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316
능운비는 좌정을 하고 눈을 감았다.
“운기해 보거라.”
“예.”
녹림왕의 지시에 따라 능운비가 패왕수라결을 운용했다.
단전에서 시작된 기운이 구결에 따라 증폭되어 천천히 움직였다.
당가의 치료를 받고 있으나 아직 내상이 완벽히 치료되지 않았기에 따끔거림이 느껴졌지만, 능운비는 이를 악물고 견디며 기운을 돌렸다.
기존이라면 회음을 거쳐 미려에 닫는 순간부터 증폭된 기운이 급류처럼치고 올라 일주천을 할 것이다.
하지만.
“큭!”
흐르던 기운이 명문에서 막혔다.
자고로 혈이란 기운이 흐르는 통로다. 하지만 부서진 길을 어찌 전력으로 달릴 수 있을까?
마차 바퀴가 갈라진 틈에 끼어 헛돌듯, 독에 상한 혈 자리가 세차게 내달리려는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찢어질듯한 고통을 호소했다.
턱.
하지만 그 순간 종리강의 손이 능운비의 허리에 닿았다.
“그대로 운기해 나가거라. 길은 내가 고쳐 줄 것이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몸 안으로 스민 기운이 명문혈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어, 어르신!”
“이놈! 운기 중에 말을 하는 것은 금기임을 모른단 말이냐!”
“……”
“부서진 길은 내가 보수할 것이다. 너는 속히 기운이 나아가도록 하거라!”
그 말처럼, 이내 종리강의 기운이 부서진 관도를 보수하는 일꾼처럼 명문혈을 탄탄히 떠 받쳤다. 그뿐 아니라 뜨거운 열기를 피워 올려 혈에 머물러 있던 독성을 태우기 시작했다.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능운비가 아닌 종리강에게.
타인의 기운을 유도하는 것만으로도 진기가 상할 수 있음인데, 열기를 만들어 독을 태우다니? 자칫 종리강의 내력이 상할 수도 있었다.
하나 능운비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홀로 운기를 시작했다면 모를까, 종리강의 힘이 합쳐져 버린 이상 일주천을 끝내기 전에 운기를 멈추었다가는 둘다 심각한 내상을 입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놈! 뭘 하고 있는 게야! 고작 날 걱정할 정도의 각오로 이 무림을 바꿔보겠다 한 것이냐! 서둘러라! 나는 받쳐 줄 터이니 너는 내달리는 것이다! 어서!”
종리강의 호통에 능운비는 어쩔 수없이 진기를 유도했다.
쿠르르르.
길이 생기자 정체되었던 진기가 혈맥을 타고 급류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능운비의 기운이 명문을 지나자, 종리강의 기운이 그보다 빠르게 내달려 척중을 보수했다.
퍽! 퍽퍽!
당가의 의원들이 침과 약으로 내내 돌보았으나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혈이 순차적으로 뚫려 나가기 시작했다.
독이 태워지고, 부서졌던 혈 자리가 점점 더 탄탄해졌다. 독맥을 넘어 임맥으로 향하니, 기운이 흐르는 속도가 쏟아지는 폭포처럼 빨라지며 그 힘이 더더욱 증폭되었다.
콰아아아아!
보(保)하는 종리강의 몸에 핏발이 돋아 오르고, 땀이 온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덕분에 능운비는 무사히 일주천을 마쳤다.
이걸로 충분했다. 혈을 뚫었으니, 앞으로 조금만 더 운기에 매진하면 몸 상태가 나아질 것이다.
이제 멈추어야 했다. 종리강은 이미 많은 진기를 소모했을 것이다. 너무 무리하면…….
그런데 능운비가 단전으로 되돌아온 기운을 갈무리하려는 순간, 진기가 통제력을 잃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리강이 단전에 갈무리된 기운을 다시금 돌려 버린 것이다.
이런 미친!
능운비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나, 진기를 유도하는 종리강에게는 너무나 무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종리강의 손이 아직 명문혈에 닿아 있었고, 그의 진기 또한 끊어지지 않았다.
콰아아아!
더하여 패왕수라결은 체내의 내기를 일시적으로 증폭시켜 주는 힘을 가졌다.
일주천을 마치며 거대해진 기운은 더욱 거대해져 독맥으로 내달렸다. 막을 새도 없이 회음을 지나가 버렸으니, 계속 달리도록 두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처음보다 고통이 크지 않았다. 이미 종리강으로 인해 혈맥에 머무르던 독성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데 독을 태워 버렸던 종리강의 기운이 이번에는 부서진 혈 자리를 고치기 시작했다. 조각난 것을 이어 붙이는 아교처럼 혈 자리르 보수하며, 능운비의 몸 안에 아로새겨지듯 스며들었다.
종리 어른!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러다 죽는단 말입니다!
그리 외치고 싶었으나 외칠 수 없고, 멈추고 싶었으나 멈추지도 못한 채 능운비는 종리강의 손에 이끌려 계속해서 운기를 해야 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그의 운기는 진기가 무려 열두 바퀴를 돌아 제자리를 찾아올 때까지 이어졌다.
종리강은 점점 더 지쳐 갔고, 능운비는 예전의 기력을 회복해 나갔다.
물론 그사이 철갑차는 멈추어 있었고, 당가는 계속되는 공격을 사력을 다해 막아야 했다.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올 때까지…….
* * *
강을 넘는다는 것은 단순하다. 배가있으면 된다.
혹 그도 안 되면, 물길이 얕고 폭이좁은 곳을 찾아 헤엄쳐 건너면 된다.
하지만 능운비를 위해 준비된 배가 있을 리 없었다. 사천에서 출발해 하남성으로 향하고 있는 능운비와 당가를 대비해, 정무맹이 각지에서 배를 모조리 장악해 버렸으니까.
남은 것은 고작 어선 몇 척이 전부였고, 강이 좁아지는 곳마다 정무맹 예하의 무인들이 강변을 빼곡하게 지키고 있었다.
“큭큭, 간교한 놈들…… 기어코 너를 이 철갑차에서 끌어내야 속이 시원했던 모양이구나.”
종리강의 말에 능운비가 강 건너를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전부 그들의 손에 있는 이상 철갑차를 타고 강을 건널 방법 따위는 없다. 만약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철갑차를 버리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야 했을 것이다.
정무맹의 공격이 능운비에게 집중될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길이다.
너무 멀리 왔다. 강을 넘으면 호남이 코앞 아니던가?
하지만 능운비는 강 너머 적들에게서 눈을 떼고 착잡한 표정으로 종리강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이냐?”
“……”
태연히 답하며 웃는 종리강의 모습에, 능운비의 얼굴에 또다시 미안함이 가득해졌다.
“또 그런 표정이구나. 네겐 어울리지 않는다.”
“종리 어르신.”
“어허! 사내놈이 어찌 감정 따위에 휘둘린단 말이냐? 그래서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종리강이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능운비의 마음은 천근 거석이 짓누르고 있는 듯 무겁기만했다.
하루 반의 운기.
그 사이 능운비는 당장이라도 적들과 싸울 수 있을 만큼 몸을 회복했다.
철갑차는 지나가지 못하더라도, 그 스스로는 달마가 선보인 일위도강(一葦渡江)의 전설을 재현해 낼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종리강이었다.
홍안은 거무죽죽해졌고, 팽팽하던 피부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마치 한순간에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온 사람 같았다.
능운비의 몸을 고치기 위해 운기를 도우며 소모해 버린 내력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 쌓아 온 내력도 모자라 자신의 원기까지 희생해 강제로 능운비의 몸을 고쳐 놓았다.
지금의 모습은 바로 그 선택의 대가였다.
“운비야.”
“예, 어르신.”
자신을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능운비가 공손히 답했다.
“오래전, 내가 너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예?”
종리강의 말에 능운비는 과거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을렸다.
-만약 자네가 가는 길을 옳다고 믿는다면, 자네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가치에 부합하다 여긴다면 그저 그대로 나아가게.
“기억납니다.”
“그래, 나는 평생을 그리 살았다. 남들이 뭐라 하건 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않았다.”
“……”
“한데 그 말이, 정작 내게는 해당되지 않더구나.”
“예?”
“나는 결국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
“나만은 그리 살았으나, 다른 아이들은 아니었다. 나는 능히 도망하였으나, 십팔채에 남아 있던 아이들은 옥살이를 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게 되었다.”
“……”
“나는 도망쳤을 뿐, 그들을 도울 만한 힘은 없었다.”
종리강의 목소리에 회한이 가득했다.
“해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하였다. 한데 너무 늦은 결심인지, 이젠 비만 오면 무릎이 쑤시고 찬 바람 불면 삭신이 결린다.”
“……”
“하여 나는 네게 모든 것을 걸어 보려 한다.”
종리강이 능운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운비야.”
“예.”
“나의 내력을 태워 너의 몸을 회복시킨 것은 나의, 그리고 녹림의 속죄다.”
“속죄……라니요?”
“네가 떠난 이후, 쫓겨 다니며 청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언제까지 이리 살 것인가? 결국은 나도, 내 후대도 그 후대에 그저 산적이라는 미래만을 남겨 줄 터인데…….늘 지탄만 받는 삶을 넘겨주고 싶지는 않았음이다.”
종리강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 갔다.
“누군가는 끊어 내어야지.”
“……”
“비록 없이 태어나 없이 살다가 삶에 지쳐 산적이 된 놈들이지만, 제 놈들이라고 어디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까?”
“……”
“너를 돕고자 한 마음에 그런 속죄가 담겼음이다. 물론 내 죄로 인해 피해본 자들에겐 턱도 없이 작은 속죄일 것이나, 그것이 너를 거쳐 전달되어 우리의 죄를 조금이나마 용서받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너로 인해 우리 녹림이 떳떳하게 세상에 드러나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비로소 능운비는 종리강의 뜻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녹림을 바꾸어달라 말하고 있었다.
무인 된 자에게 목숨과도 다름없는 평생의 내력을 전부 희생하며…….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전처럼 살아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여전히 녹림왕이고,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절대의 길을 걸어온 무인 중 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저 이대로 살다 죽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미안하다.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언젠가 너로 인해 내가 꿈꾸어 온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
“녹림이 더는 손가락질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변화시킬 수 있는 놈이라 여겼다.”
미안함이 가득한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도운 것이다.
언젠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서…….
“허허, 괜스레 너에게 짐만 지웠구나.”
종리강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는 자신이 그의 청에 화답할 차례였다.
“어르신.”
“……”
“어르신의 속죄를 마음에 품겠습니다.”
“……!”
“하지만 녹림이 저질러 온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어르신의 뜻대로 녹림이 달라지고자 한다면 그 후대가 더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지 않도록 만들겠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할지라도.”
능운비의 약속에 주름져 버린 종리강의 노안에 물기가 차올랐다.
서로가 필요한 것을 주고받은 거래가 아니라, 능운비의 진심이 담긴 약속.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만 끝끝내 흘리지 않고 머금어 삼킨 것은 그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그만 가거라. 청주 그놈이 네가 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
“부디 보중하십시오.”
능운비가 종리강을 향해 절을 올리고 일어났다.
“교주, 전부가 돕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한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당천익의 말에, 별도로 선발된 당가의 무인들이 능운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암기, 독, 진법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무인들.
당가에서도 고르고 골라 선발한 최정예들이었다.
함께 강을 건널 수 있는 것은 그들뿐일 것이다. 정무맹의 눈을 피해야 하는만큼, 막청주가 자신을 위해 준비했다는 배는 그리 크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