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335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법이다.
만약 정영회의 뜻이 옳았다면, 그 뜻이 등불처럼 천하를 밝히고 있었다면 사람들은 능운비와 일월신교의 정벌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잇속만을 챙기기에 바빴고, 대의는 퇴색되어 인망을 잃었으니 무너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더욱이 해공공과 결탁해 무림을 팔아 치우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온 무림이 들끓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던 명가들은 결국 이옥상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황제가 칙령을 내려, 무림과 결탁해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색출하느라 관에서도 피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작은 이야기 일 뿐이었다.
시대 속에서 벌어진 아주 작은 이야기 중 하나.
장강이 그러하듯, 물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또 어떤 사건이 생길 테고, 또 어떤 이가 세상을 어지럽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향로에 꽂힌 향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쪼르륵.
능운비는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는 나란히 놓인 위패 앞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윤안로, 신예랑, 김산…….
그리고 그가 기억하던 많은 이름.
홀로 위패가 놓인 단상 앞에 앉은 능운비가 위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삼십 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긴세월 동안 음지에서 노력해 왔던 그들을 비로소 추모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살수의 이름으로 죽었고, 또 누군가는 세상을 어지럽힌 악당의 이름으로 죽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그들의 기록은 전부 고쳐 쓰일 것이다.
“끝났네요. 모두.”
모든 것을 이루었음에도 어딘가 공허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이루었으나, 무엇을 이루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살아서 보았으면 기뻐하기라도 했을텐데, 살아있는자는 오직 자신뿐이다.
아니, 자신도 아니다. 그는 이제 척월린이 아닌 능운비였으니까.
“훔, 그 사람 이름은 없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능운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향이였다.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을 내렸는데…….
하긴, 누가 그녀를 막을 수 있을까?
아마 들어오는 것을 보지도 못했을것이 틀림없다.
“척월린이었지?”
“응.”
“왜 만들지 않았어?”
“그건……”
“본인이라서?”
“……음.”
“걱정 마. 그 사실을 아는 건 이제 나뿐이니까.”
그건 맞는 말이었다.
자신이 척월린이었다는 사실을 아는이는 오직 향이만 남았다.
다 죽었으니까.
그리고 살아남은 한 사람은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니까.
“환생인 거지?”
“어째 별로 놀랍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제 와서 놀랍긴? 불도 막 저절로 타오르고 그랬는데.”
“큭!”
향이의 말에 능운비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부분은 자신도 신기하다.
오랫동안 꺼져 있다가 자신의 손길이 닿자 갑자기 타올랐던 성화.
“환생에, 성화의 선택까지. 정말이지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인간이라니까. 하긴, 이제 인간의 범주로 규정하기도 힘들긴 하지.”
“……”
“너보고 무신이라더라. 어떤 놈은 마제라고 하기도 하고.”
세상의 평이란 게 그렇다.
언제나 뭔가에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그래야 팔리는 이야기가 되니까.
“그런데 어쩐 일이냐?”
“어쩐 일은? 아무도 안 놀아 주니까왔지.”
향이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투덜거렸다.
“젠장, 망할 노인네들…… 그렇게 쏙 내빼 버릴 줄이야.”
향이가 말하는 노인네들이란 막청주와 종리강이었다.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흩어진 세력을 다시 끌어모으고, 무너진 기반도 새롭게 세워야 하니까.
어찌 보면 이번 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두 세력이 아니던가?
아마 지금 속 편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와 능운비뿐일 것이다.
다른 이들은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제갈천우가 잡히면서,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과거를 청산해야 했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시대에 대비해야만 했다.
물론, 활짝 열린 기회의 문에 또 다른 꿈을 꾸며 다가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비어 버린 자리들을 선점하기 위해서…….
“참! 언제 오신대?”
“누가?”
“누구겠어요? 원로원주님이지.”
“글쎄, 떠난 지 꽤 되셨다고 했으니 곧 오시지 않겠냐?”
“쳇.”
향이가 탐탁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오시면 안돼?”
“안돼.”
“……?”
“할머니께서 날 단단히 벼르고 계시거든.”
“아!”
듣긴 했다.
본성을 지키고 있어야 할 계율존자가 원로원주를 따라온다고.
향이를 잡으러 오는 것이다. 그녀가 또 성화곡을 비울까봐.
하긴, 계율존자가 아니면 향이를 통제할 사람도 없긴 하다.
“교주.”
“응?”
“이제 뭐 할 거야?”
“뭘 하다니?”
“할 일은 다 했잖아?”
“……”
“뭐, 다들 생각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천하 평정도 끝났고.”
그 말에 능운비는 기가 찬다는 듯 웃어 버렸다.
“평정? 큭큭, 이게 천하를 평정한 사람의 모습이냐?”
“하지만 처음부터 이럴 작정 아니었어?”
“……”
“마도 정벌이니 뭐니, 말만 그렇지. 애초에 제갈천우 그놈 잡는 게 목표였잖아.”
“뭐, 그건 그렇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향이는 속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정체가 척월린이라는 사실도, 제갈천우에 대한 묵은 원한도 대충아니까.
“글쎄, 뭘 할까?”
“아직 정하지 않은 거야?”
“응.”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향이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나랑 같이 유람이나 다닐까?”
“유람?”
“어. 들어 보니까 지역마다 이름난 명주가 많더라고. 초백, 전창, 창포, 계화, 국화…… 하여간 진짜 많아.”
해맑게 웃으며 술 이름들을 늘어놓는 향이의 모습에 능운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들 변해도 이놈은 변하지 않을 것같다.
“술주정뱅이 같으니……”
“주정뱅이가 아니라 애주가거든?”
“넌 죽을 때까지 마시잖아.”
“술은 원래 그렇게 먹어야 제맛이야. 취하지 않으려면 대체 그걸 왜 마셔?”
발끈하는 향이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능운비가 타이르듯 말했다.
“향아.”
“왜?”
“나 교주야.”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어?”
“……”
“그리고 안 바쁜 거 다 알아. 지금 교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 교주님이시거든.”
“한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신경 써야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미 전부 전결(專決) 처리 해 뒀다고 하던데?”
“그야…… 좀 더 빠른 일 처리를 위해서?”
“거짓말하지 마. 내가 보기에 신교는 교주가 없어도 잘만 돌아가. 괜히 끼어들면 오히려 방해만 될걸?”
“어허! 일월신교 십오 대 교주를 뭘로 보고!”
짐짓 위엄 넘치게 말했건만 향이는 콧방귀를 끼며 웃을 뿐이었다.
이 자식이…….
하여간 신녀라는 놈이 품위가 없다.
품위가.
“너, 계율존자 때문에 그러는 거지?”
“응? 할머니가 왜?”
아닌 척하지만 딱 걸렸다.
“내가 천하 유람 간다면서 널 데려가면 계율존자가 아무 말도 안 할 줄 알고 그러는 거잖아.”
“아니야. 당최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시선을 회피하는 것을 보니 정답이 분명하다.
능운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자, 향이가 본격적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유람이나 가자. 창설식 따윌 봐서 뭘 해? 안 그래?”
“원로원…… 아니 스승님까지 모신 자리라니까?”
“안 보면 죽냐? 그 인간 안 죽어. 내가 보기엔 이백 살까지도 살겠더라.”
입을 삐죽거리며 불평하는 그 모습에 능운비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이 녀석은…….
아무리 신녀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교의 신분 체계를 이토록 무시할 수가 있단 말인가?
교주인 자신에게도 걸핏하면 반말을 뱉질 않나, 아주 천방지축이 따로 없다.
이참에 교육을 좀 해야 하나?
어차피 이젠 예전과 달리 싸우면 자신이 이기지 않던가.
“가자, 응?”
“……”
“천하 유람 가자. 나랑 같이. 응?”
“거참! 보채지 마! 나도 고민 좀 하자, 응?”
“응!”
능운비가 째려보자 향이가 웃으면서 소매를 놓았다.
망할 술주정뱅이 같으니라고.
나이도 적지 않은데 떼쓰는 꼴이 애가 따로 없다.
신녀씩이나 돼서 성화곡으로 안 돌아가려고 교주를 이용해 먹으려 하지를 않나, 쯧쯧.
속으로 혀를 차는 능운비였지만, 사실 향이의 말대로 특별히 할 게 없긴했다.
또 생각해 보면, 창설식을 끝내고 나면 본성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자리는 그곳이니까.
하지만…… 싫었다.
권좌라는 자리부터가 자신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윗자리도 앉아 본 놈들이나 앉는 거지, 평생을 살수로 살아온 자신이 내내 의자에 앉아서 배겨낼 도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딱히 할 일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평생을 쫓기듯이 살아왔기에 무얼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오직 복수하나만 보고 달려온 삶이 아니던가.
차라리 큰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좋겠는데, 중원도 일월신교도 평온을 되찾았다. 자잘한 싸움이야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는 법이지만, 교주씩이나 되서 나설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증원 무림계를 개혁하자니, 이미 그들에게 맡겨 둔지라 이제와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물며 천하 각지에 창설되는 일월신교의 지부에도 이미 능력 있는 자가 배치되었다.
신공과 그의 제자 윤창, 그리고 신혈가까지 발 벗고 나섰으니…….
“하아, 생각해 보니 진짜로 할 일이 없네.”
이럴 줄 알았으면 취미라도 하나 만들어 둘걸.
이리되면 향이의 말처럼 속 편하게 천하 유람이나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능운비가 향이를 슬쩍 쳐다보았다.
자신이 고민하는 사이에…….
“향아.”
“응?”
“그거 제주(祭 酒: 제사에 쓰는 술)야.”
“……아, 다 끝난 거 아니었어? 난 그냥 음복이라도 할까 해서. 헤헤.”
위패 앞에 놓아둔 술병을 탐내던 향이가 움찔하며 웃었다.
“곱게 내려놔라. 말로 할때.”
“……응.”
능운비의 웃음기 어린 위협에 향이가 아쉬운 얼굴로 술병을 내려놓았다.
하여간 틈을 줄 수가 없는 녀석이다.
“그래도 한 잔 정돈 괜찮지 않겠어?”
“안돼.”
“향이 좋은데?”
“안 된다고 했지? 먹으려면 나가서 사먹어.”
“이씨, 맛있어 뵈는데.”
향이와 능운비가 술병을 놓고 실랑이를 하던 그때.
“교주님!”
주승이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뛰어 들어왔다.
“오, 운황대주가 어쩐 일인가?”
“큰일 났습니다!”
“큰일?”
그러고 보니 표정이 무척이나 다급했다.
그럴 만한 일이 없는데…….
혹시?
“제갈천우가 탈출한 거냐?”
“예?”
“아냐?”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긴, 이젠 앞을 볼 수도 없을뿐더러 사지를 잘라 놓았기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이거늘.
“그럼 무슨 일이야?”
“북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북해?”
“예! 일전에 교주님께서 살펴보라 하셨던지라.”
그랬다.
당가주에겐 남만을, 본성에는 북해쪽 움직임을 면밀하게 살펴 달라고 했었다.
“그럼?”
“세작들의 보고에 의하면 북해가 중원을 침탈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뭐?”
“보고를 받으신 원로원주께서 급히 본성으로 말머리를 돌리셨습니다. 또한 이소식을 들은 중원의 수뇌들이…….”
주승의 말에 능운비가 눈을 크게 뜨고 향이를 쳐다봤다.
그녀의 입가엔 이미 웃음이 가득했다.
굳이 대화가 필요할까?
이심전심 (以心傳心)이다.
“향아.”
“가시죠, 교주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이었다.
물론 그 또한 언젠가 끝이 있을 테지만.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