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331)
이세계 편돌이-330화(331/331)
330화.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 전설 (5)
어르신께선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항상 옷매무새를 말끔하게 하고 다니시는 분이셨다. 골렘을 맨손으로 후려 팰 때마저도 와이셔츠 깃을 살려놓으셨을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런 분이 지금은 수염이며 머리카락이며 죄다 엉망이고, 심지어 넥타이마저 반쯤 돌아가 어깨에 얹어져 있다. 그 상태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오셔서는 나와 반려 분을 번갈아 보시는 어르신.
그러다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셨다. 반려 분께서 아무 탈 없이 잘 계셨단 걸 확인해서일 터다. 비록 탈만 없었을 뿐이지, 쭈그린 채로 어르신 눈치를 엄청 보고 계시긴 하지만….
“…요새는 잘 지내셨는지요, 이찬 청년.”
“저는 늘 똑같죠. 지금 어르신께선 아니신 것 같지만요.”
“저도 잘 지냈습니다. 옷차림이 이런 건… 약간 서둘러 달려온 참인지라.”
약간 서두른 수준이 아니란 게 빤히 보인다. 들고 들어오신 가죽구두 밑창이 닳다 못해 아예 소멸된 채였기 때문이다. 구두가 이 지경이 됐는데 양말이 버텨준다고?
이 생각에 마저 확인해봤는데, 양말도 다 찢어지고 발목 부분만 남아있더라. 고개 떨궈 바라보고 있던 중, 어르신께서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이렇게 소개드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제 반려 되는 사람입니다.”
“예….”
“릴리, 라고 하고요. 그리고 실례지만, 이 자리에서 반려와 잠깐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어우, 되고 말고요. 편히 대화 나누셔요. 편히.”
매장 내 부부싸움도 영업방해에 해당되긴 하지만, 두 분 대화하는 게 그 수준까지 가진 않겠지. 내가 대답하자마자 몸을 반려 분 쪽으로 홱 돌린 뒤, 한쪽 무릎을 꿇으셨다.
이제야 서로 눈높이가 맞는다. 눈치를 보던 반려 분이 눈을 질끈 감음과 동시에, 목청을 높이는 어르신.
“반려! 이 늦은 시간에 어째서 자택에 있지 않고 밖으로 나온 겁니까!!”
“흐에엑!”
“집안에 잘 있던 반려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려와본 건데…!”
몇 안 되는 행인들이 전부 걸음을 멈출 정도의 데시벨이었다. 귀청 터질 것 같다.
반면 이전에도 몇 번 있었던 상황인지, 반려 분께서 그새 귀를 틀어막고는 최선을 다해 웅얼대셨다.
“여, 여보! 그치만요! 저도―”
“오후 6시 이후로는 밖에 질 나쁜 젊은이들이 있을 수 있고, 어두워서 길을 잃기 쉽고! 호루라기를 불더라도 경찰이 늦게 올 수 있어 위험하다, 분명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집에서 제일 큰 호루라기를 챙겨왔다고요, 여보. 봐요, 여기!”
“그게 문제가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반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단 말입니다!!”
팔순 넘은 분들 말다툼에서 호루라기는 왜 튀어나오나 모르겠다. 사실 말이 말다툼이지, 겉으로만 보면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잔소리 내뱉는 것밖에 못 됐다.
“기르고픈 꽃이 있다면 꽃밭을 다 헤집어서라도 가지고 오겠다, 원한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주겠다, 분명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런데 왜!”
잔소리 한 번 로맨틱하게 하시는구만. 허나 이전부터 쌓인 게 많았는지, 감았던 눈을 뜨고는 눈물마저 글썽이며 말대꾸를 하는 반려 분.
“그치만! 무력하잖아요!”
“그건…!”
“지루하고, 답답하고, 심심하고! 여보도 사시사철 집 안에만 있어봐요. 나도 다리 있는데! 나도 원하는 꽃 있으면 직접 가서 따올 수 있는데!”
아까 감시를 받고 계신다, 화단에 물을 줄 때마저도 한가한 사람들 눈치를 봐야한다는 얘길 하셨던 게 기억난다.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어르신께서 입을 다물어버리셨다.
“집 앞에 마당을 쓸려고 해도, 이불 밖은 위험해요 시어머님― 이러면서 며느리가 냉큼 끌고 들어가지! 여보 생일날 깜짝 선물을 해주고 싶어도 나는 그러지도 못하잖아요. 그 깜짝 선물 사러 나가려면 여보랑 같이 나가야 되고!”
“…반려.”
“여보는 밖에서 엄청 고생하잖아요. 새벽까지 운전해놓고, 들어와서는 안 졸린 척 하면서 집안일 다 도와주고. 고생했으니까 쉬어라, 나 혼자서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또, 아까는 자신이 멸종 위기종이라 감시를 받는다 하셨지만, 사정을 알게 된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꿈을 현실에 재현하는 마법사를 마법청 같은 곳에서 가만 내버려 둘까?
나라면 못 그런다. 오히려 침실까지 쫓아들어가 감시를 했으면 했지. 반려 분에 대한 감시가 엄중한 것도, 어르신의 과보호도 분명 이 이유에서일 터다.
혹시라도 악몽 꿀만한 경험을 해버리면 큰일나잖아.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내가 그 과보호를 받는 당사자가 된다면… 글쎄….
“도와주고 싶었어요, 여보. 여보가 정말 오랜만에 즐거워하니까. 그리고, 이 청년분께 도움이 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 같으니까.”
답답해서라도 오늘같은 돌발행동을 두 자릿수 단위로 저질렀겠지. 나도 이불에서 뒹구는 거 좋아하지만, 이불 말고 뒹굴 곳이 없을 때에도 그걸 똑같이 좋아하진 못할 것 같다.
“그래서 큰 마음 먹고 마법도 썼어요. 손녀 애가 보는 만화영화에 악당이 나왔는데, 자기 몸을 여러 개로 만드는 게 인상깊었거든요. 그걸 꿈으로 꿔서 집을 지키게 하고….”
“…….”
“그렇게… 나온 거랍니다. 마음대로 굴어서 미안해요, 여보.”
글썽이던 눈물을 닦은 뒤, 고개를 떨구며 말을 맺는 반려 분. 괜히 내가 잘못한 기분이 들 정도로 애석한 광경이었다.
잠시 후, 어르신께서 입을 여셨다.
“반려는 제게 있어 축복이고, 불꽃입니다. 제가 아직 타오를 수 있는 것도 반려가 제 곁에 있기 때문이다, 전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보….”
“때문에 반려를 소중히 하고, 꺼지지 않도록 보살피겠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헌데, 그 마음이… 오늘은 많이 과했었나 봅니다.”
말하며 반려 분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떼어 양손을 마주잡으셨다. 걱정으로 겹겹이 쌓여있던 얼굴의 주름이 풀려 평소의 어르신다워지셨다.
“만일 오늘처럼 산책을 하고픈 마음이 든다면, 평소처럼 참지 말고 말해주십시오.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정말인가요, 여보?!”
“맹세했었잖습니까. 남자로 태어난 이상, 꺼낸 말엔 반드시 책임을 지겠다고 말이지요.”
이 말에 반려 분께서 까치발을 들어 어르신 품에 쏙 안겼고, 부부싸움 답지않은 부부싸움도 끝이 났다.
곁에서 지켜본 소감은, 이거 설마 계산하고 이러신 건가?
품에 안긴 반려 분이 날 힐끗 보고는 씨익 웃어보이셨기 때문이다. 반려 분께는 죄송하지만, 이건 나중에 둘만 있을 때 어르신께 말씀을 드리던지 해야겠다.
“…헌데 말입니다, 반려.”
“네! 여보.”
“방금까지 이찬 청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듯 한데, 어떤 대화를 나눈 겁니까?”
“방금은요! 청년이 나를 믿지 못하는 눈치라, 계산대에서 잠깐 자겠다고 했었답니다! 눈앞에서 마법을 쓰면 내가 마녀였다는 것도… 앗.”
“세상에, 그 부분까지 말을 한 겁니까?”
아차 하는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무는 반려 분. 어르신께서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시길래, 우선 고개부터 끄덕여드렸다.
다음엔 어디까지 들었는지를 마저 설명드렸고, 말미에는 생필품 코너 쪽을 가리켰다. 설명드리는 것보다 이걸 먼저 해야 했다.
“저희 매장에 양말 있거든요, 어르신. 구두는 따로 없고, 삼선 슬리퍼라도 괜찮으시면….”
“오오, 혹시 290짜리도 있는지요?”
“있죠. 그 사이즈가 딱 최대 사이즈에요.”
내 발보다 딱 한 사이즈가 최대인 게 억울해서 기억해 뒀다. 이후엔 몸을 일으킨 어르신께서 양말과 슬리퍼를 가져오신 걸 계산해 드렸고, 일회용 봉투도 하나 챙겨드렸다.
“저희 매장이 구두는 분리수거가 안 돼서요. 여기에 구두랑 양말 담아가시고, 오른쪽으로 20m쯤 걷다 보면 의류 수거함 있어요. 그리고, 그….”
“감사합, 아. 반려 이야기를 들은 게 신경 쓰이는 거라면, 전 괜찮습니다.”
“…옙.”
“이찬 청년이 믿음직하다는 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요. 또… 반려도 그렇게 여겼을 테고. 그렇지요?”
“물론이죠, 여보. 아니었으면 말도 안 꺼냈을걸요?”
대리기사가 호위 부대 출신이고 그 아내는 옛날에 마녀였다. 행여라도 이딴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거든 두 분이 지금처럼 오손도손 지내시진 못할 것이다.
그걸 빤히 알고도 떠벌일 만큼 내가 눈치 없는 놈은 아니다. 설령 떠벌린다 해도 아무도 안 믿겠지만 말야. 당장 다 들은 나도 반신반의한데 딴 사람들은 오죽하겠어?
그래도 필요 이상으로 이야길 들은 것 같아 내심 착잡했는데,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인다. 인자하게 대답하시고는 잠시 후, 어르신 얼굴이 다소 진지해졌다.
“그나저나, 이찬 청년. 반려에게 대체 어떤 것을 물었길래 이런 이야기까지….”
“역사에 대한 거였습니다. 용사와 마녀랑 마녀요. 점장님과 그걸로 좀, 문제가 있었어서.”
“…그 점장 분과 말씀이신지요.”
“예.”
딱 그 역사에 대한 부분에서만큼은 점장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왜 달랐는가, 대체 마녀란 게 뭐길래 그랬는지가 궁금해서 여쭤봤는데, 반려 분께서도 마녀이실 줄은 몰랐다―
까지를 횡설수설하던 중, 어르신께서 입을 여셨다.
“듣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반려.”
“어떤 옛날 생각 말인가요? 여보.”
“제가 세 번째로 반려를 수행했을 당시입니다. 혹시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지요?”
“여보가 수행해 준 건 서른다섯 번째까지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어디 보자. 세 번째라면… 쥘 협곡 얘긴가요?”
“맞습니다. 유독 햇볕이 따가웠고, 제가 양산을 챙겨왔던 그 협곡.”
내게 해주는 말이라기보다는, 두 분의 추억을 곁들인 잡담에 가까웠다.
반려 분께서는 양산 감촉마저 기억난다며 손뼉을 치시고, 어르신께서는 정작 순식간에 먹구름이 져버려 쓸모없어졌다며 웃으시고….
말 그대로 잡담이었던지라, 왜 느닷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셨는지 전혀 짐작을 못하고 있었다. 의도를 파악한 건 대화가 막바지에 접어든 직후였다.
“그때, 처음 듣는 명칭의 부대 소속의 한 마법사가 지령을 전달하러 왔었죠. 반려와 제 작전이 다른 작전으로 대체되었으니 부대로 복귀하라.”
“기억나요. 가면 때문에 얼굴이 안 보이긴 했지만, 키가 꽤 작았던 것 같은…?”
“예. 우울했고, 냉정했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지닌 여자였습니다. 또―”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르신조차도 ‘이 여자는 위험하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전신이 마력으로 가득했던 마법사였다. 말하신 뒤, 마지막으로 두 마디를 더 보태셨다.
들은 뒤엔 나도 우울해졌다.
“머리색이 연갈색이었죠.”
“…….”
“대장에게 작전이 변경된 사유와 그 마법사에 대해 물었을 때는 이런 대답이 돌아왔었습니다, 반려. 용사님이 하시는 일을 일개 병사인 네가 알 필요가 있느냐….”
“감사합니다.”
억지로 말을 끊었다. 이 정도 들었으면 충분하다.
어르신께서도 알아들으셨는지 말없이 바닥에 놓았던 봉투를 집어드셨다. 반면, 반려 분께서는 어리둥절하다는 듯 나와 어르신을 번갈아볼 뿐이다.
이해는 한다. 우리 둘은 아는 걸 이분은 모르고 계시니까. 반려 분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쓴웃음을 지으시고는, 벽걸이 시계 쪽을 바라보시는 어르신. 오후 10시 반이었다.
“이젠 밤이 차가워서라도 들어가야겠군요, 반려. 그리고, 이찬 청년.”
“예.”
“나중에 언제든 연락주시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겠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반려 분을 반쯤 떠밀다시피 하며 밖으로 나가셨고, 문밖에서 나지막하게 두 분 대화가 들려왔다.
“설마, 여보. 그 점장님이라는 분이….”
“머리색이 연갈색입니다.”
“…아. 어쩐지….”
오늘따라 귀가 쓸데없이 일을 잘한다. 두 분이 쇼윈도 오른편으로 사라지는 걸 끝까지 확인한 뒤, 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여덟 번 울렸고, 멈췄다.
[ 응, 찬아. ]아까 유리 녀석에게 들은 것과는 다르다. 오늘 점장은 연락을 안 받을 거라, 미래의 점장이 직접 말을 전해왔다고 했었다. 너 때문에 화난 게 아니니 마음쓰지 마라.
이젠 뭐 때문에 그랬는지를 아주 잘 알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제 말실수한 거 죄송합니다. 고의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점장은 늘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잠시 후, 점장이 내겐 단 한 번도 들려준 적 없었던 목소리로 대답해왔다.
[ 지금 그 얘기 할 거면, 얼굴 보고 하자. ]“…언제요.”
[ 20분 뒤. 지금 출발하고 매장 문 닫으면 딱 그 정도 걸리니까. ]우울했고, 냉정했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