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271
간곡함이 느껴지는 한마디에 능운비가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우리 사제께서 부탁했으니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줄까?”
“후우…….”
능운비의 말에 소선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폭풍 같은 기세도, 압력도 여전히 그대로다. 다만 더 늘지 않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사형은 정말 많이 변했군요.”
“맞아.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법이지.”
“전엔 그래도 한번 싸워 볼 만했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래서 답은?”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줘요.”
“큭, 시간 끌었다가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예요.”
“……”
“다만, 우리가 믿을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믿을 만한 것?”
“그렇잖아요. 나야 사형을 돕겠다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예하 세력들은 뭐로 설득한단 말이에요?”
“그건 그렇네.”
“사형에게 합류할 만한 근거가 필요해요.”
“근거라…… 능력을 보여 달란 말인가?”
“예. 힘만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내가 굳이 그래야 하나? 여기서 모조리 죽여 버리면 그만인데? 어차피 마교인들은 힘이 더 강한 쪽에 붙기 마련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되면 온전히 세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대부분이 사형보단 대사형을 택할 겁니다. 그쪽이 권좌에 앉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니까. 그리고 이건 제 선택만이 아니라 야수문의 선택이라구요.”
“음, 그건 그렇지.”
능운비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누구라도 자신의 주장을 억지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뭘 보여 주지?
힘은 이미 충분히 보여 주었으니, 더 이상은 필요 없을 테고…….
능운비가 잠시 고민하던 그때, 숲 멀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창칼이 부딪치는 소음과 알아들을수 없는 고함, 아무래도 싸움이 벌어진듯했다.
설마 주승이?
자신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주승은 누구보다 명을 우선시하는 충성스러운 무인이 아니던가.
하면?
능운비가 귀를 쫑긋거리며 상황을 파악해 보려는데, 소선화가 전령을 향해 외쳤다.
“무슨 일이냐!”
“적입니다!”
“적? 설마 대공자 쪽이 움직였단 말이냐!”
“아닙니다. 대공자 쪽이 아니라……”
수하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한 떼의 인물들이 숲의 방어막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능운비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던 소선화 쪽 무인들이 일제히 방어막을 갖추어 대응했다.
“교주님! 교주님!”
“주승?”
자신을 부르는 외침에 능운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주승과 운황대였단 말인가? 이것들이 기어이 자신의 명을 어기고…… 어?
순간 능운비의 눈에 뜻밖의 인물이 보였다.
“강 선생?”
“휴우……다행히 제가 늦지 않은 모양입니다.”
“……?”
힘껏 숨을 내쉬며 안도하는 강자서의 모습에 능운비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고, 의아함을 느낀 소선화가 급히 손을 들어 휘하 무인들을 제지했다.
“강 선생이 여긴 왜?”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능운비의 물음에 대한 답을 넘긴 강자서가 소선화를 보며 말했다.
“사공녀님, 예하 세력들에게 싸움을 멈추라 명을 내려 주시겠습니까?”
“……뭐?”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소란의 연유가 능운비의 부하들 때문임을 깨달은 소선화가 냉담을 쳐다봤다.
“각적을 불어 휴전 신호를 보내거라!”
“예!”
냉담의 명을 받은 신호수가 힘차게 각적을 불었다.
뿌우우우!
숲속이 떠나갈 듯 울리는 소리에 소란이 빠르게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내, 일월기를 높이 쳐든 무리가 공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천을 필두로, 능운비에게 점령당한 세 문파의 주인들이었다.
“강 선생,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 하필 교주님께서 떠나시고 난 뒤 떠오른 생각이라 미리 설명드리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보단 직접 보시는 게 빠르겠지요.”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는 강자서의 모습에 능운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법성존자님!”
“예!”
강자서의 말에, 왕천이 무리의 뒤편에서 보자기로 얼굴이 가려진 인물을 데리고 나왔다.
저건 또 누구야?
모두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짓던 그때, 왕천이 보자기를 벗겼다.
상처투성이의 얼굴이었지만, 단번에 그 정체를 알아본 소선화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비사궁주?”
“어?”
놀람이 가득한 소선화의 말에 능운비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이 비사궁주라니?
왕천이 어찌 그를 포박한 채 데려왔단 말인가?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강 선생?”
“교주님께서 떠나신 뒤로, 위지혁으로부터 비사궁을 빼앗았습니다.”
“예? 대체 어떻게?”
능운비는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
소선화와 그녀를 따르던 문파의 수뇌들도 마찬가지였다.
강자서가 어떻게 비사궁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아무리 신출귀몰한 재주를 지녔다고 한들 위지혁이 지키고 있는 비사궁을 손에 넣기는 힘들었을 텐데?
“강 선생, 설명이 필요하오.”
“아, 실은 그것이……”
능운비의 물음에 강자서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능운비가 소선화를 만나기 위해 떠나던 시기, 비사궁을 되찾기 위한 공격을 지속하던 소선화는 잠시 병력을 퇴각시켰다.
소선화의 전선에도, 위지혁의 전선에도 휴식기가 생긴 것이다.
“교주님께서 사공녀님을 설득한다고 해도, 사공녀님 휘하 세력에도 확실한 믿음을 주자면 쓸 만한 예물이 있어야겠더군요. 그래야 교주님의 말에 힘이 실릴 테니까요.”
“그래서요?”
“여러 곳을 생각해 보았지요. 비사궁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예물이 될 터지만, 위지혁과 그 휘하의 주력들이 있으니 다른곳을 노려볼까 했는데……”
당연한 말이다. 비사궁을 얻으면 좋겠지만, 위지혁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신녀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저로서는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향이…… 아니, 신녀가요?”
“예. 위지혁의 눈을 돌릴 만한 미끼가 있을지 고민하던 중에, 신녀님께서 먼저 자신이 교주님의 흉내를 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시더군요.”
“예? 향이가 제 흉내를 내겠다고 했다고요?”
“예. 정말 감쪽같더군요. 목소리까지 똑같아서 꽤 놀랐습니다.”
“……”
“그렇게 신녀님께서 전위대와 함께 위지혁이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되는 지역을 공격 했습니다.”
“빼앗겨서는 안 되는 지역이요?”
“예, 바로 그들의 보급선이지요.”
“아!”
“신녀님께서 귀신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이곳저곳을 불태워 주신 덕분에 위지혁의 시선을 돌릴 수 있었고, 주력들이 전부 빠져나간 틈을 타 비사궁을 급습한 뒤 곧바로 이곳으로 온 참입니다.”
“허!”
강자서의 말이 끝났을 때, 능운비는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하긴, 향이가 자신의 모습을 하고 대놓고 공격을 가했다면 위지혁이 참고 있었을 리 없다. 와중에 소선화가 비사궁을 공격하지 않고 있으니 여유도 생겼을 테고.
“강 선생은 정말이지 내 예측을 너무 벗어납니다.”
“아닙니다. 어찌 보면 이번 일은 그저 얻어걸린 것입니다. 만약 신녀님이 아니었다면, 이 같은 계획을 세우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군요.”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전에 들은 향이의 말을 떠올렸다.
신녀 노릇이 힘들어 죽겠다고 하더니만…… 아마 잘됐다 싶었을 것이다.
모두가 일월신교와 교주인 자신을 위함이니 화영이 딱히 말리지도 않았을것이고.
신이 잔뜩 나서 이놈 저놈 목을 따고다녔을 향이를 생각하니, 절로 실소가 머금어졌다.
“그런데 먼저 점령하고 있던 영역은 어찌합니까? 이리 다 끌고 오면 지키는 이가 없을 텐데……”
“교주님, 중요한 것은 땅이 아닌 사람입니다.”
“……”
“다만, 허락 없이 병력을 움직여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강 선생을 나의 좌장으로 여긴 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능동적으로 움직여 줘서 고맙습니다.”
사죄를 청하는 강자서를 향해 능운비가 손사래를 쳤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예?”
“서둘러 비사궁으로 가셔야겠습니다.”
“비사궁?”
“그렇습니다. 지금쯤 위지혁도 비사궁이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계율존과 응보존께서 성화곡의 무인들과 함께 비사궁을 지키고는 있으나, 오래 막지 못할 것입니다. 교주님께서 속히 가셔서 도와야만 합니다.”
“음.”
강자서의 말에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선화를 쳐다봤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할래?”
“예?”
“기껏 빼앗았다는데 다시 넘겨줄 순 없잖아?”
“……”
능운비의 말에, 비사궁주를 살펴보던 소선화는 피식 웃고 말았다.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자신이 별의별 노력을 해도 되찾지 못하고 있었던 비사궁을 이리 쉽게 가져왔다는데…….
“사공녀님, 일단 비사궁으로 가시죠. 그곳에서 협상을 이어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만약 저희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그때는 비사궁을 내어드리고 돌아가겠습니다.”
공손하기만 한 강자서의 말에 소선화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제일 윗자리에 있는 놈은 따르지 않으면 전부 죽여 버리겠다는데, 군사가 분명해 보이는 자는 비사궁을 내어 주겠단다.
누가 들어도 속이 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뻔한 거짓말에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능운비는 자신에게 힘을 보여 주었고, 강자서는 지혜를 보여 준 것이다.
“사형께선 제법 웃기는 놈을 수하로 뒀군요.”
“그래. 능력이 출중한 웃긴 분이지.”
“하긴, 어떤 수하를 거두는가도 능력인셈이죠.”
소선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광풍곡주와 구음문주를 비롯한 자신의 수하들을 쳐다봤다.
더 무엇을 확인한단 말인가?
어차피 세력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버린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능운비의 목을 잘라 들고 위지혁을 찾아간다면, 비굴하게나마 그에게 의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녀도 그녀의 가문도 무사할테지만, 위지혁의 대가 끝날 때까지 수치와 모멸감을 견뎌야 할 것이다.
하지만 능운비를 선택한다면?
새로운 세력인 일월신교의 공신으로 인정받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물론, 능운비가 성공했을 때의 얘기지만.
그렇다면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비굴하게 이어 가느니 목숨 걸고 싸우다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
결심을 굳힌 소선화가 능운비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냅다 무릎을 꿇었다.
“어? 야!”
“절 받으십시오, 주군.”
“가, 갑자기?”
“이 마당에 무엇을 더 고민하겠습니까? 이 시간 이후부터 나 소선화는 사형의 충복임을, 모두의 앞에서 맹세하는 바입니다!”
별안간 충성을 맹세하는 소선화의 모습에 능운비가 어리둥절해하던 그때, 광풍곡주와 구음문주가 조용히 시선을 교환하고는 뒤이어 무릎을 꿇었다.
“삼가 일월신교의 교주님을 배알합니다.”
“아니, 두 분께선 또 왜……”
“일월신교의 교주님을 배알합니다!”
“……”
광풍곡주와 구음문주뿐만이 아니었다.
급작스러운 수뇌부의 결정에 당황하던 무인들이 이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능운비를 향해 외쳤다. 마치 거대한숲이 능운비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것 같았다.
모월, 모일, 모시.
능운비가 등룡제에서 일약 가장 거대한 세력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