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63)
이세계 편돌이-62화(63/331)
62화. 실기 보는 편돌이 (7)
밖으로 나오니, 고블린이 도로 건너편 골목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다 우리와 눈을 마주치고는, 피우던 담배를 집어 던지고 뚜벅뚜벅 도로를 건너 다가와 물었다.
“다 봤어?”
“예?”
“다 봤냐고. 견적은? 시간은 얼마나 걸려?”
“그… 막 마치고 나온 참입니다.”
“벌써 다 끝냈다고?”
못 미더워하는 눈치라, 은행 안으로 들어가서 안쪽을 보여줬다. 은행 내부를 슥 둘러보던 고블린의 시선이 배가 뻥 뚫린 ATM에 고정되었다.
“저거 굳이 저렇게 박살 낼 필요가 있었어?”
그럴 필요가 있었다는 걸 최대한 과장해서 설명해 줬다. 상해를 입기 직전의 긴급상황이었고, 마귀가 내부 부품에 숨어있어서 부득이하게 부술 수밖에 없었다고,
허나 다 듣고 난 후에도 고블린은 여전히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채였다.
“혹시 내가 더 알아야 될 거 있냐?”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저 ATM이 나중에 또 일어나서 깽판 칠 수도 있는 거잖아.”
A/S 관련 문의라면, 나 말고 시험 낸 놈들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
떠오르긴 하는데, 이걸 곧이곧대로 말하기보다는 그럴싸한 대답이라도 해줘야 이놈이 사인해 줄 것 같았다. 저 ATM이 마귀가 들려서 저랬던 거고, 마귀가 들리는 이유는 여러 이종족들의 사념이 쌓여서 생긴 거라고 했으니까….
“저 ATM에 혹시 기능결함 같은 게 있었습니까? 카드 걸림 현상이라든가, 렉이라든가.”
ATM에 사념이 쌓인다면 이런 이유밖에 없을 것 같다. 카드가 안 꽂혀서 액정을 두들겼다든가, 화면이 렉 걸려서 넘어가질 않아서 액정을 두들겼다든가.
말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런 이유로 두들겨 맞고 산다면 내가 ATM이었어도 주화입마에 걸릴 것 같긴 하다. 고블린이 곧바로 대답했다.
“있었지. 지금은 늬들이 때려 부숴서 없어졌지만.”
“언제부터 기능결함이 있었습니까?”
“수개월 됐을걸. 근데, 그 기능결함 때문에 저 ATM이 저 꼴이 났다는 얘기야?”
“그렇습니다.”
“젠장,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지점장한테 서류라도 집어 던질 걸 그랬네.”
말하고는 중얼대는 내용이 ‘난 분명 안건으로 올렸다’ 혹은 ‘지점장 자식이 일을 더럽게 대충 한다’라는 푸념이었는데, 정리해 보면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을 느꼈지. 하지만 지점장이 내 말이 듣지 않았어.’라는 소리 같았다.
근데, 이걸 굳이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말을 끊으려다, 그랬다간 사인 안 해줄 것 같아서 잠자코 있어 줬다. 3분가량 하소연을 늘어놓던 고블린이 날 바라보고는 슬쩍 손을 내밀었다.
“줘 봐.”
태블릿 PC를 건네주자, 휘갈기듯 사인을 해서 내게 내밀고는 자기 주머니를 뒤적거려 댔다. 잠시 후 열쇠를 꺼내고는 내게 물었다.
“어쨌든 기능결함 없이 관리만 잘해주면 안 생긴다, 이 소리지.”
“예.”
“좋아. 이제야 퇴근할 수 있겠구만. 난 간다. 수고해라.”
은행 불 끄고 문 걸어 잠근 뒤 멀리 가버렸다. 저놈과 대화하면서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레이시즘이 고개를 내밀 뻔하긴 했지만….
앞으로 볼 일 없을 테니 참는다. 지금 시각이 딱 8시 20분인데, 흐름을 보니 각이 슬슬 보이는데 말야.
“누나. 실기 9시쯤 끝내고 바로 지하철 타면 아슬아슬하게 야간 뛰러 갈 수 있는 거 아닌가?”
“뭐야, 너 오늘 휴가 쓴 거 아니었어?”
“휴가 쓴 건 아닌데, 예정도 없긴 해.”
시험 치를 것만 생각했지, 이후에 뭐 할지는 아직 생각해둔 게 없다. 오늘 피곤한데 좀 쉬어도 되겠냐― 하면 점장이 들어줄 것 같긴 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근데 내가 그러기가 싫다.
“오늘도 휴가 쓰면 이번 주에만 이틀 휴가 쓰는 건데, 그럼 점장님한테 미안하잖어.”
아까 6시에도 손님 몰리던 게 확연했는데, 그걸 겪고 내일 이 시간까지도 근무해야 할 점장 생각하면 내 억장이 못 버텨요. 점장이야 ‘나는 매지컬 파워로 버틸 수 있으니 걱정 말고 편히 놀다 와라’ 이러고 말겠지만….
“놀아봐야 할 것도 없고.”
“…에이, 겨우 너랑 밥 한 끼 같이 먹나 했는데.”
“나중에 먹자고, 나중에.”
“니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아무튼, 의뢰 남은 건 뭐 할 거야?”
“음….”
글쎄다. 마지막 하나를 뭘 해야 하냐.
화면의 의뢰 대부분이 연회색 글씨로 바뀐 지 오래고, 남은 건 10개도 채 되지 않는다. 아까는 납골당 관장에게 물어봤었지만, 여기 의뢰자인 고블린은 벌써 퇴근해 버렸고….
“…이왕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점장님 아직도 바쁘신가?”
“왜, 언니한테 물어보려고?”
“어.”
한창 일하고 있을 점장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잠깐 전화 통화 하는 정도면 상관없잖아. 더해서 칼출근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명하면 점장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
“바쁘진 않을걸? 언니 이맘때 즈음이면 한가하던데.”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누나 스마트폰 받아 들어 바로 전화했다. 통화음이 세 번 울리고 나서 점장이 전화를 받았다.
“어, 윤하야. 찬이 시험장 잘 들여보냈어? 안 그래도 걱정돼서 전화하려고 했―”
“저예요, 점장님.”
“엥?”
바로 설명했다. 탈주한 거 아니고 제대로 시험 치르고 있고, 학원 외부에서 시험 치르는 중이라 밖에서 누나랑 잠깐 만났다. 이거 말고도 할 말이 좀 더 있긴 한데, 시험 시간이 애매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진 못하겠다.
“시험 시간이 언제까지길래?”
“오후 10시까지긴 한데, 일찍 끝내고 점장님이랑 근무교대하면 좋겠다― 싶어서요.”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찬이가 무리 안 하고 시험 잘 봤으면 좋겠는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드린 거긴 합니다, 점장님.”
영상통화로 전환한 후, 태블릿 PC 화면을 카메라로 겨누며 보충설명했다. 이게 의뢰 목록인데, 제목이 누나나 나나 못 알아처먹을 언어로 되어있어서 구분이 안 된다. 혹시 읽으실 수 있냐.
“고대 언어네. 장소만 적혀있구.”
“알아보시겠어요?”
“응. 이것들 훑어보고 괜찮아 보이는 거 말해주면 돼?”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긴 한데, 지금 바쁘시진 않나….”
“한가하니까 걱정 마, 찬아. 저기, 화면 스크롤 좀 내려줄래?”
점장 말에 따라 한 페이지씩 스크롤을 넘겼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점장은, 스크롤을 끝까지 내리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
“찬아. 몸이 편한 게 좋아, 마음이 편한 게 좋아?”
“둘 다 편한 건 없을까요?”
“그건… 음, 내가 봤을 땐 하나밖에 없는데.”
“말씀해 주시면 그거 고를게요.”
“44번.”
어째 번호가 좀 불길하다? 다른 응시자들도 똑같은 생각이라 안 고른 건지, 뭔지.
그래도 외지인인 나보다는 마법사인 점장 눈이 훨씬 정확하겠다 싶어 골랐는데, 화면에 떠오른 의뢰 내용이 딱 다섯 글자 적혀있었다. ‘상의 후 결정.’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바라보던 누나가 중얼거렸다.
“언니. 여기 적힌 주소지면 학원지구 안쪽인 것 같은데.”
“정확히는, 시험장일 거야.”
“시험장?”
“제목 해석하면 이런 내용이었거든. ‘시작지점’이라고.”
시작지점이면 내 생각에도 시험장이 맞는 것 같다. 거기서 출발했으니까.
지금까지의 패턴으로는 의뢰 장소에 가면 의뢰자를 만날 수 있었다. 시험장에 돌아가면 이 의뢰를 낸 이종족이 기다리고 있을 거고.
근데, 시험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종족이라면 하나밖에 안 떠오르는데 말이다.
“점장님, 이거 의뢰자가 감독관인 거 아닙니까?”
“아마도?”
감독관이 국가시험 갖고 이렇게까지 장난쳐도 되냐, 이딴 건 더 안 궁금해하련다. 장난쳐도 되니까 장난치는 거겠지, 시발.
걱정되는 건 전혀 다른 부분이다. 그 감독관이 말했던 것이나 지금 하는 짓으로 보나, 상의 후 결정될 의뢰 내용이 멀쩡할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다. 점장 반응을 보면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고른 것 같으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점장님은 이거 하면서 몸도 마음도 편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최소한 몸은 편할 거야. 왜냐면, 그 감독관도 마법사일 거 아냐?”
“네.”
“그럼 몸 쓰는 일 못 시키지. 시켜봐야 지도 모를 텐데.”
마법사가 몸 쓰는 일 못 한다는 건 내 머릿속 이미지랑 똑같다.
“그리고 마음 편한 건, 음… 뭘 시킬지는 모르겠지만, 합격은 시켜줄 거야. 무조건.”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씀이신가?”
“그게, 마법사들이 찬이 체질을 직접 보고 나면 ‘저게 대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건가―’ 이러면서 엄청 궁금해할 것 같거든?”
“어… 그런다 치고, 다음에는요?”
“불합격시키면, 찬이가 그러는 거 앞으로도 못 보게 되는 거잖아.”
이후,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맺었다.
“마법사란 건 말야, 호기심을 불치병으로 앓고 사는 직종이라구.”
“허어….”
“내가 그 감독관이면 앞으로 찬이 하는 거 보고 싶어서라도 합격시킬 거야. 정말이야. 나 믿어도 돼.”
* * *
나도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거 좋아한다. 근거 있는 낙관이면 더 좋고.
점장이 근거 없이 이렇게 말한 건 아니겠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낙관적일 근거가 필요했다. 하여 학원으로 돌아가는 동안 한 가지만 생각했다. 이게 마지막이고, 끝내고 나면 더 스트레스받을 일은 없다.
학원 출입구가 보일 즈음, 자기 스마트폰을 바라보던 누나가 불쑥 물었다.
“이찬. 중간에 미안한데, 나 가봐도 되냐?”
“내가 도와달라 한 건데 미안할 게 뭐 있어. 근데 뭐 때문에?”
“길드장한테 톡 와서. 이거 법인카드 앵꼬난 거 때문에 연락한 것 같은데….”
나 도와주다 주말 저녁에 직장 상사를 만나러 가게 됐단다. 착잡함에 누나를 바라보니,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왜. 아직도 미안하냐?”
“안 미안하면 그게 쌍놈이지, 사람인가….”
“미안하면 그만큼 보람이나 느끼게 해줘. 시험 잘 치르라고.”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집어넣고는, 한마디를 더 덧붙여왔다.
“오늘 재밌었다. 나중에 또 보자.”
재미있었던 일이 있긴 했나 싶긴 하지만…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지.
누나가 상가 쪽 거리로 멀어지는 걸 바라보다, 나도 내 갈 길을 갔다. 학원 안쪽 건물 대부분은 이미 불이 다 꺼진 지 오래고, 저 멀리 시험장 건물 한 채만 불이 켜져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 시험장 앞에 도착하니, 안쪽에 뱀파이어 감독관이 다리를 꼰 채로 책을 읽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힐끔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고는 눈썹을 치켜든다.
“44번?”
“네.”
“이 앞에 앉으십시오.”
앉으래서 앉았다. 아까 본 의뢰 내용이 ‘상의 후 결정’이었으니 뭐라도 상의를 하려나 보다 싶었는데, 감독관은 거의 수십 초가량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그저 세로로 찢어진 붉은 동공으로 날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거북함에 뭐라도 말을 꺼내려던 찰나, 감독관이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는 손가락을 한 번 딱 튕겼다. 그러자 단상에 나타난 게, 3칸짜리 루빅큐브였다.
“학부 실습용 교보재입니다.”
큐브를 한 손으로 집어 내게 건네온다. 뭐, 맞추라고?
“큐브 조각 총 26개에 각각 마법이 걸려있습니다. 마법의 종류는 정지, 역회전, 시선이 닿지 않을 시 스스로 자신의 색을 변환하는 마법, 외의 10종입니다.”
맞추라는 거 맞는 것 같다. 이리저리 면면을 살펴보니, 이미 한 면이 십자 모양으로 맞춰져 있는 상태였다. 중학교 다닐 때 친구 놈이 갖고 놀라고 줬던 기억이 물씬 난다.
떠오르는 대로 돌려봤더니, 어설프게나마 한 면을 맞출 수 있었다. 오랜만에 하니까 기분이 색다르다.
“말씀드린 마법들 외의 10종이 어떤 마법인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시험의 일환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등 교육과정을 거치신 정도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감독관이 손가락을 다시 한번 튕기자, 교탁에 1L 페트병만 한 크기의 모래시계 하나가 나타났다. 가운데 부분을 잡고는 들어 올리며 마저 말해왔다.
“모래시계를 뒤집겠습니다. 제한 시간은 40분, 이 모래시계가 한 번 더 뒤집힐 때까지 큐브 6면을 완성하면 합격입니다. 뒤집기에 앞서, 혹시 질의 사항 있으십니까.”
“그게, 있긴 한데….”
“말씀하시지요.”
말하기에 앞서, 만지작거리던 큐브 면면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여섯 면 다 일치한다. 큐브를 교탁 위에 올려놓은 후 물었다.
“다 맞췄는데요.”
“…….”
“이제 저 집에 가도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