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63
낡은 초옥.
벽체로 쓰인 나무판은 비바람에 시달려 옹이 자리마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문이라고 하나 있는 것은 나무 경첩이 부서져, 안을 다 가리지도 못하고 잔바람에 삐걱거린다.
문 위에는 붙어 있는 것이 용할 만큼 낡은 현판이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청진암(淸眞庵).
그 빛이 변함없이 선명한 곳이라는 뜻과는 달리 너무 허름하여 길 잃은 망자들이 들끓을 것 같았다.
한데 이상한 것은, 산속의 외딴곳임에도 밤벌레의 울음소리조차 없이 주위가 온통 고요했다.
음음(陰陰)하고 적막하다.
마치 죽음이라는 녀석이 머무는 것처럼.
사박, 사박, 사박.
너무도 조용해서 였을까?
별안간 들려온 풀을 헤치고 걷는 소리가 마치 천등처럼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숲을 헤치고 나온 방립의 사내는 망설임 없이 암자 앞마당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솔가지를 모은 뒤,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암자의 잔해를 그 위에 쌓아 올렸다.
탁, 타탁, 화르륵.
밤사이 내려앉은 찬기에 몸이라도 데울 셈인지 불을 피우는 사내.
축축함을 머금었던 나무가 이내 활활 타올라 주변을 환히 비추었다.
말없이 불길을 응시하던 사내가 문득 한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 수가 하나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정체를 아는 것인지 그는 모닥불을 뒤적거려 불길을 키울 뿐이었다.
“젠장, 이런 만남은 좋지 않다고 했잖나.”
“……”
이내 불빛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짜증이 잔뜩 서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하나 사내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오죽하면 불렀을까?”
“……젠장.”
함께 온 이들은 멀찍이서 대기하도록 하는 것은 둘 사이에 오랫동안 이어져온 관례였다.
신경질적으로 방립을 벗은 이는 다름 아닌 천주문주 배효강이었다.
“그래, 어쩐 일로 비선(秘線)을 통해 연통을 보낸거냐?”
“일단은 앉지.”
“앉기는 염병……”
짜증은 여전하지만, 이미 앉은 뒤였다.
배효강이 앉자, 먼저 온 사내도 방립을 벗어 옆에 내려 두었다.
단천문주, 종세인.
감숙 북방을 지배하고 있는 정마의 두 거두가 은밀하게 회동한 것이다.
그 만남만으로도 난리가 날 법한 일이나, 둘에게서 어색함 따위는 찾아볼수가 없었다.
종세인이 손을 들자 공터 밖 숲에 잇던 무인 하나가 달려와 술병을 건네었다.
그 또한 오랜 경험에 따른 익숙한 행동처럼 보였다.
“내가 청한 자리기에 준비한 것이다.”
“천일취로군. 이 밤에 딱 좋은 술이야.”
연락을 받고 먼 길을 부랴부랴 달려온 참이라 목이 말랐던 배효강은 싫지 않은 표정으로 잔을 받았다.
쪼르륵.
말없이 잔을 채우는 소리가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와 어우러졌다.
정과 마로 갈려 있으나,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만날 수 있는 오랜 친구 사이의 그것 같았다.
물론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였고, 둘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보다 어찌 된 일이지? 당분간 이런 만남은 가지지 않기로 했을 텐데?”
“그랬었지. 하지만 상황이 그럴 수 없게 되지 않았나?”
“상황?”
“일이 꼬였어도 대가는 치러야지. 정확히 인원수의 반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종세인이 잔을 비우며 하는 말에 배효강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대가 같은 소리! 지금 우리 상황을 몰라서 그래?”
“……”
“자칫하다가 산통이 다 깨지게 생겼단 말이다!”
“그것이 내 책임은 아니지 않나?”
“뭐라?”
“나는 내 일을 했고, 망친 것은 그쪽인데 어찌하여 내가 이해를 해 주어야하지?”
“이, 이놈이……”
“왜? 내 말이 틀렸나?”
종세인의 스산한 눈빛에 배효강의 수염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그 말에 어찌 반박하겠는가?
“후우…… 젠장할.”
“……”
“좋다. 인정하지. 하지만 아직이다. 우리도 재정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내가 이해해 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했을 텐데?”
“이런 빌어먹을! 그럼 나보고 어찌 하라는 거지? 노예로 팔아 치워야 할 유민들이 전부 도망가 버렸단 말이다!”
“그래서?”
“돈이 있어야 줄 게 아니냐!”
“그건 네 사정이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무심히 대하는 종세인의 태도에, 배효강이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혹시라도 돈 주는 것이 아까워서 다른 마음 먹지 마라. 수틀리면 나도 어쩔수 없어.”
“……뭣이 어째?”
“그동안 너와 맺어 온 관계를 폭로해 버리면 그만이야.”
“네놈, 그게 무슨?”
“설마하니 치부책 하나도 만들어 두지 않았을 것 같은가?”
“치부책?”
“그래, 그동안 네놈이 가문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해 온 더러운 짓거리들 말이야.”
“……”
“꽤 될 거야. 자네나 자네 가문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릴 정도로. 아마 그 잘난 자네 아들놈이 정무맹으로 가는 일은 없게 될걸?”
“……이 빌어먹을 자식.”
배효강은 종세인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약점이 잡힌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가문은 대대로 정무맹의 장로를 배출해 을 정도로 명망 높은 감숙 북방의 패자였다.
물론 배효강이 가주가 되기 이전까지의 얘기였다. 가문의 성세를 이어 가기에 능력이 모자랐던 배효강은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뇌물. 힘이 모자라니 금력으로라도 성세를 이은 것이다.
하지만 그간에 정무맹으로 보낸 엄청난 양의 뇌물들이 어디서 났겠는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그만한 돈을 모을 수 없었다.
결국 불법적인 일들에 손을 뻗을 수 밖에 없었고, 사람 장사는 그중 가장 이문이 큰 사업이었다.
하지만 관의 눈을 피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때 만난 것이 지부장으로 부임했던 종세인이었다. 천주문의 성세가 이어진 모든 과정에 그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천주문은 타지에서 흘러들어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화전을 일구는 유민들을 마교로 몰아 토벌을 시작했다.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은밀하게 소문도 흘렸다.
아이를 잡아먹는다느니, 생육을 즐긴다느니…….
무림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관은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천주문은 막대한 공적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걸로 돈이 되겠는가?
팔아야 남는다.
노예 시장, 사창가.
덕에 천주문은 엄청난 재물을 모을수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을 알선해 준 것이 다름 아닌 종세인이었다.
물론, 마교의 이름을 더럽힌 것에 대해 지부의 무인들이 반발하지 않게 억누른 것도 바로 그였다.
모두가 마교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 말하며, 돈으로 입막음을 시켜 온 것이다.
그렇게 생긴 밀월 관계였다.
누가 의심이나 하겠는가?
겉으로는 누구보다 정의로운 천주문이었고, 인근 사람들에게 막대한 인망을 얻고 있는 단천문인데.
“이보게. 부디 사정 좀 봐주게. 이번은 정말로 힘들어서 그래.”
“……”
“자칫 도망친 유민 놈들이 어디 가서 발설이라도 하게 되는 날에는 내 아들놈의 출셋길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가문의 명성에 크나큰 치명타가 된단말일세.”
애원하듯 말하는 배효강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종세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하루 이틀 인연은 아니니 잠시 유예를 둬 주지. 사정도 딱한것 같고.”
“고맙네. 정말 고맙네.”
가슴을 쓸어내리는 배효강을 흘겨본 종세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좋아. 오늘 만나자고 한 것은 돈보단 다른 이유였으니까.”
“다른?”
“본문에 교주의 제자가 와 있다.”
“……교주의 제자?”
“그래. 정기적으로 행해진 감찰이지.”
“……”
마교의 감찰에 대해서는 배효강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관례일 뿐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 시기에만 조심하면 되는…….
“지금까지는 그랬었는데, 그 제자놈은 아닌 모양이더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어찌 된 일인지, 그대들이 유민들에게 누명을 씌운 것을 알고 있더군.”
“뭐, 뭐야?”
“팔자에도 없는 자결 시도까지 해가면서 막긴 했는데, 원체 혈기가 넘치는 놈이라 관심이 많은 모양이야.”
“……”
“순찰당주의 말로는 감찰 중에 그대들이 불법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장들을 살펴보았다더군.”
“뭣이? 그럼 그 제자 놈한테 정보를 전부 넘겼단 말이냐?”
“당연한 소릴. 감찰은 교주의 대리자다. 지부장이 무슨 힘이 있어서 거부할까?”
“몇몇은 네놈의 지분도 있는데?”
“설마하니 그에 대한 흔적을 그대로 두었을까?”
“……”
“어쨌든 경고를 해 주려는 게다.”
“경고라니?”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대비를 하라는것이지.”
“음…….”
“아마 모르긴 몰라도,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네놈들 사업장을 들쑤시고 다닐 게다. 내 생각이 옳다면 그걸로 소심하게 복수를 하려는 것일 테지.”
“음…… 밖으로 까발려 우리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할 것이라는 게냐?”
“그래. 그러니까 단단히 준비해 둬라. 멍청하게 흔적 남기지 말란 소리다. 네놈이 잘못되는 건 상관없는데, 괜히 나까지 엮여 들어가면 골치 아프니까.”
“후우, 알겠다. 그리하도록 하지. 유예에 대해서는 나중에 꼭 보상하겠다.”
“당연한 소릴. 한 푼이라도 빼먹으면 내가 가만있을까?”
“……빌어먹을 자식.”
“칭찬으로 듣지.
배효강의 욕설에 종세인이 웃으며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잔이 부딪치며 쨍하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그나저나, 요즘 그쪽 분위기는 어떠냐?”
“정무맹?”
“그래.”
“말도 마라. 어디서 그딴 놈이 맹주가 되어서는…… 각종 비리가 들통나 잘려 나간 이가 한둘이 아니다.”
“과격한 모양이지? 자네 입장이 난처해졌겠군. 엄청나게 쏟아부었지 않나?”
“나? 그렇긴 하지만, 비리에 대한 것이 걸려도 세력도 없는 맹주 따위가 나를 건드릴 순 없지.”
“뭐?”
“설마하니 내가 누울 자리도 안 보고 다리를 뻗었을까? 신임 맹주는 절대로 우리 가문을 못 건드린다.”
“……”
“뒷배가 그래. 빵빵하거든. 아무리 맹주라도, 우릴 잘못 건드리면 후폭풍에 제 살점이 찢겨 나갈 걸 각오해야할 게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닥불에 비친 배효강의 표정이 무척이나 음산했다.
“든든한 뒷배라……. 구파와 연을 맺기라도 했나?”
“구파? 설마하니 내가 고작 그 정도 가지고 자신하겠어?”
“더 위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천주문은 구파와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구파놈들 밑으로 들어갈 순 없지.”
“호오, 이거 궁금하군.”
“나중에 자연히 알게 될 터다. 우리가문이 감숙 전체를 아우르게 되면……”
“이런 그때가 되면 내 도움을 잊지 말아 달라 사정해야 하나?”
“큭, 어차피 오래 머물 생각도 아니지 않나? 분명 전향하겠다고 한 것 같은데?”
“아직은 아니지. 완벽하게 준비한 뒤가 아니면 마교에 쫓기게 될 게 뻔해.”
“만약 하게 되면, 우리 쪽으로 와라. 내 귀하게 써 주마.”
“큭큭, 감당은 할 수 있고?”
“자네 정도야 일도 아니지.”
“됐다. 설마하니 내가 네놈 밑으로 들어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또다시 잔이 채워졌다.
모닥불의 열기 때문인지 두 사람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나저나, 그 제자란 놈의 용모파기라도 있으면 내어 다오. 모사하여 아랫것들에게 뿌려야 귀한 손님을 귀하게 대접하지.”
“아차차, 그렇지. 내 깜박할 뻔했군.”
“……?”
배효강의 청에 종세인이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것처럼 제 품을 뒤적거렸다.
“족자로 만들긴 시간이 부족했다.”
“얼굴만 알아보면 되지.”
종세인이 내민 것은 천을 배접(褙接)으로 덧대어 만든 초상화였다.
활짝 펼쳐 바라보던 배효강의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왜?”
“아니, 이 얼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봤다고? 교주의 제자를? 말도안되는 소리.”
“아니, 정말로 익숙한……”
그 순간 배효강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인물.
눈이 휘둥그레진 배효강이 족자를 모닥불 가까이로 가져가 세심하게 살폈다.
“이, 이놈은!?”
잊을 리 없다.
힐끗 보았고,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인물이지만…….
“옥청표국!”
“응? 옥청…… 뭐?”
“이, 이놈이 교주의 제자라고?”
“맞다. 대체 왜?”
“이, 이 빌어먹을놈이……”
“……?”
배효강의 얼굴이 불꽃만큼이나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자신들이 유민들에게 누명을 씌운것을 이 제자라는 놈이 알고 있는 이유가.
그리고 뇌옥을 습격했던 흉수 놈이 누군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