에 대해 물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대답을 못 들었다고 이렇게까지 시무룩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술기운 탓에 감정이 복받쳤겠거니- 생각하며 물었는데, 누나답다면 누나 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언니가 너 걱정 많이 한단 말야, 짜샤. 이찬 너, 알고 지내는 이종족들 많다며….”
“그게 왜.”
“그 사람들 고민들을 니가 다- 들어주느라, 잠 제때 못 자는 게 다 보인다고….”
차라리 근무 펑크라도 내면 그걸 핑계 삼기라도 할 텐데, 그러질 않으니 쉬엄쉬엄 하라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다나 뭐라나. 이런 식으로 술자리에서 서로 내 얘기를 하던 중, 누나가 점장에게 물었단다.
“그럼 말야. 니 고민은 니가 들어주냐…?”
“나?”
“언니가 남 답답한 건 다 들어주면서, 정작 자기 얘기는 한마디도 안 한다잖아. 상사한테도. 니가 남 얘기 들어주는 건 좋은데, 니 얘기는 누가 들어주냐고….”
방금도 그래서 물어본 거란다. 살았던 곳이 어디건 어떻게 살았건 아무래도 좋고, 뭐든 간에 내게 고민이 있다면 그걸 듣고 싶다. 절친한 누나로서 응당 그래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근데… 짜샤. 내가 그렇게 못미더워?”
“아니, 못미더워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이찬 너보다 잔머리가 덜 굴러가긴 해. 나도 알어. 마수들 멱살 잡아 패는 거 말고는 다 그냥저냥이고….”
이게 누나 술버릇인가 보다. 사소한 건덕지 하나를 잡아서 어떻게든 자학하는 타입.
이런 경우엔 철저하게 무시하다 보면 제풀에 지쳐 그만두는 게 보편적인데, 지금은 쉽게 무시하기가 힘들다. 자학의 주체가 나였기 때문이다. 환장하겠네.
“그래도, 얘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으니까….”
“…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뭐든 하라고. 너 착한 놈이고….”
이 말에 뒤이어, 눈을 지그시 감고는 전봇대에 머리를 기댄 채 중얼거리는 누나.
“너랑 같이 있으면… 친동생이 이런 거겠구나- 느끼거든. 신기하게….”
실제 남매들 대부분 맨날 치고받고 싸우는 거 알고 그런 말 하냐.
넌지시 물었으나, 누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아예 새근새근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누나 어깨를 툭툭 쳐본 뒤, 반응이 없는 걸 확인하고 등에 업었다. 혼자서 야광공룡도 때려잡는 여편네가 가볍기는 무진장 가볍다.
이 몸뚱아리로 어떻게 매일 야근을 하고 마법을 쓰나 싶을 정도다. 얼굴을 어깨에 걸쳤음에도 누나 숨소리가 겨우 들릴락 말락 할 정도라, 슬쩍 말을 걸어봤다.
“누나. 죽은 거 아니지?”
“……쿨.”
죽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맞는 첫 술자리가 누나 뒤치다꺼리를 하는 걸로 끝나긴 했지만, 다행히도 여기서부턴 집이 멀지 않다. 딱 3분 거리다.
이제는 익숙해진 골목, 익숙해진 밤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고, 걸으면서는 아까 누나가 마지막에 건넸던 말을 받았다. 들어도 좋고, 못 들어도 상관 없다는 심정에서였다.
“말해보고 싶은 건 있어. 있긴 한데… 이것만은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 같어.”
“…….”
“그거 듣고 나면, 분명 지금처럼은 못 지낼 테니까. 누나도 인정할걸.”
내가 고향에서 가져온 게 보증금 하나뿐만은 아니다. 상식, 기억, 추억들. 잊고 싶음에도 잊지 못하고 있는 사실 하나도 날 따라왔다.
어머니께서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다른 누군가에게 말해본들 뭔가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말해보고 싶은 게,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하다. 난 이런 놈이야, 누나. 내가 이런 놈인 걸 알고도 나한테 착한 놈이라는 말 할 수 있어?
호기심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대로 지내고 싶다는 소망이 훨씬 더 크다. 마저 말했다.
“여기는 일자리도 있고, 내가 있을 곳도 있고… 나랑 같이 술 마셔줄 사람도 있잖아.”
“…….”
“난 이거면 됐어. 이게 인생이잖아, 누나.”
물론 대답은 없었다. 이러면 맥주는 나중에 먹어야겠구만.
* * *
집으로 돌아와서는 누나를 이불에 던져버린 뒤 맨바닥에 잠들었고, 물 쏟아지는 소리와 털뭉치가 분노에 겨워 울부짖는 소리에 눈을 떴다.
“에야오옹!! 하아악!”
“아. 뭔데, 인마. 머리 깨질 거 같으니까 오늘은 밥 알아서….”
“냐아아아앙!!”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얼굴에 넙적한 뭔가가 날아와 내 얼굴을 철썩 후려쳤다. 붙잡아서 살펴보니, 어제 술안줏거리로 같이 사뒀던 건오징어다. 이 자식은 왜 뜬금없이 남의 얼굴에 건오징어를 집어 던지는 거지?
– 쏴아아아-
“…근데 아까부터 이게 뭔 소리냐?”
오징어에 후려 맞아서 그런가, 멀게만 느껴졌던 소리가 이젠 뚜렷하게 들려온다. 샤워기 물 쏟아지는 소리에, 방향이 현관 쪽 화장실….
생각하던 도중, 화장실에서 누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야, 이찬! 샴푸 어디 있어!”
“?”
저 노처녀가 미쳤나?
“자는 도중에 미안한데, 샴푸 어딨냐고! 나 눈 아파!!”
자는 사람 깨우는 게 미안한 짓인 걸 아는 사람이 남의 집에서 샤워는 왜 하는 거야, 아니 그보다 이게 맞냐? 서른 살 여자가 남의 집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 게 맞아?
지금 튀어나온 누나 머리가 어젯밤 본 야광공룡보다 더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아연실색하거나 말거나, 문에 매달린 채 하염없이 샴푸를 찾아대는 누나.
“셋 셀 때까지 대답 없으면 그냥 자는 줄 알고 비누 쓴다. 하나, 둘-”
“…그, 욕조 뒤! 샤워기 반대쪽 욕조 뒤에 있고, 문 닫아! 문 닫으라고!”
“뭐야, 깨어있었네. 근데 넌 샴푸를 왜 세면대 쪽에 안 놓고 뒤에다 뒀냐?”
“미관상 그쪽이 보기 좋아서 거기 올려놨으니까 문이나 빨리 닫아! 불 꺼버리기 전에!!”
누나 몸이 어깨, 날개뼈 순으로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다. 저기서 골반까지 튀어나오거든 이불을 통째로 누나에게 집어 던질 작정이었으나, 다행히도 그 지경까지는 안 갔다.
알려주자마자 스근히 문이 닫혔고, 이후로는 조용히 샤워기 물 맞는 소리만 들려왔다. 화장실 쪽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옆에서 털뭉치 놈이 작게 울었다.
“매오옹….”
“…너가 왜 하악질 했는지 알겠다, 야.”
집에 날 제외한 타인이 들어오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놈이다. 그 타인이 하룻밤 잔 것도 모자라 샤워를 해대고 있으니 당연히 싫을 수밖에….
“…하아악.”
도중에 또다시 열이 오르는지 내 눈높이에 건오징어를 둥둥 띄워대는 털뭉치. 이걸로 자기 대신 누나를 좀 패달라는 의도같다. 잡아서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말고 나중에 패줄게.”
“먕?”
“내가 친동생 같다잖냐. 저 노처녀가.”
실제 친동생과 친동생 같은 것과는 차이가 꽤 크다고 생각하지만 말야. 생각하던 도중, 샤워기 물소리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몸을 닦을 동안 집안에 있기도 뭣해서, 아예 10분간 밖에서 바람을 쐬다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느낀 게, 누나가 외모에 비해 달라붙는 남자가 없는 이유를 아주 잘 알겠더란다.
“야, 이찬. 너 해장해야 되지 않아?”
“해장은 하긴 해야 되는데, 누나. 그….”
“밖에 걸어다니기 귀찮아서 배달하려고 하는데, 너가 좀 찾아봐. 난 못찾겠다.”
이 말을 내 티셔츠에 내 반바지를 입고, 내 수건을 목에 두른 채로 태연하게 말해오고 있었으니까. 이걸 따질지 말지를 잠깐 고민하다, 포기하고 메뉴나 고르기로 했다.
그리고, 이것도 포기했다. 현재 시각이 오전 8시. 어지간한 식당은 문조차 안 열었을 시간이다. 조용히 폰을 건네자, 반바지에 폰을 넣고는 천연덕스럽게 묻는 누나.
“그럼 우리 뭐 먹냐?”
“뭘 먹고 자시고, 오늘 평일이잖아. 누나 출근 안 함?”
“낮 12시 출근해서 내일 새벽 6시에 퇴근하려고. 술 덜 깨고 현장 뛸 때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거든.”
이 이유로 술을 먹은 날에는 불곰 소장도 어지간해선 터치를 안 한다는데, 이걸 근무조건이 좋다고 봐야할지 나쁘다고 봐야할지 잘 모르겠다. 자유출근 vs 18시간 연속근무.
“그럴 거면 차라리 매장에 해장약을 사다 먹든가.”
“해장약? 난 먹어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나도 안 먹어봐서 모르는데, 그래도 오후까지 술 깨고 밤새는 것보단 약 먹고 일찍 출근해서 일찍 퇴근하는 게 낫지 않아?”
내가 걱정이 돼서 이런다. 어젯밤 누나가 치킨집에서 떠들어댔던 푸념의 9할이 일이 고되다는 내용이었다. 근무시간이 뭣같이 길어서 힘들다, 내 얼굴보다 아침해 뜨는 걸 훨씬 더 자주 본다, 어쩌고저쩌고-
다음 술자리에선 그런 얘길 좀 덜 듣고 싶다. 내켜 하지 않는 누나에게 마저 권하려던 도중, 폰에 짧은 톡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무려….
“…아니. 이 양반이 나한테 톡하는 건 또 처음이네….”
“표정 확 썩는 거 봐라. 누구길래 그래?”
찰리였다. 기념비적인 첫 번째 톡의 첫 문구.
[ 야 씹새야 ] [ 뭐요 ]대답하자, 단 1초의 텀조차 없이 곧바로 답장이 왔다.
[ 와봐 씹새야 ] [ 일단 회사 차렸는데, 이제 뭐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