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son Billiette RAW novel - Chapter (89)
메종 빌리에트-89화(89/90)
제89화
경고는 한 번 했고, 말귀를 안 들은 건 블레인이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너는 여전히 감정적이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구나. 변한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라면 하는 수 없지.
논란을 홍보에 써먹을 수밖에.
“대체 언젯적 일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는 거니? 하나도 자라질 않았어.”
내 차가운 말이 이어질 때마다 블레인은 상처가 깊어지는 얼굴로 나를 망연히 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진짜 망연한 게 뭔지 아니까.
헬리오스의 그 표정을 단 한 번이라도 본다면 다 납득할 것이다.
블레인이 보이는 저 정도 감정은 아무것도 아닌 투정으로밖에 안 느껴진다는 것을.
‘블레인 사쉐라고 결코 대놓고 말하지 않으면서 유추할 수 있게끔 해야지.’
그게 더 크게 논란이 될 테니까.
“비, 빌리에트. 너, 변했어.”
“그러니까 추하게 매달리는 전 남자친구 같은 발언, 그만 좀 해. 어릴 때 한집에 산 것뿐인데 왜 이렇게 질척거리니.”
눈물이 핑 돈 블레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떨궜다.
물론 충분히 불쌍하긴 한데, 우는 헬리오스를 본 이상…… 딱히 감흥이 없달까.
“자기야, 시간 다 됐어.”
“아, 이제 문 닫아야겠다.”
블레인의 난데없는 등장 탓에 남은 한 시간 동안은 향수를 거의 팔지 못했다.
눈치를 보며 대기하던 미하일이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려보내고, 나는 블레인의 가슴을 밀었다.
“가.”
“빌리에트!”
“왜.”
보는 눈이 없다면 더 웃을 이유도 없지.
짧게 대꾸하며 눈썹을 추켜세우자 블레인이 진짜 엉엉 울어댔다.
“왜…… 왜 나한테 이렇게 차갑게 굴어. 난 너만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그것참 유감이네.”
“어떻게 이래. 왜 또 저 자식 편이나 들고……!”
“하아.”
내가 지금 몇 살짜리를 상대하는 건지 모르겠다.
더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나는 헬리오스를 올려다보았다.
“힐.”
“응, 빌리.”
“내쫓아줄래?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바다로 보내도 돼?”
내 부탁에 헬리오스가 곧장 눈을 빛냈다.
사실 마음 같아선 나도 사막에 구덩이를 파고 집어 넣어 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지.
단순히 짜증 나고 귀찮은 일에 헬리오스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냥 적당히 수도 밖에 던져 줘. 내일 못 찾아오게. 그렇다고 당장 죽을 만한 낭떠러지 이런 곳 말고.”
“아쉽네. 그래도 분부대로 할게.”
씩 웃은 헬리오스가 블레인을 향해 심술궂은 손짓을 했다.
블레인은 열이 받았는지 무어라 외치려고 했는데, 입술을 떼자마자 슥 사라졌다.
내 속이 다 시원한 속도였다.
“……어디로 보냈어?”
“쓰레기장.”
“아하. 잘했네.”
돌아오느라 고생 좀 해 봐야지.
어디 사람을 여전히 인형 취급하며 제멋대로 굴려 든단 말인가.
‘그렇다면 똑같이 인형 취급해 주는 수밖에.’
의사를 무시당하는 게 얼마나 기분이 더러운지는 몇 번이고 느껴보면 그제야 알 것이다.
모르면 뭐, 알 때까지 보내 버리고.
끈기라면 나도 지지 않았다.
* * *
그 시각, 황제 궁.
황제가 뜬 눈으로 누운 침실 안.
그 어두운 곳에서 황후, 딜라일라와 아라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황제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곧 숨이 넘어갈지도 모르지요.”
둘 사이에 인사 같은 건 필요치 않다.
둘 다 본론만 간결히 하는 걸 중요시하는 편이니까.
“그러면 황제 시험이 시작될 테고…… 사람들이 알게 될 겁니다. 슈텐베르크의 액받이가 누구인지.”
“그래서.”
“따님과 기예르모의 혼사를 추진하고자 하니 허락해 주세요. 액받이보다는 기예르모가 낫지 않습니까.”
딜라일라의 태연한 말에 아라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죽어 가는 황제를 깊은 눈으로 응시할 뿐.
“어차피 평생 액받이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한평생 불행할 텐데, 그의 불행이 따님을 다치게 만들 수 있어요. 아시잖습니까.”
이번에도 아라곤은 침묵했다.
그래, 모르지 않는다.
헬리오스가 초월자가 되기 전의 삶이 어떠했을지 눈에 선했다.
수많은 불운으로 둘러싸여 배 속부터 검게 칠해져 버린 아이.
날 때부터 액을 받아 부모도, 형제도 없이 외롭게 자랐어야 했던…… 그런 헬리오스가 아라곤이라고 마음에 차는 건 아니었다.
기예르모가 마음에 안 차는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중요한 건 빌리에트의 의사다.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간다면 막아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입니다.”
“그런가.”
“헬리오스 이제프는 지금은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황위 싸움이 시작되고 나면 더욱 불운해질 겁니다. 황자들에게 행운이 필요한 만큼.”
기예르모나 이아레스가 죽을 뻔한 위기를 운 좋게 넘기면, 그건 헬리오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치고 아프고 구르고 병들겠지.
그러라고 있는 역할이니까.
어떻게 해야 액받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는 딜라일라도 몰랐다.
그녀가 아는 건 액받이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태어나게 하는 방법뿐.
그 방법으로 황제를 사주해 헬리오스를 만들게끔 했다.
줄곧 거슬렸던 이제프 공작을 노리고.
거기에 대해선 어떠한 죄책감도 없었다.
누구라도 그녀의 입장이면 그리했을 것이다.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액받이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면, 대체 어느 어미가 손을 놓고 있겠나.
제아무리 고고하게 윤리니 도덕이니를 들먹여도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내 자식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죗값이야 죽어서 내가 받으면 되는 것이고, 살아서 내 자식이 아픈 꼴은 못 보지.
‘그건 이제프 공작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들이야 좋으면 다라고 생각하니 고집을 피우겠지.
하나 어른의 생각은 다른 법.
“기예르모와 빌리에트가 단둘이 있을 기회를 주세요. 눈만 감아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무엇을 하려 그러나.”
“단둘이 있을 만한 환경으로 보내 버려야지요. 예를 들면 섬이라거나.”
두 남녀가 끈끈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면 정은 싹틀 것이다.
딜라일라의 주장은 그러했다.
“아이야.”
그 이야기를 깊이 들은 아라곤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네 뜻대로 다 흘러가기를 바라느냐.”
“네. 아시잖아요. 저 욕심 많은 거.”
딜라일라가 이렇게 아라곤을 부를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아라곤이 속는 셈 치고 응해 준 것은 이유가 있다.
아주 오래전, 딜라일라가 아직 여덟 살에 불과하던 때.
그때 그녀의 능력을 알아본 것이 아라곤이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하셨잖아요. 권력을 탐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 여자가 집안에서 자수만 놓을 필요 없다고. 야망을 가져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랬지.”
“이게 제 야망이고, 제 뜻이에요. 기예르모와 맺어진 뒤엔 제가 따님을 아껴 줄 것임을 맹세해요.”
오늘 이 순간만큼은 딜라일라는 어리게 굴었다.
그편이 아라곤의 마음을 사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 역시 요즘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 딸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둘 것이다. 또한, 그 아이에게 의사를 물어볼 테고. 원치 않는다면 진행할 수 없다.”
“공작님.”
“황관을 탐한다면 차라리 네가 직접 쓰도록 하거라. 황제 시험 자체를 없는 것으로 하겠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얹지 않으마.”
역사상 황후가 황제 자리에 앉은 경우는 없다.
그러나 그걸 추진하겠다면 돕지도 않겠지만 막지도 않겠다는 뜻이었다.
여기까지가 아라곤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는 의미기도 하다.
그런 뒤, 아라곤은 황제 궁을 떠났다.
남겨진 딜라일라는 씁쓸한 얼굴로 제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널 언제 죽여야 할지 가늠이 안 와.”
“으…… 으……!”
“빨리 죽여버 리고 싶다가도, 그냥 이렇게 살려 둘까 싶고. 내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만 살아.”
알았지?
딜라일라는 황제의 마른 뺨을 툭툭 치고는 침실을 나섰다.
황관.
그 매력적인 단어에 가슴이 뛰는 건 실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