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67
“자, 보게.”
편지를 내밀며 웃는 이옥상을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능운비가 무심코 손을 내밀었다.
정무맹주 친전(親展)이라는 말로 시작한 편지의 첫 줄은 짧고도 강렬했다.
내 후계자다.
“……”
능운비는 자기도 모르게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렇게 바로? 흔하디흔한 계절 인사나 안부 같은 것도 묻지 않고?
그리고, 자신에겐 일언반구도 없더니 갑자기 무슨 후계자란 거냐고!
하마터면 구겨서 던질 뻔했다.
“놀랍지?”
“하마터면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네요.”
“나도 그랬네.”
이옥상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냅다 질러 버리는 경우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계속 읽어 보게.”
“……”
이옥상의 권유에,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 능운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정정당당한 대결로 인한 죽음에는 관여하지 않겠다.
다만 비열한 짓거리로 신상에 문제를 만들면…… 그 즉시 내려가겠다.
“허! 이런 미……”
이옥상이 듣고 있었기에 차마 뒷말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별의별 상스러운 욕설이 난무하고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그게 다였다. 다른 말은 눈 씻고 찾아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담운천답지 않은가? 직설적이고, 간단명료하지.”
“……다운 건가요? 이건 그냥 본인하고 싶은 말만 적어서 보낸 것 같은데요?”
“답지.”
“……”
“뜻을 전하는데 미사여구가 필요한가? 오히려 나는 그의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여 좋았네.”
“용케 담담하시네요. 이건 그냥 대놓고 위협하는 건데요? 까딱하면 쳐들어오겠다고.”
“능히 그럴 만한 힘을 가진 인물임은,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는가?”
물론 알지.
원래도 괴물이라 생각했지만, 진산으로부터 제천마제라는 무호(武號)가 가진 의미를 듣고 나서는 경외감마저들었다.
“하지만…… 정파의 수장으로서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으십니까?”
“자존심?”
이옥상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누군가에게 힘이 모자라 패배한 것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네. 더 열심히 노력해 강해지면 되는 일이지.”
“……”
“진짜로 자존심이 상해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니네.”
“……”
“정파답지 못한 자들이 정파의 탈을 쓰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같은 곳에 몸담은 내게는 수치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네.”
웃음을 머금은 채 가벼이 건네듯 말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무겁기 그지 없다.
한때의 자신이 그랬고, ‘그분’이 그러 했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능운비는 차마 웃으며 말을 받지 못했다.
“……감히 제가 듣기에는 무척이나 위험한 말이군요.”
“그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네. 자네의 진심을 알려면, 내 속마음부터 보여야 한다고 여겼기에……”
“후우…….”
이옥상의 말에 능운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말해야 하는가?
자신들은 음지에서 바꾸려 했고, 이옥상은 양지에서 바꾸려 하고 있다.
하지만 목표는 같다.
정파가 정파다운 세상.
위선자들이 군림하지 않는 세상.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이 위를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리고 그런 그가 자신에게 묻고 있다.
마교가 중원을 침공하지 않으리란 것을 장담해 줄 수 있느냐고…….
“혹시 교주님께도 물어보셨습니까?”
“물었네.”
“어찌 답하시던가요?”
“개소리 말라더군.”
“큭!”
그 말에 능운비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의심이 간다면 그때 받은 편지도 보여줌세. 딱 그 말만 적혀 있네.”
“아닙니다. 웃은 건 정말 교주님답다 여겼기에…….”
여윽시…….
세상 혼자 사는 교주다. 정말 가차없지 않은가?
“다만 그 말을 한 뒤에, 마교는 벌써 십 년째 봉문(封門)중일세.”
“예?”
그 말에 능운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명목은 후계 양성이었네.”
“……”
“대외적인 활동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어떠한 무인대도 중원으로 내보내지 않더군.”
봉문을 한 것이 그럼……?
의아해하던 적이 있었다.
막 능운비의 몸으로 되살아났을 때.
사상 최강의 힘을 지녔다는 것을 정파마저 인정하는 교주였다. 휘하의 무인들 역시 당장에 중원으로 밀고 내려와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강했다.
한데도 봉문 상태를 유지했다. 왜인지 알 수 없던 그 의문이, 이제야 풀리는 느낌이었다.
정무맹주 이옥상의 부탁 때문에…….
“한데, 맹주가 되신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막 이 년 차라네.”
“그런데 어찌?”
“검왕의 이름을 얻게 되었을 때, 교주를 찾아갔었지.”
“교, 교주님을요?”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고 싶었거든.”
“……”
그러고 보니, 화산의 독고성도 심득을 얻은 이후에 그를 찾아가려 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좀 강해졌다 싶으면 다들 교주를 찾아가는 모양이다.
이건 뭐 살아 있는 공용 무공 측정기도 아니고…….
“교주님께서 만나 주셨나요?”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그는 순수한 의도로 찾아온 이를 박대할 만큼 모질지 않다는 것을.”
“……”
모질던데? 자신을 팰 때는 정말 인정사정이 없던데?
“결과는요?”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날 위협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인물이라고.”
졌다는 뜻이다.
“아직 이 중원에서 제천의 이름을 넘겨받은 이는 아무도 없네. 아니, 앞으로는 있을지 의심까지 드는군.”
“……”
“비록 그가 마의 길을 걷고 있지만, 좋은 일이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이가 그만한 힘을 가졌었다면……”
“중원이 피바다가 된 지 오래였겠죠.”
“그런 것이지.”
능운비와 이옥상이 같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알겠다. 중원의 평화는 담운천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갈 수 있음에도 나아가지 않고 멈춰서 있는 것만으로…….
그것이 정말로 이옥상의 부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나는 맹주가 되었네. 하나 쉽지 않더군. 하긴, 누대로 고여 온 물이니 쉬이 정화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담운천의 대에서는 해결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래서 제게 물으신 것입니까?”
“그렇네. 담운천의 후계자인 자네가 나에게 확신을 준다면, 나 또한 멈춤없이 나아갈수 있을 듯하여.”
이옥상이 그리 말하는 것을 보면, 이미 어느 정도의 계획을 세워 둔 것이 분명하다.
아마 장기적인 계획일 것이다. 그가 맹주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지속될.
하지만 그건 그거고.
“거참, 전 후계자가 될 생각이 없다니까요.”
“편질 봤잖은가?”
“그건 교주님 생각이구요!”
“그런가?”
“예!”
“흠, 자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하나 쉽지 않을 것이네.”
“예?”
“말했지? 자네 스승이 내게 개소리하지 말라면서도 봉문을 해 주었다고.”
“……”
“그런데 이번엔…… 그가 아예 점을 찍었어. 아주 확고하지 않던가?”
“그게……”
“자네 스승이 빈말을 할 사람 같은가?”
“……”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교주가 빈말할 사람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기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왜 자신의 인생을 교주가 결정한단 말인가?
“……후우, 그럼 더 할 말 없으신 것같네요.”
“음.”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게. 사실 더 많은 시간을 두고 대화하고 싶지만…… 책잡을 누군가가 이 만남을 그리 좋아하지 않을 테니, 이만 자리를 파하는 것이 좋을 듯하군.”
결국 대화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이옥상은 그저 얼굴을 굳힐 뿐이 었고, 자신이 교주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하는 능운비는 답답할 뿐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부디 정무맹에서 지내는 시간이 즐겁길 빌겠네.”
“예.”
그 말을 끝으로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가려던 능운비가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맹주님.”
“……?”
“제가 교주가 될 생각이 없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답은 하고 가겠습니다.”
이옥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능운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제 검 끝이 맹주께서 꿈꾸시는 정파를 향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네……?”
“그럼 이만.”
능운비는 다시 한번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나갔고, 잘게 떨리는 듯한 이옥상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 * *
능운비가 전각 밖으로 나오자, 다양한 복색을 한 이들이 그를 맞이했다.
“크흠!”
능운비를 쳐다보는 그들은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무맹의 장로들이랍니다.]왕천의 전음에 능운비가 실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가 접견 장소를 바꾸었다는 소리를 듣고 부라부랴 찾아온 모양이었고, 표정이 좋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긴…… 정무맹 장로들이 어떤 사람인가?
인망? 물론 그런 것들도 선발의 기준이 되겠지. 실제로 그런 이유로 뽑힌자들도 있을 테고.
정무맹의 장로 자리는 맹주를 견제하고자 각파에서 추천한 자들로 채워진다.
뜻이야 좋다. 맹주의 독단적인 결정을 방지하여, 보다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니까.
하지만 능운비가 아는 한, 그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각자가 속한 곳의 이득이다.
전생에서 더러운 꼬라지를 좀 많이봤어야지.
한때 몇몇은 자신의 손에 죽기도 했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은 달라졌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이렇게 몰려나온 것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간다.
또한 저 불편한 표정이 전부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여전히 똑같다는 걸.
지금의 행동은 분명 자신들의 언짢음을 맹주에게 알리려는 시위일 것이다.
권력의 승냥이 같은 놈들…….
하지만 능운비는 애써 웃음을 머금은 채 모두를 향해 허리를 숙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마교의 삼공자가 정무맹의 어른들을 뵙습니다.”
너무도 공손한 인사에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의아함을 머금었다.
“맹주께서 단독으로 접근하여 마교의 체면을 세워 주신 것도 감사할 일인데, 이리 다들 나와 환대해 주시니 무어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속을 감춘 채 한껏 예의를 차렸으니, 지들이 뭐라 불평하겠는가?
와중예 단독 접견을 해서 더욱 기분이 좋다고 말했으니.
“허허, 맹주님의 판단이 마교의 체면을 세웠다 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
잠시간의 수군거림 끝에, 장로들 사이에서 한 인물이 앞으로 나왔다.
“나는 정무맹의 장로, 남궁학이라하오.”
“아! 남궁학 장로님이시군요. 제가 중원이 초행인지라 미처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괜찮소. 그래, 맹주님과의 대화는 유익하였소?”
남궁학의 말에 능운비의 미소가 짙어 졌다.
이놈이 대장이네. 그가 나서자마자 다른 장로들이 조용해진 걸 보면.
“예, 유익하였습니다. 이리 방문해주어 고맙다면서, 부디 즐겁게 보내길 바란다고 하시더군요.”
“헛헛, 그랬군요. 그래, 교주께서는 잘 계시오?”
“무탈하십니다.”
“그거 다행이오. 제천께서 건재하시다고 하니 내 마음이 놓이는구려.”
“남궁 장로님께서 걱정하시는 마음을 교주님께 반드시 전달토록 하겠습니다.”
“오, 고맙소. 내 안 그래도 그분의 이름을 항시 흠모하였으나 만나 뵐 길이 없었거늘…… 삼공자를 통해 잠시나마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하니 참으로 흡족하오.”
“예.”
주거니 받거니…… 일상적인 대화일뿐이다.
아마 맹주가 장소를 바꾸지 않았다면, 비슷한 대화가 오고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
“술은 좀 하시오? 맹주께서 삼공자가 온다는 말에 신경 써서 연회를 준비하라 지시하여, 내 힘을 좀 써 보았는데…….”
그 말에 능운비가 속으로 빙긋이 웃었다.
연회? 신경?
놀고 있네. 진짜 궁금한 건 맹주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가겠지.
하지만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 아닌가?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고.
“다행히 제가 남들보다 간이 좋습니다.”
“오! 그거 다행이구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남궁학이 뒤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
“황 장로.”
“예.”
남궁학의 부름에 앞으로 나선 노인.
“삼공자를 연회장으로 뫼시게.”
“예.”
담담히 대답하며 나서는 그의 모습에 능운비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다, 당신은…….
이름은 알지 못했다. 다만, 익숙한 얼굴이었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잊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분의 곁에서 함께했던 사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