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310)
이세계 편돌이-309화(310/331)
309. 뭐라도 하겠지, 회산데 (2)
* * *
이 둘이 맞닥뜨린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유리 녀석이 막 알바를 시작했을 때 딱 한 번 정문 앞에서 마주쳤고, 그때도 찰리가 똑같은 반응을 보였었다. 뭐야, 이 희멀건 녀석은?
하나가 단박에 별명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겉모습이 특이하다는 뜻이다. 새하얀 거. 이 특징 덕인지, 찰리도 금방 하나를 마주쳤던 때를 기억해 냈다.
“너 전에 정문 앞에서 마주쳤던 그 꼬맹이잖아. 또 귀찮게 하러 왔냐?”
다소 왜곡은 섞여 있었지만 말이다. 그때 하나가 귀찮게 굴거나 하지는 않았고, 대신 이렇게 반응했다.
“…우으으.”
이러고는 울상이 된 채로 냅다 밖으로 도망쳤었다. 지금도 표정은 전과 똑같이 울상이었으나, 예전처럼 밖으로 도망치지는 않았다. 딱 절반만 도망쳤다.
내 뒤로 쪼르르 달려와서는 허리춤의 옷깃을 부여잡는데, 어지간히도 긴장했는지 꼬리에 더해 손톱까지 빳빳이 세우고 있다. 고개만 빼꼼 내민 하나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입을 여는 찰리.
“야, 편돌아.”
“어… 예.”
“이 희멀건 게 왜 니 뒤에 숨는 거냐?”
들은 후엔 잠깐 당황했다가, 안심했다. 편돌이가 누굴 부르는 건지 헷갈려서였다. 이 양반이 그래도 애 앞에서까지 날 씹새라 부를 생각은 없나 보다. 그 덕에 나도 마음 편히 대답했다.
“저희 서로 친해요. 얘가 저희 매장 단골이라서―”
“내가 지금 그거 물어봤냐고.”
“그럼 뭐 물어보신 건데요?”
“내가 뭔 짓을 한 게 아닌데 왜 숨냐니까, 이 꼬맹이가.”
거울 보시면 잘 알 수 있다. 평소처럼 농담 섞어 대답하려다, 찰리 얼굴을 보자마자 퍼뜩 추측 하나가 떠올랐다. 확인할 겸 에둘러 물어봤다.
“…손님. 이건 딴소리긴 한데, 혹시 애들 좋아하시는 편이세요?”
“내가? 이 놈이 돌았나?”
“아니, 멀쩡한 사람을 왜 갑자기 돌리시고 그래….”
“왜는 개뿔, 날 안 좋아하는 것들을 내가 왜 좋아해 줘야 되는데?”
내 추측이 맞는 거 같다.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애들이 늘 도망만 쳐댄 탓에 애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다는 뜻이 된다.
물론, 애들 입장이 이해는 된다. 키 195cm에 덩치 산만한 어른이 얼굴의 주름이란 주름은 다 끌어모아 인상 찌푸리는데 안 도망갈 애들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고….
헌데 이 양반이 짜증 날 때만 얼굴을 찌푸리는 게 아니다. 뭔가에 관심을 보일 때, 혹은 집중할 때 눈가 쪽에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는데, 그게 모르는 사람 눈에는 영락없이 화난 걸로밖에 안 보인다. 나도 처음엔 뭐가 저리 화 났냐는 생각만 했으니까.
그런 줄 알고 자길 피하는 것만 수도 없이 겪었을 테니, 자연스레 심마에 빠질 수밖에. 생각한 뒤엔 잠깐 고민하다, 하나를 들어 올려 내 무릎 위에 옆으로 앉혀봤다.
내 어깨를 부여잡은 채로 슬슬 눈치를 보다,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 하나.
“…아, 안녕하새여.”
“지금 안녕하겠냐고, 내가.”
“아녀….”
곧바로 으르렁거리는 걸 보면 반쯤은 스스로 자초하는 것도 있어뵌다. 저 양반이 다른 건 다 문제여도 속마음만큼은 크게 문제가 없는 양반인데… 아니지.
“하나야. 이 아저씨 나쁜 아저씨 아니니까, 이렇게까지 긴장할 필요 없어.”
“그… 내. 근대여. 지금 많이 화나신 거 같아갖구….”
“화난 게 아니라, 저 아저씨가 안좋은 회사에서 고생하느라 주름이 많아져서 그래. 하나는 보면 알 수 있지?”
일반적인 애들이라면 진즉에 방범용 호루라기를 꺼내겠지만, 하나에겐 남들에게 없는 재주가 하나 있다. 사람 마음을 색의 형태로 들여다보는 것.
내가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한 번 들여다보는 게 더 납득될 거다. 권하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찰리의 가슴팍을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엥?”
내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려서는 빤히 찰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여 가며 어리둥절해하다, 해맑은 표정과 함께 감탄사를 내뱉는 하나.
“와아!”
“뭐.”
“그개여! 이게 그러니깐여, 그… 이걸 머라구 해야할까여?”
“그걸 나한테 물으면 내가 알아?”
“제송해여. 근대여, 이게 무지, 무지여… 으으음….”
잠깐 표현할 단어가 안 떠올랐는지 한참 동안 말을 더듬다, 알쏭달쏭하게 들리는 대답을 해왔다.
“그러니깐… 아! 무지개같아여, 치와와 아조씨!”
“무지 개같다고?”
“내! 무지개.”
찰리 마음속에 무지개가 피었댄다. 그것도 쌍무지개.
근데 사람 마음색이 무지개색이면 밝다는 거야, 어둡다는 거야. 아니면 그냥 마음속이 혼돈의 도가니라고 봐야 하는 건가?
나도 이 양반 마음색이 어떤 계통의 색일지 내심 궁금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하던 답을 듣진 못했지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아보인다.
“그것두 쌍무지개애여, 도대체 무슨 뜻일까여?”
“쌍무지개고 나발이고 뜻을 왜 나한테 묻냐고. 애초에 지금 뭔 짓 한 건데?”
“그게여. 별 건 아니구….”
최소한 하나가 더 이상 찰리를 피하려들지는 않았으니까. 자기만의 기준대로 무지개색 마음씨에 대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잘은 몰라도 아무튼 나쁜 사람은 아니다.
“저어가 사람들을 보면여. 새카맣거나 새하얗거나, 막 색깔이 보이거든여. 그래갖구―”
한참동안 자기 재주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다, 중간에 머리가 복잡해졌는지 냉큼 결론을 지어버렸다.
“무서우신 분인 줄 아랐는대, 사실은 아니셨던 거져.”
“…….”
“무서운 아조씨라 생각해서 제송해여.”
찰리는 아예 할말을 잃었는지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는데, 평소라면 욕을 사발로 쏟아냈을 양반이 지금은 조용하기만 하다. 가만히 하나를 내려다보다 툭 던지듯 내뱉는 찰리.
“알겠으니까 끼어들지마, 희멀건 꼬맹아. 지금 중요한 얘기 하는 중이니까.”
안 내쫒을테니 방해만 하지 말란다. 허나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호기심이 도졌는지, 하나가 우리 사이 자리에 자연스럽게 착석해서는 해맑게 질문을 꺼내왔다.
“중요한 얘기여?”
“그건 꼬맹이 네가 알 거 없―”
“회사에 대한 얘기 하던 중이었어, 하나야. 회사에서 뭘 할까, 직원분들은 어떤 걸 좋아할까― 이런 거.”
본인이 말하기 싫어하는 눈치같아 대신 대답해줬다. 내가 대답하자마자 찰리가 얼굴을 구기며 황당해했는데,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거다.
“야. 그걸 애한테 말한다고 애가 알아?”
“저희보다는 잘 알 걸요? 얘 어머니 회사 중역이시니까.”
그것도 보통 중역이 아니라 CEO, 기업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다. 엄마를 따라다니며 듣거나 봐왔을 엄마의 의사결정 사례 중 10%만 얘기해줘도 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안 되더라도 딱히 상관 없고 말이다. 최소한 대화하는 동안 애가 심심해하진 않겠지. 우리 둘이 얘기하던 걸 똘망똘망 올려다보다,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하나.
“중역이 머애여?”
이 말에 찰리가 무척 할말이 많아보이는 얼굴이 됐길래, 얼른 주제를 돌렸다.
“하나야. 이따 대답해줄 테니까, 잠깐만 앉아서 듣고 있을래?”
“내!”
“손님께서는 아까 말씀하시던 거나 마저 말해주십쇼. IT 일 하시던 분이 IT 회사 말고 뭘 차리신 거에요?”
“내가 IT 회사 아니라는 말은 또 언제 했는데.”
“아니, 아까는 IT 회사 차렸냐는 말을 언제 했냐면서….”
“말을 끝까지 들어, 편돌이 자식아.”
이러길래 끝까지 들어봤는데, IT도 세부적으로 업종이 나뉜다고 한다. 은행 금융어플을 만드는 것도 IT, 계산용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도 IT, 서버나 DB 보안도 죄다 IT.
이걸 감안해 주업종을 IT, 부업종을 ‘각종 소프트웨어 제작’ 이라 적어놓긴 했으나, 몇 년간 해온 보안쪽 일만은 전혀 맡을 생각이 없다고. 이유는 심플했다.
“더럽게 지겨우니까. 전화 받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건 이해하겠는데, 그래서 뭘 하실 거냐고요.”
“보안 빼고 안 지겨운 거.”
정리하면 세부업종을 뭘로 정할지 추천해달라는 얘기인 듯 한데, 대답하기에 앞서 찰리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잔뜩 쌓여있던 주름이 다 펴져있었다.
지겨워서 못하겠다는 말만은 번복할 생각이 없어뵌다. 하여 나도 진지하게 고민한 뒤, 진심을 실어 대답했다.
“보안이요.”
“이 씹ㅅ… 이 자식은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말을 끝까지 들어보십쇼. 보안쪽 일만 평생 하라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걸 하더라도 돈이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손님 돈 많아요? 인맥이나?”
모든 스타트업 회사가 필연적으로 지니는 공통점이 있다. 창업하는 그 순간부터 풍전등화의 운명을 맞는다는 것. 시행착오 한 번으로 간판 떨어지는 회사가 적게는 수 천, 많게는 수 만 건은 될 거다.
그 꼴이 안 나려면 기반이 있어야 한다. 끌어모을 수 있는 것들 죄다 끌어모아서 여윳돈부터 쌓고, 한 번 말아먹어도 복구가 가능한 시점부터 업종을 서서히 바꾸든 하는 게 맞지 않아?
그리고 내가 봤을 때, 당장 기반 삼을만한 게 보안쪽 일밖에 없다. 이 양반이 자기 분야에서만큼은 능력이 뛰어난 양반이고, 외주를 줬던 곳들에서도 이름을 어느 정도는 기억을 할 테니….
“그래버리면 회사 때려치운 의미가 없잖―”
“하고 싶은 일 하는 것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지, 자칫하면 손님도 그 비글 놈이랑 똑같은 사람 된다니까요? 꿈만 쫓다간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못 주게 될 텐데.”
여전히 탐탁치 않아하는 눈치라, 아예 제일 싫어하는 양반까지 언급하며 설득해봤다. 내 말에 얼굴을 있는힘껏 찌푸리고는, 앞발로 스프링노트 페이지를 톡톡 건드리기 시작하는 찰리.
한참을 그러다, 펜을 잡아 노트에 두 글자를 적어넣었다. ‘보안.’ 다시 펜을 툭 놓고는, 몸을 돌려 날 바라보며 말해온다.
“보안부터 시작한다 치고, 다음엔 뭐 어쩌라고?”
“할 수 있는 거 해야죠. 옛날에 일 맡으셨던 곳들 한 군데도 빠짐없이 연락 돌리고, 일감 한 건이라도 더 따내야지. 그 중 한 건만 잘 돼도 회사 구실은 할 수 있을 거고요.”
“그 놈들은 9시 이전엔 엄마 전화도 안 받을 놈들인데.”
“출근 전에 영업전화 걸려오면 저라도 안 받을 걸요. 지금이 8시 40분이니까….”
잠깐 딴 얘기 하다, 연락처에 전화하는 거나 옆에서 구경하면 될 것 같다. 회사 사업 방향에 대해선 얼추 정해졌으니, 이젠 구성요소를 하나하나 채워나갈 차례다.
가령, 직원 채용. 이건 아까 못다 한 복지 이야기를 마저 하면 된다. 채용 공고 올릴 때 ‘우리 회사는 이런 복지를 해드려요―’ 적어놓으면 되니까. 펜을 놓은 뒤, 하나에게 물었다.
“오래 기다렸다, 하나야. 이제 네가 활약할 때야.”
“화략?”
“아니, 이 새끼는 설마했더니 진짜로 꼬맹이한테 그런 걸 묻는다고?”
“아 글쎄, 기다려 보시라니까요. 하나야, 혹시 엄마 따라서 회사 가본 적 있어?”
“에… 내! 유치원 쉴때, 매일!”
“가보면 느낌이 어때? 엄마가 직원분들 대하시는 거라던가, 직원분들 인상이라던가.”
나도 많은 건 안 바란다. 회사 인테리어 중 인상깊었던 거나 엄마가 했던 말들만 해줘도 충분하다. 내 물음에 골똘히 고민하는 듯 하다, 자신없다는 듯 입을 여는 하나.
“혹시여. 이런 것두 댈까여?”
“어떤 거?”
“엄마야여. 저어랑 회사에 딱 들어가면여, 다들 ‘안녕히 주무셧씁니까, 미리네 님!’ 하시면서 인사를 어―엄청 크게 하새여. 삼각자처럼.”
“흠….”
“엄마야랑 그분들 사이를 지나가다가, 돌아 밨거든여. 그런대, 인사하신 분들 중 한 분이 허리를 툭툭 두드리셔가지구….”
그 직원 분이 많이 힘들어 보이고, 또 안쓰럽게도 보였다고 한다. 들은 뒤엔 잠시 생각하다, 펜을 집어 노트의 중간 부분에 한 줄 적어넣었다. ‘수직적 조직 문화의 완화’
“이거 봐요. 도움 되잖아요.”
적은 걸 찰리에게 보이자, 찰리가 조언에 감탄했는지 무척 격한 반응을 보여왔다.
“이 새끼는 무슨, 또라이 새끼인가?”
“똘아이?”
“발상의 전환이 참신하다는 뜻이야, 하나야.”
“에… 그러니깐….”
“발상이 무슨 뜻인지도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다른 것도 얘기해주라. 혹시 직원분들이랑도 얘기 나눠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