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287
“후우.”
능운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았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건 상관없다는 듯 맑고 평온해서 괜스레 야속할 지경이었다.
그 맑은 하늘 아래, 단 한 사람의 죽음을 끝으로 피 튀기던 경쟁이 마무리 되었다.
“와아아아!”
터져 나온 함성이 승자가 된 능운비를 축하했다. 등룡제의 마지막을 알리는 소리였다.
권좌를 놓고 다투어 온 수많은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의 등룡제는 마교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전쟁이었다. 다섯 제자 중에서도 오직 위지혁만이 목숨을 잃었으니까.
능운비가 다시 시선을 내려 그가 자신에게 남긴 용작(龍雀)을 바라보았다.
검신에 새겨진 용과 참새.
하잘것없는 참새가 용과 함께라니, 왠지 자신의 삶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한낱 새에 불과했던 자신이 지금은 용을 꿈꾸고 있으니…….
어쩌면 그 검을 만든 장인은 검에 자신의 꿈을 담았을지도 모른다.
보잘것없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용이 되고자 했던 욕망을.
꾸우욱.
능운비가 용작을 움켜쥐고 높이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
천왕협을 가득 채운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킬 듯이 커졌다.
“왕천!”
“예, 교주님!”
분위기에 휩쓸려서였을까?
능운비의 부름에 왕천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다가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정중히 수습하라. 권좌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다.”
“존명!”
능운비의 명에 왕천이 땅바닥을 구르고 있던 위지혁의 머리를 소중하게 감싸 들었다.
그리고 주승과 운황대가 어느새 벗어 든 피풍의로 그의 몸을 덮어 갈무리했다.
모두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가운데, 여진강만은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리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기실 그라면 강자서의 계책을, 구양휘의 배신을 살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탐욕이 그의 눈을 가려 버렸다. 욕심에 눈이 멀어 뻔히 보이는 것조차 보지 못한 것이다.
일찍이 수많은 이가 그랬다.
저 중원에 있는 자들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나, 제 앞에 놓인 떡에서 눈을 떼지 못해 잘못을 묵인하다 못해 그 뒤를 쫓았을 것이다.
똥묻은 놈들과 같아지려 제 몸을 진흙투성이로 만드는 것을 당연히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능운비는, 자신이 옳다 믿는 것들을 위해 그들과 싸워 이길 참이었다.
하나 고작 한 걸음을 나아갔을 뿐이었다.
아직은 자신의 힘이 미약하고 보잘것없었다. 용을 꿈꾸고 있으나, 아직은 하늘이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가야 한다.
능운비의 시선이 멀리 천왕협의 끝자락에 어렴풋이 보이는 마교의 본성을 향했다.
하늘.
그곳에 가야 한다.
세상의 모든 하늘을 지배하는 단 한사람.
광천탑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담운천에게 당당히 맞서 걸어야 한다.
물론 그 길은 몹시 고될 것이다.
그가 들어 올린 깃발은 그의 후계자를 자처해 마교의 교주직을 승계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와 그 이전의 마교가 쌓아 올린 것들을 부수기 위함이었으니까.
“화영!”
“예, 교주님!”
능운비의 부름에 화영이 왕천과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여진강을 구금하라.”
“예?”
화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반문하며 능운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어찌 후환을 남겨 두려 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혜심정의 핏줄이다.”
“하지만……”
“안다. 그들이 성화의 뜻을 저버렸다는 것을.”
“……”
“하나 버려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마교다. 또한 이 마교에서 가장 지모가 뛰어난 자들이다.”
“교주님, 그들은 결코 교주님을 용인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다. 비로소.”
“예?”
그 순간 능운비는, 어쩌면 담운천이 지금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산맥이 되어서, 어디 한번 멋지게 아울러 보거라.
-천하(天下)를. 나도, 내 선대도 이루지 못한 일통의 꿈을 꾸는 것이다.
그래, 산맥이 되어야 한다.
과거에 지었던 잘못을 징치(懲治)함은 당연한 일이나, 그렇다고 그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다.
산이 아닌 산맥이 되기 위해서.
“여진강이 나의 손에 있는 이상 혜심정은 절대로 나와의 만남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압니다. 하나……”
“강자서는 뛰어난 군사다. 능히 일월신교의 혜안존자가 되어 천하를 경영할 재목이다.”
능운비의 말에 화영이 강자서를 쳐다보았다.
“하나, 마음껏 부릴 만한 손발이 부족하다.”
“음…….”
“나는 그가 뜻을 펼칠 손발을 달아주고자 함이다.”
화영은 더 이상 반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어진 얼굴은 도무지 펴질 줄을 몰랐다.
“군사.”
“예, 교주님.”
능운비의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은 다른 이들과 달리, 강자서는 허리만을 숙였다.
“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뜻이 저들에게 닿도록 작은 손안에 움켜쥘 자신이 있는가?”
능운비는 강자서에게 혜심정을 안으라 하고 있었다.
인정받지 못했던 일개 학사가 마도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른다는 생각에 강자서의 마음이 흥분으로 들끓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혜심정을 제 아래 두겠습니다!”
“좋다. 그럼 되었다.”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화영을 바라보았다.
“화영, 그럼 되지 않겠는가? 혜안존자의 아래에서 일월신교를 위해 봉사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징치되지 않겠는가?”
거듭된 설득에 화영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교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기어코 제 뜻을 관철한 능운비가 환하게 웃으며 화영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휘!”
“……?”
“언제까지 나를 내려다볼 참이냐?”
“예?”
“보지 못하였느냐? 나는 지금 등룡제의 승자로 이곳에 서 있다.”
능운비의 말에 구양휘는 툭 터져 나온 한숨을 참지 못했다.
내려오라는 말을 저리 한다.
내가 이제 주인이 되었으니, 자신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라는 말을…….
“쳇.”
얼굴을 잔뜩 찌푸렸던 구양휘가 이내 절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쿵!
육중한 그의 체구가 바닥에 울림을 만들자, 모두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그를 친동생처럼 여겨 온 소선화가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축하해, 한편이 된 거.”
“놔요. 누이한텐 아직 화가 안 풀렸거든?”
“자식이 앙탈은.”
“거참, 놓으라구요. 싫다니까 자꾸 그러네.”
“이게 죽을라고!”
주먹을 치켜 든 소선화를 뿌리친 구양휘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보폭도 커서 금세 능운비의 앞까지 도달했다.
“사형.”
“말해.”
“차는 언제 드실 거요?”
“응?”
“전에 그 차보다 맛이 좋은 걸 구해와서……”
그 말에 능운비가 히죽 웃음을 머금었다.
충성을 맹세한다는 말을 저리밖에 못한다.
“차는 조금만 있다 마시자꾸나.”
“예.”
구양휘를 물려 낸 능운비가 애통함을 금치 못한 채 무릎을 꿇은 위지혁의 수하들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그대를 주군으로 모실 수 없소!”
위지혁 아래 장로의 이름을 가졌던 무인들이 원독에 찬 눈빛을 번뜩이며 외쳤다.
“죽이시오. 주군과 함께 갈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죽이시오!”
무릎을 꿇었으나 목은 빳빳하게 세운 채 능운비를 노려보는 그들.
절대로 충성하지 않겠다는 뜻을 저리 내보인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만 보던 능운비가 위지혁이 남긴 용작을 그들의 앞에 휙 하니 던졌다.
쩔거럭.
위지혁이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짐만큼이나 묵직한 소리가 났다.
“위지혁과 약속했다. 너희를 살려 주기로.”
“그건 주군의 뜻이었을 뿐이오. 또한, 이미 주군을 섬기며 교주를 버린 사람들이오. 한데 어찌 그대를 주인으로 섬기겠소?”
완강하게 버티는 그들의 말에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능운비가 이내 담담하고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죽어라.”
“……?”
“하나 명심하라. 그 용작에 너희의 피가 스민다면, 너희를 살리고자 했던 위지혁이 편히 눈감을 수 없다는 것을.”
능운비의 말에 눈동자가 떨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뻣뻣했던 고개마저 숙어져 바닥을 향했다.
“그대들에게 감사하며 자신의 마지막을 받아들인 위지혁의 명은 하나였다. 나를 따르라는 것.”
“……”
“하니 따라라. 나를 따르란 말은 하지 않겠다. 너희의 주인이 남긴 유명(遺命)을 따라라.”
능운비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자, 엎드린 이들이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본성으로 간다. 언젠가 권좌에 앉을 것이다. 또한 육가를 부수고, 원로원을 부술 것이다.”
“……”
“하지만 보았듯, 그들이 허락한다면 모두 보듬어 안을 것이다.”
“……”
“하니 지켜보라. 위지혁의 유명을 지키며 내 곁에서 함께 걸어라. 다만 내 길이 옳지 않다고 여겨지면, 언제든 도전하라. 나를 설득하고 나를 죽일 수 있다면 권좌는 그대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능운비는 걸어 나갔다.
자신을 죽이라.
어쩌면 그 또한 담운천과 같은 마음인지도 몰랐다. 그가 어째서 자신을 죽이려 찾아온 성화곡의 암살자 향이를 옆에 두었는지, 이제는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았다.
능운비의 거침없는 발길에, 그 앞을 막고 있던 위지혁의 수하들이 주춤거리며 좌우로 물러났다.
천왕협 안에 생겨난 인협(人峽).
능운비는 당당히 걸었고, 그 뒤를 성화곡의 무인들을 필두로 함께 달려온 모두가 따랐다.
그렇게 능운비의 세력이 본성을 향해 나아갈 때.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던 위지혁의 호위장 황득이 용작을 움켜쥐었다.
“뭣들 하는가?”
“……?”
“언제까지 이곳에서 추하게 울고 있을 참인가?”
“……”
“나는 주군께서 남긴 용작을 그에게 다시 돌려주겠다. 또한, 주군을 넘어선 그가 반드시 권좌를 얻도록 도울 것이다. 설사 신혈가와 척을 지게 된다 해도, 나는 그것이 주군의 유명을 지키는 도리라 여긴다.”
“대호법.”
“그리 부르지 말라. 이제는 그저 일월신교의 무인 황득이니.”
벌떡 일어난 황득이 위지혁의 뜻이 담겨 있는 검, 용작을 전하려 황급히 능운비의 뒤를 쫓았다.
차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하나둘 울음을 멈추었다.
“가세들…… 주군의 죽음을 헛되이 여겨서는 아니 될 일이니.”
한명, 그리고 또한명.
황득을 따라 줄줄이 일어난 사람들이 거대한 행렬을 뒤쫓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천왕협에 남은 이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능운비의 걸음을 뒤쫓아 가는 거대한 인파가 본성을 향해 밀어닥치는 것만 같았다.
* * *
“드디어 오는군.”
마교 본성의 높디높은 성곽 위, 담운천이 천왕협을 지나 파도처럼 밀려오는 인파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선아.”
“예, 주군.”
“대단하지 않으냐?”
“……”
“저리 많은 인파는 처음 보는구나.”
담운천의 흡족한 미소에 양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말대로 처음이다. 한때의 담운천이 본성을 찾아왔을 때, 그의 곁에 있던 것은 오직 자신과 지금의 장로들, 그리고 몇 되지 않는 무인들 뿐이었으니까.
제자 하나의 세력에도 미치지 못한 규모였다.
그는 전부 부숴 버렸으니까.
자신의 앞길을 막은 모든 것들을…….
하지만 은위가 알려 온 말에 따르면 능운비는 모두를 끌어 안았다.
소선화도 구양휘도.
죽은 것은 위지혁 한 사람뿐이었다.
극명히 다른 두 사람의 행보.
“괜찮으시 겠습니까?”
“무엇이 말이냐?”
“예상했던 일이고, 바라 왔던 일이지만…… 그는 일월신교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나도 보인다. 늠름하구나.”
“주군…….”
“선아.”
“예.”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다. 굳이 썩어 빠진 부대를 넘겨주어 무엇할까? 어떤 이름을 가지든 마도는 여전히 마도가 아니더냐? 아니, 되레 정통성마저 확고하니 그것으로 족하다.”
“주군…….”
“선아, 가서 술이나 한잔 청해 보거라. 먼 길 오느라 고단하였을 일월신교의 교주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