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00
당당히 앞으로 나서는 능운비의 모습에 왕천과 주승의 눈동자에 무한한 존경심이 떠올랐다.
저분이 나의 주군이란 사실에 감격한 모양이었다.
뿐인가?
사태를 무마코자 했던 운학은 아예 감동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강한 상대에게도 굴하지 않는 무인의 모습은 그만큼 대단한 감동을 주는법이다.
더하여, 당장이라도 맞붙어 싸울 것이라 여기겠지만 오해다.
설마하니, 자신이 아무런 계산도 없이 나섰겠는가?
녹림왕과 싸워서 이길 자신도, 실력도 안 된다.
죽음을 각오하고 악과 싸워?
모르는 놈이나 그딴 소리를 씨불이는 거지. 싸우다가 뒈져 버리면 대의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 종리강과 같은 거물을 상대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대의를 실천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다.
대의라는 것이 반드시 싸워서만 이루어 낼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설전(舌戰)도 싸움이다, 이 말씀이다.
오늘은 몸이 아닌 말로써 대의를 이루리라.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보다시피 식사를 마치지 못한지라.”
능운비가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객점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탁자며 의자며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 위에 차려져 있던 음식이라고 멀쩡할까?
와중에 종리강이 부숴 버린 한쪽 벽면으로 인해 객점 건물 자체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리고 능운비의 말투.
앞선 도사처럼 종리강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으로 대하고 있었다.
“큭, 큭큭큭.”
“……”
종리강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리자, 능운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웃소?”
“다행이라 그렇다.”
“……”
“내 의제를 그리 만든 놈이 도사의 뒤에 숨고, 어린 계집년과 수하들의 뒤에 숨는 놈이 아니라서.”
“과찬이오.”
“과찬은 무슨. 그나저나, 네 죄는 알고 있겠지?”
종리강의 말에 능운비가 주변을 슥 하고 훑어보았다.
구경꾼들이 제법 모였다.
혹시나 휘말릴까 봐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갑자기 객점이 반쪽이 되었는데 안 보고 지나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싸워 볼까?
몸이 아닌 말로.
내가 한때 제갈 씨들이랑 말싸움하던 사람이다.
너 따위를 말로써 궁지에 내모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죄라니? 무엇이 죄란 말이오?”
“뭐?”
능운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리둥절해하자, 종리강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산적은 법이 규정한 범죄자요. 그런 산적을 토벌한 것이 어찌 죄가 되는것인지 모르겠소만.”
“법이 어째? 무림인이라는 놈이 법을 들먹여?”
“……”
“법이고 나발이고는 관심 없고! 내 의제의 사지를 부러뜨린 것도 모자라 산채까지 털어 먹었으니, 나는 그 죄를 물어야겠다!”
성이 잔뜩 난 듯한 종리강의 말에 능운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 말 잘했다.
조목조목 반박해서 네놈의 주둥이를 틀어막아 주마.
“어허, 이거 참. 너무 막무가내시네. 그래, 관무불침. 하지만 그건 무림인간의 다툼일 때나 적용되는 것이오. 이번엔 경우가 다르지 않소?”
“뭐라?”
“당신의 의제를 만났을 때, 나는 상단의 호위였소.”
“뭐? 호위? 마교 교주의 제자가 호위나 하고 있었다고?”
“왜? 안 되는 일이오?”
“이 자식이!”
“상단의 호위를 하는 데에 신분이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리고 이미 정무맹과 마교 지부의 창설에 관한 협약이 맺어졌소. 우리가 중원에서 활동한다고 하여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오.”
“……”
“내가 일부러 산채를 토벌하기 위해 찾아간 것도 아니고, 정상적으로 계약을 맺고 호위를 하는 중에 산적이 나타나 위협하는 통에 호위로서 본분을 다했을 뿐이오. 하니 이는 무림인 간의 다툼이 아닌 산적 패가 상단을 공격한 것으로 봐야 하오.”
능운비가 태연하게 상황을 설명하자 종리강의 눈가가 작게 씰룩거렸다.
하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전일석이 상단을 치러 나갔다가 놈에게 당했다는 얘기는 그 역시 들었으니까.
산적들의 영업. 그것이 항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 습격할 대상을 잘못 판단해 실패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 잘못은 오롯이 산적들에게 있었다.
산채를 토벌할 목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닌 이상, 피해를 입었다고 할지라도 복수하지 않는다.
능운비는 지금 그 점을 꼬집고 있었고, 한순간 종리강을 형제의 복수를 위해 눈이 돌아가 찾아온 용졸한 범죄자로 만들어 버렸다.
“중원에서 녹림왕의 이름값이 작지않다 들었는데…… 제법 의외요. 산적일지라도 사리 판단은 할 줄 알아야 하거늘.”
“……”
대놓고 비꼬는 능운비의 말에 종리강이 까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차분히 따지고 드는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 보였다.
사실 일부러 크게 말했다. 다들 들으라고.
이미 구경꾼들이 이곳저곳에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종리강은 동네 뒷산을 주름잡는 도적이 아니라, 천하에 이름을 떨친 고수다.
당연히 체면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만약 그가 능운비에게 죄를 물으려 한다면, 그 명성에 크게 흠집이 날 것이 틀림없었다.
녹림왕이 영업에 실패한 제 식구의 잘못을 감싸다가 약관도 안 된 무인들을 핍박했다고…….
종리강도 주변의 분위기를 의식한 것인지, 얼굴을 찡그리며 능운비를 노려 보았다.
“영악한 놈…… 마교답게 혓바닥이 간악하구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지 않소? 그리고 나는 틀린 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소. 거짓말이라 생각되면 그대의 의제를 추궁해 보면 될 일이오.”
능운비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반박해 오자 종리강은 콧김만 씩씩거렸다.
이미 능운비의 말에 휘말린 상황이다.
그리고 구경꾼이 어디 한둘이던가?
화가 나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는 당장 온 천하에 소문이 날 것이다.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
탁추에 호객들까지 끌고 왔다가 그냥 돌아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양자 어느 것을 택해도 욕먹을 상황이라면?
당연히 강행이다.
“오냐, 네놈의 주둥이만큼이나 무공이 뛰어나길 빌겠다.”
“……”
더 대화를 나누었다가는 손해만 볼것이라 여긴 종리강이 능운비를 향해 일보를 내디뎠다.
쿵!
가벼운 걸음이었으나 공간이 흑 밀려드는 것 같았고, 땅이 진동하는 것이 선명히 느껴진다.
물론 그리 나올 것이라 이미 예상했다.
가진 게 힘뿐인 놈이 뭘 내세우겠는가?
하지만! 이런 상황 역시 계획의 일부!
능운비는 조금도 위축됨 없이 손을 들었다.
“잠까아안!”
“……?”
그 말에 우뚝 멈춰 선 종리강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또 뭐냐!”
“자고로 무인은 말이 아닌 몸으로 스스로 증명해야 함을 나도 잘 알고 있소. 문답무용(問答無用)이라는 말이 괜히 있을까?”
“……”
“그래도 지금은 좀 그렇지 않겠소?”
“뭐?”
능운비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위를 바라봤다.
“도심이 아니오? 보는 눈이 많소. 설마하니 녹림왕이나 되시는 분께서 이곳에서 난동을 피울 생각은 아니지요?”
“……으음.”
듣고 보니 그렇다.
지금 같은 기분에 힘을 사용했다가는 객점 하나 무너뜨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와중에 구경꾼들 틈에 관복 입은 자들도 보이지 않는가?
“나는 상관없지만, 녹림왕께선 관부에 지명 수배가 되어 있을 것이 분명한데.”
“……”
“아무리 관무불침이라고 하나, 관인들이 녹림왕을 난처하게 할지도 모를 일이오. 내 비록 마교에 속해 있는 몸이나, 어찌 함께 무의 길을 걷는 이가 어려움에 처하는 것을 두고 볼까?”
“……”
“오늘은 이만 물러가시고, 나중에 날을 잡아 다시 봅시다. 내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응하겠소.”
능운비의 권유에 종리강의 얼굴색이 형형색색으로 뒤바뀌었다.
그래서 뭐?
니가 총타주면 총타주지, 산적 놈 주제에 관인들 앞에서 사고 치려고?
진퇴양난에 빠진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종리강을 보며, 능운비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괜히 자신 있게 나섰겠냐?
그러니까 그냥 가라.
오늘은 니가 진 거야. 나의 설검술(舌劍術)에.
이걸로 악에 굴하지 않겠다는 대의는 지킨 셈이다.
주먹을 쓰진 않았지만, 무릎도 안 꿇었고 눈도 안 깔았다.
능운비가 스스로 뿌듯해하며 탁자로 돌아가려 몸을 돌렸다.
“……마교의 애새끼.”
“……?”
순간, 등골이 섬뜩해졌다.
뭐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종리강이 귀기 어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자, 잠깐만…… 너 왜 이래?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잖아?
설마 지금 나랑 싸우려고? 관인들이 곧 도착할 텐데?
“나를 아주 졸(卒)로 봤구나.”
“……”
“이 종리강에게 관부의 수배령이 떨어진 지가 어디 하루 이틀인 줄 아느냐? 그리고 사람들의 평판? 내가 그딴것에 신경이라도 쓸까 봐?”
능운비를 노려보는 눈에서는 시퍼런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고, 그 몸에서는 서늘한 기세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빠득, 빠드드득.
“……!”
걸음을 옮기지도 않았는데, 종리강이 뿜어낸 무형의 기파에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돌멩이, 나뭇조각…….
부서지는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었다.
근래예 딱 한 번 이런 현상을 본 적이 있었다.
제자로서 능력을 입증하라며 두들겨패기 전에 교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이런, 씨부랄.
능운비는 그때야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평판이나 소문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진짜 나쁜 놈도 있다는 걸.
그리고 그놈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씨불인 자신의 말은, 성난 멧돼지같은 그의 꽁지에 불을 붙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 덕에 상대는 시작부터 강기를 온몸에 덕지덕지 처바르기 시작했다.
손이며 발이며 온통 시퍼런 게, 아주 무시무시하다.
“누구든 끼어들어 보라고 해라.”
“……”
“마교, 정파, 설사 관부 놈들이라고 해도 내 앞길을 막아서는 놈들은 모조리 찢어 죽여 줄 테니까.”
종리강의 기세가 점점 더 거세졌다.
능운비의 눈동자가 세차게 좌우로 굴러다녔다.
지금 이 근처에는 관인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다, 혹시나 그들의 싸움에 휘말릴까 봐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려는 것이다.
이런 미친놈들!
재 안 보여? 산적 두목이야! 일급 지명 수배자라고!
니들이 그러고도 관인이냐!
다급해진 능운비가 다시 고개를 돌려서 제 일행을 쳐다봤다.
향이…….
“삼공자, 부디 무운을 빌겠습니다. 비록 그대를 지키라는 명을 받았으나, 홀로 감내하려는 그대의 기개를 어찌 무시할까?”
“……어?”
지켜 준다며? 지금 그게 지켜야 할 사람에게 할 말이야?
저거 봐, 저거. 녹림왕 저 사람, 지금 완전히 눈깔이 돌아갔다고.
하지만 향이는 이미 멀찍이 물러나고 있었다.
젠장, 이럴 땐 나의 충성스러운 호위들이…….
“주군! 감격스럽습니다. 이리도 강하게 성장하시다니요.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보겠습니다.”
“어어?”
주승과 왕천이 능운비를 향해 주먹을 힘껏 쥐어 보이며 응원을 보내고는 삭월대와 함께 객점 밖으로 벗어났다.
야! 니들이 그러고도 호위야?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목숨을 걸고라도 막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잖아!
안 되겠다. 이리되면 운학이라도…….
“무량수불.”
“……”
운학이 도호와 함께 고개를 숙이고 멀찍이 물러났다.
그 눈에 담긴 존경심과…….
꺼져! 이 도움 안 되는 도사 새끼야!
괜히 나섰다.
그냥 니들이 나의 방패가 되어 달라고 할걸.
파아앙!
멍해진 눈동자에 귀신 같은 얼굴을 하고 달려오는 종리강의 모습이 보였다.
아, 씨발…… 진짜 엿 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