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44
서른두 명의 신상 정보가 위조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닷새였다.
각기 다섯 개의 신분. 합치면 백오십개도 넘는다.
……이걸 닷새 만에 만들었어?
그들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왕천과 주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
신예랑의 말에 두 사람은 대답도 못하고 그저 눈만 끔벅거렸다.
되다 못해 차고 넘친다. 매해 신분을 바꾸어도 중원에 머무는 동안은 충분히 버티겠다.
그들을 바라보는 능운비는 뿌듯하기만했다.
봤냐? 이들의 실력이 이 정도다.
“챙겨.”
“예.”
주승과 왕천이 놀란 와중에도 냉큼 준비된 것들을 받아 챙겼다.
꽤 많은 추가금까지 안겨 주었지만, 금의환향해서 만난 친구들에게 그 정돈 아깝지 않았다.
걱정되는 것은 김산과 신예랑의 상태다.
신분 패가 담긴 주머니를 건네는 김산의 손은 발발 떨렸고, 신상 내력이 적힌 종이 뭉치를 건네는 신예랑의 눈아래엔 검은빛이 선명했다.
아무래도 닷새 동안 꼬박 밤을 새운 모양이다.
이젠 나이도 적잖은데…….
괜스레 친구들을 고생시킨 듯하여 미안해진 능운비가 품에서 전낭 하나를 더 꺼냈다.
“몸조리들 잘하시게.”
“예? 또 주시는겁니까?”
“일을 잘해 줘서.”
“예? 하지만 너무 많은……”
“자네들이 좋은 지인을 두었었다 여기게.”
“……”
능운비는 추가로 전낭을 건네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웠던 친구들을 생각하는 마음이야 오죽할까만, 능운비의 마음을 알 길없는 왕천은 고깝기만 했다.
능력이야 대단하긴 하지만 돈을 어찌 저리 물 쓰듯 한단 말인가?
아무리 마적한테 뺏은 재물이라도 교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선 한 푼이 아쉬운 판에…….
저게 다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서 그렇다.
모르면 가르쳐야지! 그게 호위장이지!
“주군! 필요 이상으로 많습니다. 저희도 상황이 여의치 않은데……”
“어허!”
왕천이 살림꾼이라도 되는 양 나무랐지만, 능운비가 호랑이 눈을 뜨고 노려보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러났다.
닥쳐라. 니가 내 적적한 마음을 어찌안단 말이냐?
이리 떠나면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는데…….
가다가 돈이 떨어지면 산채나 수채하나 털어 먹으면 그만이다. 턱없이 부족한 공작금 때문에 쪼들리던 시절에는 꽤 익숙한 일이기도 했고.
“그럼 이걸로 거래는 끝났군요. 부디 살펴 가십시오, 삼공자님.”
“다시 보지 말자는 말처럼 들리는군.”
떠나는 일행에게 고개를 숙이는 신예랑의 인사가 못내 섭섭했던 능운비가 입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렸다.
“또 보아 좋을 사이는 아니 니까요.”
“……하긴.”
속마음을 내보일 수 없는 능운비는 그 말조차 섭섭하기만 했다.
“그래, 이제 어디로 갈 참인가?”
“……”
물어도 답해 줄 리는 없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그리 묻자, 번쩍 고개를 들고 능운비를 빤히 쳐다보던 신예랑이 이내 빙긋이 웃었다.
“말해 드려도 못 찾을 곳으로요.”
“큭, 큭큭큭”
괜히 웃음이 나왔다.
과거와의 첫 조우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인사를 마친 그들은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능운비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부디……”
하지만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살아남으라고, 자신처럼은 죽지 말라 말하고 당부하고 싶었지만, 이미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진 뒤였다.
또한, 묻지 못했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십 년 전이라……”
“……?”
왕천과 주승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들로선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뭐, 알게 되겠지.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을 것이고.
그때는 반드시 밝히리라.
자신에게 일어난 기사(奇事)를 믿어줄진 모르겠지만.
먼 훗날을 기약하며 미소 지은 능운비가 말에 올랐다.
“주승!”
“예, 주군.”
“삭월대와 합류해 이곳에서 서쪽으로 백여 리 떨어진 취령산에서 만나자. 각자의 위장 신분을 숙지하고, 곧장 주천으로 향할 것이다.”
“예!”
능운비의 명에 답한 주승이 말 머리를 돌려 삭월대가 머무는 마을 밖으로 향했다.
“왕천, 우리도 그만 가자.”
“그러시죠.”
느긋하게 말을 몰아 관도를 나서던 중 왕천이 뭐가 그리 궁금한지 쪼르르 다가와서는 물었다.
“주구.”
“응?”
“그런데…… 대체 그들은 누굽니까? 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보이던데.”
“……”
“아니, 대체 저런 자들은 어찌 알고 계시는 거냐구요. 닷새 만에 백오십 개가 넘는 위장 신분을 감쪽같이 만들어내는 이들이라니요? 저런 건 삼장로부 애들을 갈아 넣어도 힘들단 말입니다.”
“……”
“아니지, 그러고 보니 이상했어. 혹시…….”
왕천의 눈매가 게슴츠레해졌다.
눈빛에 의심이 가득하다.
설마? 자신과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는건가?
이놈이 그걸 캐기 시작하면 자홍과 여도가 귀찮아질 수도 있는 일인데…….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고 싶었던 능운비가 근처에서 비럭질을 하던 거지를 발견하고 전낭을 꺼냈다.
쩔거럭.
“어이쿠, 귀인! 감사합니다요.”
“아, 아니 그 큰돈을! 미쳤어요?”
말 위에 탄 채로 전통에 던진 돈에 거지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고개를 조아렸고, 부지불식간이라 미처 낚아채지 못한 왕천이 대번에 짜증을 부렸다.
“어려운 이들 돕고 살아야지.”
“이런 젠장! 성자 나셨네요, 성자 나셨어. 어유, 저게 대체 얼마야?”
“……”
왕천이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연신 거지의 전(錢)통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줬다 뺏는 것만큼 추잡한 짓은 없다는 것을 저도 아는지, 발만 동동구를뿐이다.
……나도 아깝다.
하지만 어쩌겠어? 니가 자꾸 알면 안 되는 걸 캐물어서 그렇잖아.
“빨리 가자. 애들이 먼저 와서 기다릴라.”
“이런 씨……. 좋습니다, 좋아요. 돈이야 벌면 되죠. 하지만 오늘은 꼭 대답을 들어야겠습니다.”
왕천이 집요하게 달라붙는다.
하아, 이런 포기를 모르는 놈 같으니…….
“말해 봐요.”
“뭘 자꾸 말해 달래?”
“저 몰래, 비밀리에 세력 같은 것을 기르고 계셨던 겁니까?”
“……으응?”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추론에 능운비가 황당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였다.
그, 그런 이야기였냐?
아, 왕천이었지?
잠시 잊었다.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는 놈인데.
젠장, 그런 줄 알았으면 거지한테 적선은 안 했지. 저게 다 얼만데…….
능운비가 입맛을 쩍쩍 다시며 뒤로 멀어지는 거지의 전통을 힐끗거렸다.
지금이라도 돌려 달라고 할까?
“맞죠? 그렇죠?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마교에서만 살아오신 분이 중원에 대해서 이리 속속들이 아느난 말입니다.”
“……”
“제가요, 주군에 대한 건 전부 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요즘엔 도통 헷갈립니다.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하지 뭡니까? 어째 중원으로 나오신 것도 전부 계획속에 있는것 같기도 하고……. 말씀해 보세요. 예?”
“……”
“그리 생각하다 보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라서 그래요. 생각해 보면 주화입마에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중원을 정벌하겠다느니, 마도 천하를 이루겠다느니 하는 개꿈을 꾸셨던 분이 어찌 그리 조용했었나 싶기도 하고……”
“……”
“말해 봐요. 저 몰래 준비하고 있었던 거죠? 교주가 되려는 준비 말입니다.”
마을 밖으로 나서는 내내 집요하게 캐물어 오는 왕천을 빤히 쳐다보던 능운비가 피식 웃었다.
“비~밀.”
“야이씨!”
“뭐?”
“……이번 건 실수였습니다.”
“그 실수 평소에도 자주 범하던데? 진심이 빼곡하던데?”
“기분 탓이겠죠.”
“뭔가 너무 끼워 맞춘 거 아니냐?”
“크흐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구요. 말씀 좀 해 보시라니까요? 대체 저 모르게 어떤 세력을 길러 놨던 겁니까? 이해합니다. 이해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셨던거. 하지만 이젠 괜찮잖아요. 설산장도, 저도, 삭월대도 다 같은배를 타게 되었는데.”
“아, 비밀이라니까?”
“비밀은 무슨 놈의 비밀입니까? 제가 지금 그 꿍꿍이의 현장을 보고 말았는데!”
“……세력을 길렀으면 어쩌게? 니가 뭔 상관인데?”
“뭐요? 뭔 상관? 섭섭하게 이러실 겁니까? 그게 충성스러운 호위장한테 하실 말씀이냐구요!”
“충성이 다 얼어 죽었네. 그냥 잊어버려.”
“어떻게 잊어요! 내 입신양명을 애먼 놈에게 뺏길지도 모르는데! 안 그래도 주승이 치고 올라와서 밤에 잠도 잘 안 오는구만……. 그러지 말고 저한테만 말씀해 주세요. 뭐 있죠? 그쵸?”
하아, 그놈의 입신양명. 이놈은 진짜 권력욕에 미친 화신이라도 되는 건가?
이럴 땐…….
쫘아악!
히히히힝!
별안간 후려친 채찍에 말이 앞발을 힘차게 들었다가 관도를 따라 마을 밖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어어? 거기 서요! 누가 놓칠 줄 알아요! 오늘은 반드시 답을 들어야겠다구요!”
그 뒤를 왕천이 쏜살처럼 뒤쫓는다.
난데 없는 마상 추격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관도 옆 어느 골목의 한쪽 어귀.
거적때기를 깔고 드러누워 자던 거지가 벌떡 일어나 행인이 없는 으슥한곳으로 향한다.
찌이익.
얼굴 피부를 훌러덩 찢어 버린 거지의 몸이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헐렁한 옷을 벗어 낸 왜소한 여인, 향.
“정말 볼 수록 재미있는 사람이네. 설마하니 천주문의 영역인 주천에 몸을 숨겨 이동할 생각을 하다니.”
천주문은 정무맹에 뿌리를 둔 문파다.
그 세가 정파 무림의 기등이라 불리는 구파일방, 오대세가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대대로 장로를 배출하며 오랜 시간 감숙 북방을 지배해 온 강자였다.
능운비는 지금 그들의 품 안으로, 즉 적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좋은 판단이다.
마교를 떠난 살수들이 본격적으로 추격해 오기 시작했다.
삼장로부가 만든 신분을 버리고 새 신분을 얻었으니, 추격이 쉽진 않을 것이다.
와중에 정파의 영역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쉽게 움직이지는 못할것이다.
천주문은 그리 녹록한 문파가 아니니까.
삼공자에 대한 살행이 이루어질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 마교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으나, 누구도 그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마찰이 발생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하니 안전할 것이다. 적어도 천주문의영역 안에서는.
“그나저나 위장 신분 백오십 개를 닷새 만에 만들어 낼 수 있는 모사꾼 여인과 비루한 척 힘을 숨긴 노인이라니……. 뭐, 상관없겠지. 교주님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비밀스러운 세력을 거느린 판에.”
하지만 의외다.
설마하니 그 삼공자가…….
실력을 숨긴 것도 그러하거니와 이제 보니 세력까지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교주님 말씀대로 참으로 지켜보는맛이 있네.”
피식 웃은 향이 품 안의 휴대용 지필묵을 꺼내 자신이 본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했다.
삼공자 중원행 동향 보고…….
핵심만 간추려 적은 보고. 하지만 바로 보낼 순 없다.
암어로 적긴 했지만, 전서구는 안전하지 않으니까.
중원에 마련된 은밀한 장소에 도착하면 한꺼번에 발송할 것이다. 누구보다 삼공자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을 교주에게.
그때까진 제 품에 보관하는 수밖에.
향이 종이를 몇 번 흔들어 먹을 말리고는 작게 접어 퓨대용 지필묵과 함께 품에 넣었다.
“……제법 씀씀이도 좋으시고.”
향이 손에 든 전통의 묵직함에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번외의 수입을 마다할 이가 뉘 있으랴.
향이 무심한 척 전통에서 전낭을 꺼내 챙기려는 순간.
“어이, 거기 처자. 동작 그만.”
“……?”
향이 숨어 있던 골목으로 웬 거지 무리가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아까부터 인기척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에 그대로 두었을 뿐이다.
“여기 있던 거지새낀 어디 갔냐?”
그 거지가 자신이다.
“그리고 그 돈…… 어째 거지 놈 것 같은데?”
“……”
“좋은 말로 할 때 내려놓지? 오라비들이 꽤 무서운 사람들이 거든?”
거지가 날이 시퍼렇게 선 쇠붙이를 꺼내며 음산하게 웃었다.
“위협이야? 지금? 내게?”
“잘 아네. 그러니까 손에 든 거, 품에 넣지 말고 이리 가져와라. 보아하니 얼굴도 반반한 것이, 몸째로 이 오라비 품에 안겨도 될 것이고.”
그리 말하며 저들끼리 킬킬거린다.
음산함에 음흉함까지 더해졌다.
향은 잠시 고민했다.
보아하니 개방은 아니고, 인근에서 비럭질하는 부랑자들인 모양이다. 생전 처음 보는 거지가 자신들의 구역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헐레벌떡 뛰어온 것일 테고.
뭐, 거기까진 이해한다. 제 영역을 타인에게 내어 주는 이는 없으니.
“……그런데, 참 운이 없네.”
“뭐?”
“보면 안될걸 봤어.”
“……?”
“내 얼굴.”
향이 눈을 생긋이 휘며 화사하게 웃었다.
보는 이의 혼을 쏙 빼 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고, 그것이 안본현 부랑자들이 살아서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