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62)
이세계 편돌이-61화(62/331)
61화. 실기 보는 편돌이 (6)
마력이 깃든 물건, 혹은 마법이 걸린 물체를 건드리면 지워진다. 이게 내가 2주간 체감해 온 내 체질의 조건이었고, 여태껏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이 ATM도 이거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마력 찌꺼기가 들러붙은 거라고 했으니, 손으로 만지기만 하면 그 찌꺼기와 함께 마귀도 사라질 줄 알았고. 장비가 정지될 줄 알았단 말야?
헌데….
“이찬, 뭐 하냐니까?”
정지시킬 수가 없어, 안 돼…!
농담이 아니라 진짜 안 된다. 지금 ATM 구석에 시각장애인 전용 점자 키패드에 손을 얹고 있다. 손을 대고 있단 말이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게 없다. 액정화면은 반쯤 까뒤집힌 화면 그대로였으며….
[ 카드를, 화살표 방향으로 투입해. ]이놈은 여전히 반말을 찍찍 해대고 있다. 키패드가 아닌 화면 위에 손을 올려도 마찬가지고, 아예 액정에 손바닥을 벅벅 문질러봐도 마찬가지다.
“누나. 이거 안 되는데…?”
“안 된다고? 왜?”
“나도 몰라. 이게….”
잘 모르겠다. 마귀는 반마법 능력 외에도 다른 게 필요하기라도 한….
아니지. 나 반마법 자격증 실기시험 치르러 여기 온 거잖아. 반마법사가 못 해낼 일이었으면, 실기시험 출제원 놈들이 의뢰를 접수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이런 이유는 아닐 것 같다.
내 수준으로도 불가능한 일인 건가? 이것도 아닐 테고. 대학병원 근무하는 반마법 의사도 못 한다는 짓까지 해낸 체질인데, 이걸로도 안 되면 실기시험 응시자 중 누굴 데려와도 못 한다고 봐야 한다.
달리 생각해 보기로 했다. 만지면 지워진다. 달리 따져보면, 만져도 지워지질 않는다. 혹은….
“…누나. 이 마귀 놈, ATM 안쪽 부품에 숨어있을 수도 있나?”
만지질 못해서, 못 지우고 있다.
엄밀히 말해 내가 손을 대고 있는 건 ATM의 외부 케이스잖은가, 마귀가 아니라.
이놈이 내부의 CPU칩, 혹은 기판에 숨어있어서 내가 마귀를 못 건드리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너 작업하는 데에 그런 조건이 있을 줄은 몰랐네.”
“나도 몰랐어. 이게 추론이긴 하지만….”
말 그대로 추론이라, 결국 확인을 해봐야 알 부분이긴 하다. 근데 이건 이것대로 문제인 게, 어떻게 내부를 확인하냐는 거다.
밖의 고블린에게 열쇠를 빌리든 드라이버 구멍을 찾아서 나사를 풀든 케이스를 까야 할 텐데, 그러는 동안 이 눈 돌아간 ATM이 얌전히 기다려 줘? 마취 없이 개복수술 하는 셈인데?
“이찬 네 말이 어째, 결국 때려 부술 수밖에 없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어.”
내키진 않지만, 반마법(물리) 말고는 답이 없어 보인다.
자기를 끄집어내려는 걸 마귀가 눈치채는 순간, 아까 띄워대던 쓰레기통이나 영수증파쇄기가 우릴 덮칠 게 분명했으니까. 솔직히 내가 마귀여도 백퍼 그렇게 한다.
그러니 후딱 뜯어내고, 후딱 내부에 손 넣어서 마귀를 없애는 수밖에. 결론은 이렇게 나오는데, 이게 어디서 몽키스패너나 빠루 빌려온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고….
“누나. 이거 마법으로 어떻게 안 되나?”
누나가 마법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행동을 했던 게 떠올라서였다. 페가수스에 수 톤짜리 컨테이너 매달아 날아다니거나, 드래곤 비늘 번쩍 들어다 나르거나 했으니까.
회상하며 누나를 바라보았으나,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할 수야 있지. 경찰에 신고만 안 당하면.”
“허어….”
“나 이래 봬도 준공무직이야, 이찬. 아무렇게나 마법 쓰면 가중처벌 받아.”
이건 또 처음 듣는 소리다. 운동선수가 사람 패면 특수폭행 혐의 더 붙는 거랑 비슷한 건가.
그래도 말이다, 마귀 들린 ATM이 집어 던지는 파쇄기에 갈비뼈가 아작날 판인데, 정당방위로 마법 한두 번 정도는 써도 되지 않나?
“그것보단 좀 더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지.”
“확실한 이유는 또 뭐야?”
“굳이 예를 든다면, 정말 네 갈비뼈가 박살 나기 직전까지 간다든가. 그게 CCTV에 찍힌 후면, 그때는 너 보호한다고 마법 쓸 수 있겠지.”
숨이 턱 막히는 이유다. 말을 마친 누나의 얼굴은 웃음기가 싹 걷힌 채다.
“근데, 내가 그 꼴은 죽어도 못 보겠고….”
액정화면을 노려보며, 손에 쥔 법인카드로 카드 투입구를 톡톡 건드려 댄다. 반쯤 넘어간 액정화면에는 카드를 투입하기까지 남은 제한시간만 달랑 떠 있는 상태였다.
10초 남았다.
“야, 이찬. 이 ATM 내부에 마귀 있는 거 확실해?”
“확실함.”
이것만은 자신 있다. 액정화면 윗부분을 뚫어져라 노려보니, ATM의 다른 부분에 비해 일그러짐이 확연히 심한 게 보였기 때문이다. 아예 검지로 짚어줬다.
“여기 안쪽인 것 같은데, 얼마나 깊은 곳에 틀어박혔는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이 안에 있는 건 확실하다, 이거지.”
중얼거리던 누나는 쥐고 있던 법인카드를 카드 투입구에 그대로 집어넣어 버렸다. 원래라면 출입금 불가능한 카드라며 에러 뜨고, 뱉는 게 정상이었겠지만….
[ 입금이 완료되었습니다. ]입금 금액, 계좌, 비밀번호조차 입력하지 않았음에도 제멋대로 입금을 완료해버렸다. 더욱 가관인 건, 화면에 떠오른 입금 금액이었다.
[ 입금 금액 : 11,460,000원 ] [ 계좌 잔액 : 0원 ]“어…….”
이… 이 미친놈이 법인카드에서 돈을 어떻게 뺐대?
단순히 빼기만 한 것도 아냐. 카드 바닥까지 싹싹 긁어 동전 한 푼 안 남기고 죄다 빼냈다. 나라면 바로 액정화면에 샷건 쳤을 상황이었다.
반면 액정화면을 바라보는 누나는 심드렁한 표정이었고, ATM은 역으로 잔뜩 신이 난 목소리다.
[ 더 놓고 가실 물건은 없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 [ 이용당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볼 장 다 봤다는 건지, 기묘한 음성녹음과 함께 ‘퉤’ 소리를 내며 법인카드가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누나가 떨어진 카드를 슬쩍 흘겨보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찬. 저 카드 안에, 우리 길드서 공유하는 활동자금이 전부 들어 있었는데 말야.”
“어… 그런데…?”
“그 활동자금을 이놈이 죄다 털어버렸으니, 이 정도면 정당방위 맞지 않냐?”
아닐 것 같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누나가 눈웃음을 짓고는 있는데, 눈 동공이 살짝 열린 채였기 때문이다. ATM이 읊조린 말에 화가 난 듯했다.
“누가 봐도 정당방위지. 어쩔 수 없다, 이건.”
“내가 지금 이용을 당했고, 범인은 이 ATM, 증인은 이찬, 너.”
“원하면 증인선서도 해줄까?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어.”
“됐고, 좀 물러서 있어 봐.”
좀 많이 물러났다. 누나는 거래하던 작업장이 자신을 열 받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작업 공장을 반쯤 박살 낸 여장부였다. 그 과정을 내가 코앞에서 직접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처음에는 심플했다. 일체의 준비동작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ATM 끄트머리를 한 손으로 잡은 후.
“읏차.”
뽑아버렸다.
ATM이 통째로 뽑혀 나왔단 말이다. 바닥에 몸체를 고정하던 고정쇠가 박살 나고, 꽂혀있던 콘센트, 기타 전깃줄들까지 통째로 죄다 질질 끌려 나와 바닥에 널브러진다.
팽팽하던 전깃줄 수 가닥이 투두둑 끊어지고, 모서리에 박혀있던 고정쇠는 나사 하나만 박힌 채로 애처롭게 덜렁거린다. 허나, 누나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아랑곳 앉고 한 손에 든 ATM을 머리 높이 들어 올려, 바닥에 힘껏 패대기쳤다.
전기가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ATM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보이스피싱 범죄 경고음을 뚝뚝 끊어대며, 쓰레기통과 파쇄기를 되는대로 처박아댄다. 유리창, 바닥, 누나 몸통, 등등….
온갖 기계에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누나는 미동조차 하질 않았다.
안색도 전혀 바뀌는 게 없다. 튕겨 나온 파쇄기가 바닥에 처박혔음에도 바닥 대리석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고, 쓰레기통에 직격당한 유리창은 잔기스조차 나지 않았다.
내동댕이쳐둔 ATM에 한 발을 올려 디딘 누나는, 막 뭔가를 떠올렸다는 얼굴로 날 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떤 마법 쓰는지 너한테 얘기해준 적이 있었나?”
“안 했을걸?”
난 누나가 단순히 힘이 세서 화물 나를 수 있는 건 줄 알았다. 근데, 힘이 단순히 세다는 것만으로는 이 현상이 전혀 설명이 안 된다.
“그럼 이참에 말하지, 뭐. 보면 바로 알겠지만….”
위에 걸친 재킷 안쪽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손잡이를 바닥으로 향하게 하며 손을 놔버렸다. 떨어지던 단검 손잡이가 ATM에 닿고는, 종잇장마냥 ATM을 구겨대며 바닥까지 파고들어 지축을 울렸다.
[ 범죄. 범죄. ]“무게 조절하는 마법이야. 이 단검은 지금 1톤 정도로 해놨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쓰레기통을 한 손으로 붙잡아 내던지고는, 태연하게 말을 잇는다.
“이건 100그램 정도? 각잡고 쓴 게 아니라 잘은 모르겠다.”
소프트볼 무게가 120g쯤 되는 걸로 알고 있다.
누나가 저것들에 두들겨 맞고도 태연한 이유가 바로 이해가 됐다. 저것들 날아다니는 게 요란하긴 해도 속도는 어림잡아 60km/h가 채 안 됐으니까. 그게 소프트볼보다 가벼워졌으니, 어디 박아봐야 딱콩 수준밖에 더 되겠어….
여태껏 날랐던 화물들도 가볍게 만들어서 운반했던 거고. 이어서 날아오던 파쇄기마저 주먹으로 후려쳐 날려버린 누나는, 발을 올린 ATM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뭐 해줄까. 더 부숴줘?”
“그… 아니, 확인 좀 해보고.”
붕 뜨려던 마음을 다잡았다. 나 여기 일하러 온 거다.
ATM 앞으로 다가가 내부를 살피니, 구겨진 ATM 안쪽 깊숙이 단검 손잡이가 처박혀있는 게 보였다. 그 바로 옆에, 웬 보라색 안개 같은 게 넘실거리고 있다.
[ 범죄. 경찰. 신고. ]얼른 손을 집어넣었다. 안개 끄트머리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풍선 터지듯 소리와 함께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동시에 둥둥 떠다니던 파쇄기와 쓰레기통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정적이 시작됐고, 누나가 발을 떼며 물었다.
“잘됐냐?”
“잠깐만.”
단검을 빼내 누나에게 건넨 뒤, 한 20초 정도 ATM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액정화면은 암전된 채고, 더 이상 음성녹음을 내뱉어대지도 않았다.
“…끝난 듯?”
“그래도 잘 풀려서 다행이네.”
이걸 잘 풀렸다고 보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ATM은 개복수술을 하다 만 꼬락서니가 됐고, 사방에 박아대던 쓰레기통과 파쇄기는 구석구석이 찌그러진 채였으니까.
다른 것보다도, 누나 법인카드 잔고가 바닥나버렸다. 나 돕겠다고 말이다. 자연스레 누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누나. 이거 길드에서 한 소리 듣는 거 아냐?”
“한 소리 듣기만 하면 다행이지. 전에도 시말서 깜지 썼는데, 내일 아침에 또 쓰게 생겼다.”
“미안, 누나. 진짜로.”
“미안하단 말 말고, 고맙다는 말 듣고 싶어서 한 건데 말야.”
“고맙고. 이것도 진짜임.”
“고마우면, 음….”
머리를 긁적대던 누나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는 말을 맺었다.
“나중에 나 밥 살 때, 술값은 니가 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