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27
한참이나 화풀이를 해 댄 향이가 씩씩거리며 문을 열고 나간 뒤.
“주, 주군…… 괜찮으십니까?”
“……”
주승과 왕천, 곽희영이 열린 문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이 배신자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사람 꼬라지 안 보여?
저런 것들을 호위라고 데리고 다녔다니.
“음…… 시비님께선 정말 엄청나시군요? 대체 정체가 뭐길래?”
“……”
곽희영이 연신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감탄할 일이냐?
충성하겠다며 이 새끼야! 아직 입술에 침도 안 말랐겠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는 셋을 째려본 능운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드득.
“어헉.”
밟혀도 제대로 밟힌 모양이다.
뼈마디가 욱신거리는 것을 보니까.
“주, 주군!”
일어나다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려 탁자에 의지하는 능운비의 모습에 셋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놔, 이 배신자들……”
“아, 그게……”
“저는……”
“죄송합니다.”
따가운 눈초리에 셋이 동시에 미안한 표정을지었다.
그래. 니들 살길만 생각하겠다, 이거지?
두고 보자. 나도 언젠가 니들이 뒈질것 같을 때 반드시 모르는 체해 주마.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맘먹고 패려는 향이의 공격을 꽤 버텼다. 심지어 치명적인 공격은 거의 다 피해내지 않았던가?
장족의 발전이다. 교주의 목 따는 것이 목표인 향이에게 어느 정도 다가갔다는 뜻이니까.
“주, 주군…… 코피가……”
“……”
이건 마지막에 피하다가 기등에 처박아서…….
“어이구, 삭신이야.”
능운비가 주승이 가져온 천 조각으로 콧구멍을 막으며 삐걱거리는 몸을겨우 일으켜 세웠다.
“앉으십시오!”
그래도 처맞는 능운비를 혼자 둔 것이 미안했던지, 왕천이 재빠르게 의자를 가져왔다.
“휴우…… 이제야 좀 살겠네. 망할자식, 뭔 놈의 주먹이 돌덩이 같아서는. 그나저나 염가 놈이 무슨 짓을 했길래 저렇게 화가 잔뜩 난 거야?”
“혹시나 몰라서 물어봤는데…… 덮쳤다는데요?”
“응? 뭐가 어쨌다고?”
왕천의 말에 능운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신이라는 시비인 줄 알고…… 염가놈이 덮쳤다고……”
“……”
“듣자 하니, 평소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 염가 놈은? 살아 있고?”
“예.”
“허어…… 다행이네.”
능운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염성인은 그냥 손대는 척만 했을 것이다. 향이를 청신이라 철석같이 믿고, 일을 시키기 위해 문밖의 무인들을 속이려 일부러 그런 것일 터다.
만약 진짜 손댔으면 살아 있을 리가 없지.
그나저나…… 맞을 만했네.
아무리 손대는 시늉만 했다고 해도, 자신이 시킨 일을 완수하려 참았을 테니까.
“휴우…… 이거야 원, 일 하나 시켰다가 자칫 모가지가 날아갈 뻔했네.”
“그러니까요. 그래도 수치심까지 참으며 주군께서 시키신 일을 완수하려하신 마음이 참으로 기특하지 않습니까?”
왕천의 말에 능운비가 눈을 샐쭉하게 뜨고 그를 째려봤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럼 너도 한번 맞아 볼래?”
“……절대로 싫습니다.”
“그럼 닥쳐. 맞아 보지도 않은 게.”
“……”
능운비의 짜증에 왕천이 입을 꾹 다물고 딴청을 피웠다.
“그보다…… 이게 전부야?”
“예?”
“내가 알아 오라고 시켰던 거.”
“아! 그렇습니다.”
능운비가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가리키자 왕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해 현장을 보았던 날, 능운비는 왕천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장일산이 말했던 자. 공태석을 죽인놈과 동일한 살해 흔적을 남겼다는 놈을 찾아보라고.
“흐흠.”
능운비가 종이를 세심하게 살폈다.
“이놈은…… 아니고, 이놈도 아닌 것 같고……”
살수들의 신상과 그간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쭉 훑어 내려가던 능운비가 순간 멈칫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미결?”
“아, 그거 말이군요? 개방이 말하길, 다른 사건은 대부분 흉수를 특정했는데 그 사건은 여전히 오리무중으로 남았답니다. 그것 말고도 비슷한 사건들이 또 있긴 했다는데, 관할 밖이라서 조사된 내용이 없다더군요.”
“홈…… 그렇단 말이지?”
왕천의 말에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시면 더 캐 볼까요?”
“아니야. 뭘 그렇게까지.”
고개를 저은 능운비가 생각에 잠겼다.
의외다.
그저 그런 놈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은가?
중원 정파에 몸담은 이들 중 최강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개방이다.
알아내고자 하면 지나가는 여인네 속옷 색깔까지도 맞춘다는 그들이 흉수를 특정 짓지 못했다?
즉, 흔적을 들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개방에게…….
그만한 능력을 가진 살수가 몇이나 될까?
“이거 제법…… 재미있겠는데? 보통놈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이지?”
“예?”
“……”
의아하게 쳐다보는 수하들을 무시하고 종이만 쳐다보던 능운비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했다.
“애들 다 모아라.”
“애들을…… 전부요?”
“그래. 지부 무인들까지 싹 다.”
“……?”
“우암골로 간다.”
능운비의 말에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요, 주군.”
“응?”
“다 가자구요? 남김없이?”
“어.”
“고작 살수 하나 잡자고?”
“그게 왜?”
“……말이 됩니까?”
늘 그랬듯이 왕천이 반대부터 하기 시작했다.
“응. 말이 돼.”
“하아……. 주군.”
“한숨은 빼지?”
“그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고작 살수입니다. 그것도 청운목향의 청부나 받는 별 볼 일 없는 놈이라구요.”
“별 볼 일이 없어?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왠지 느낌이 안 그래.”
“어쨌든 다 모아. 포위망이 든든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주군!”
“……”
“좋습니다, 좋아요. 주군의 명이니 따라야지요. 그런데 종남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왜?”
“고작 살수 하나 잡자고 마교가 떼지어 가면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고작 살수가 아닐 수도 있다니까?”
“이런 씨! 자꾸 이럴 겁니까? 마교의 위신은 생각 안 하세요?”
“위신 같은 소리 하네. 범은 토끼 사냥에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야.”
“범은 짐승이구요! 배고프니까! 최선을 다해야죠!”
“……”
왕천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능운비가 픽 하니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범과 마교는 다르지.
왕천의 말대로 살수 하나 잡자고 마교가 떼 지어서 달려가면 우습게 보일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놈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교의 위신? 만약 몇몇만 갔다가 이놈을 놓쳐 버리기라도 하면, 그땐 괜찮고?
떼 지어 가야 한다. 포위망을 든든히 갖추어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살수였던 과거의 본능이 그리 경고해 오고 있었다.
그만한 능력이 되는 놈일지도 모른다고.
능운비가 종잇장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왕천.”
“예!”
“명령이야. 지금 즉시 출발한다.”
“……”
능운비의 확고한 눈빛에 왕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 * *
우암골. 마교의 섬서 지부가 자리 잡은 곳에서 대략 백여 리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다.
사실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우스운곳이었다.
첩첩산중의 계곡을 따라, 산비탈마다 지어진 집들이 이룬 마을.
한 집 걸러 두 집, 두 집 걸러 또 한 집.
최소 몇 리씩은 떨어져 사는지라, 왕래를 하지 않으면 서로의 안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
염성인이 말한 창중은 바로 그 계곡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지어진 집에 살고 있었다.
우거진 수풀이 해를 가려, 낮에도 밤과 진배없게 느껴질 만큼 음음한 곳.
그 주변 또한 어슴푸레하여 선명하지 않다.
와중에 그 안에 숨은 놈에겐 밖이 훤하게 보일 테니, 그야마로 은신에 최적이라 할 만한 위치였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보통 놈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 이만한 실력을 가진놈이 청운목향 따위의 청부를 받았을까?
어둠 속에 자리 잡은 낡은 초옥의 음산함을 바라보는 능운비의 눈동자가 심연처럼 깊어졌다.
귓가에 흘러온 전음에 주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 십여 리 밖으로 우회한 삭월대가 북쪽 도주로를 차단했습니다.”
주승에 이어 곽희영이 보고를 이었다.
“섬서 지부의 배치도 끝났습니다. 좌우 각기 백 명씩 포위망을 구축했습니다.”
“좋아.”
수풀의 그늘에서 음산함을 내뿜는 초옥을 응시하던 능운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왕천과 향이가 버티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엔 진산과 웅현이 능운비의 일 처리를 관람(?)하려 대기중이었다.
물론, 왕천은 여전히 능운비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표정이 뚱했다.
고작 살수 하나를 잡기 위해 마교의 무인 삼백여 명이 포위망을 구축하다니…….
대체 이게 뭔 지랄이란 말인가?
종남이 마교를 어찌 생각할지 뻔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손가락질을 하고 있겠는가?
와중에 진산은 종남을 대표하는 큰 어른이라는데…….
하지만 그는 평소처럼 투덜거리지 않았다. 아무리 격 없이 지내는 사이라지만, 외인들 앞에서 주군의 위신을 떨어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능운비는 왕천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고, 마교의 위신 따위를 신경 쓸 사람도 아니었다.
“야!”
“눼?”
“계속 그런 표정 지을 거면 따라오질 말든가.”
“예?”
“내내 시무룩해 있잖아.”
“제, 제가 언제요?”
왕천이 진산과 웅현을 힐끗거리며 반박했다.
“계속, 아까부터.”
“아닙니다. 일절 그런 일 없습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또 반대하려고 했지?”
“바, 반대라니요? 제가 어찌 주군께……”
신경질 가득한 능운비의 말에 왕천은 진산과 웅현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주군 같으니!
일부러 참고 있구만, 왜 굳이 정파놈들 앞에서 긁어 부스럼을 만든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정파가 마교를 뭐라 여기겠는가?
“하기 싫으면 가! 옆에서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왜 그러세요? 제가 또 언제 신경 쓰이게 했다구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능운비가 야속하기만 한 왕천이 입을 삐죽거리자 향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한숨 열두 번. 말할 듯 말 듯 입술달싹거린 게 스물…… 세 번? 뒤에서 삼공자님 째려본 게 다섯 번 정도.”
“예?”
“청운목향에서 여기까지 오는 시간동안.”
“……시, 시비님까지 왜 그러세요?”
객관적이다 못해 궁지에 몰아넣고 짓밟아 대는 듯한 향이의 지적에 왕천이 울상을 지었다.
주군도 모자라서 시비님까지.
아주 똑같다. 마교의 위신을 생각하는 건 자신뿐이지.
“좋습니다. 좋아요! 이 일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제가 직접 가서 놈을 잡아 오겠습니다!”
“……”
왕천이 벌떡 일어나 외치자 능운비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한 얘길 뭐 그리 결연하게 말하냐?”
“……예?”
“그럼 설마 나나 향이가 갈 줄 알았어? 아니면 진산 어른이?”
“……”
“닭 잡는 일에 소 잡는 칼 쓰면 안된다고 지가 맨날 말해 놓고는……”
능운비의 말에 왕천의 입이 조개처럼 꽉 다물렸다.
원래부터 날 시키려는 거였냐?
“빨리 다녀와. 굳이 안 도와줘도 되지?”
“……으므름요.”
생긋이 웃으며 명하는 능운비를 바라보던 왕천이 이를 꽉 물고 초옥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억지로 웃으면서…….
못 믿겠으면 직접 경험해 봐야지.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저 초옥에 숨어 있는 창중이라는 놈은 보통이 아니다.
분명 뛰어난 살수일 것이다.
뭐, 아닐 수도 있지만.
“흠…… 왕 호위장만으로 괜찮을까요?”
“……”
초옥으로 향하는 왕천을 바라보던 향이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역시 감이 좋다.
그녀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오직 살수들만이 알 수있는 것들을 보았을 테니까.
“죽진 않을 거야. 왕천은…… 그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니까.”
“하긴…… 제 앞가림 정돈 하니까요.”
능운비의 말에 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튀어나와라, 살수 놈아.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청운목향 따위의 청부를 처리한 네놈의 상판 좀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