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78
기련 지부 개회연은 이틀이나 이어졌다.
능운비가 보여 준 모습 덕에, 마교의 이름은 민가에 더욱더 깊숙이 자리 잡았다.
더욱이 앞으로 마교가 민가에 피해를 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교주의 이름을 대리해 천명했으니, 그 효과는 엄청났다.
또한 객점과 주루, 상단과 표국 등에 이유 없이 세금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 공언했고, 청부받은 일에 대해서만 소정의 수수료를 받겠다고 서약했다.
그렇게 모두의 환호 속에서 지부의 연회가 끝나고 난 뒤, 능운비는 자신의 거처에서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외곽을 지키는 삭월대를 제외하면 왕천도, 주승도 없는 밤이다.
고요하다.
그리고 그 고요에 아직 한 사람이 숨어 있음을, 능운비는 알고 있었다.
“거기 있지?”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은 채 허공을 향해 물었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있다.
연놈이라 명명한 그.
지금까지의 경험상 분명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단천문 일은 고마워, 덕분에 잘 해결됐다.”
능운비는 조용하기만 한 내부에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하나 물어도 될까? 아, 이건 부탁은 아니고…… 답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라.]
한참 만에야 전음이 들려오자 능운비가 피식 웃었다.
“이젠 모습을 보고 싶은데? 혹시 봐서는 안 될 이유라도 있어? 얼굴이 몹시 추악하다든가, 큰 흉터가 있다든가. 뭐 그런 거 말이야.”
말을 끝내고 한참 뒤, 눈앞에 무언가 생겨났다.
툭 떨어진 것도 아니고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불쑥 나타난 이의 정체는 여인이었다.
자신보다 대략 머리 하나가 작아 보이는 왜소한 체구.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외모였다.
좀 더 강인한 느낌을 생각했는데, 약간 말괄량이 느낌의 여리디여린 소녀가 아닌가?
하지만 그가 가진 무시무시한 힘을 알기에, 뜻밖의 외관에 조금 놀랐을 뿐 경시하는 마음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래도 확정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있었다.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내도 상관없다는 뜻이고, 제자인 자신과 반말을 주고 받을만큼 신분이 높다는것. 그리고…….
“연놈이 아니라 년이었네.”
“뭐야?”
“아, 미안……”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여인, 향이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능운비를 째려보았다.
“그나저나 대단하네. 대체 어떤 은신술을 익힌 거지?”
“……묻고 싶다는 게 그거냐?”
“큭, 뭐가 그리 급해?”
“죽일 놈이 아니면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는 편이 아니라서.”
“……”
죽일 놈이 아니면이라니.
정말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녀석이다.
어떤 상대든 무조건 죽일 수 있다는 믿음이 고스란히 묻어나지 않는가?
“그, 그거 다행이네. 적어도 날 죽이진 않겠다는 뜻이니까.”
“죽여? 너를? 그럴 리가 없지.”
픽 웃자 볼에 생겨난 보조개가 그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럼 왜 날 따라다니는 거냐?”
“명령이니까.”
“누구? 교주……님?”
“그래.”
“왜?”
“이유 같은 건 중요치 않아. 널 지키라 했으니 지킬 뿐이다.”
“흠……. 그렇군.”
교주가 자신을 위해 몰래 호위를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살가운 사이였던가?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틈만나면 두들겨 패던 인간이지 않은가.
자신을 지키려 호위를 보낸 교주의 의도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능운비가 별안간 무릎을 탁 쳤다.
그렇네. 감시 역이네.
젠장, 그때 위지혁을 때려눕히면서 왕천과 주승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게 분명하다.
그러니 저런 무시무시한 감시 역을 붙여 놓은 게지.
“젠장.”
“……?”
찌푸린 얼굴로 욕설을 내뱉자 향이가 고개를 살짝 꺾으며 그를 쳐다봤다.
“아, 미안. 그냥 내가 그리도 못 미더우셨나 싶어서……”
“못 미더워? 큭, 글쎄.”
“……?”
“아끼신 거겠지.”
“아껴? 나를? 지나가던 개가 요절복통할 소리 마라. 그런 간지러운 분이 아니잖아.”
“그런가? 뭐, 그건 둘이서 알아서 하고…… 질문이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마.”
향이가 대수롭지 않게 모습을 감추려 하자, 능운비가 급히 그녀를 잡았다.
“에헤이, 뭔 성격이 그리 급해? 어차피 여긴 우리 둘뿐인데.”
“……말했듯, 죽일 놈이 아니면 대화도 오래 주고받지 않는다.”
“정말 칼 같은 성격이네.”
“단호함이라고 하지.”
“……”
친절하게 정정해 주는 그 모습에 능운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긴 건 막냇동생 같은 게…….
“서호 용정이다. 꽤 유명하지. 차 맛도 일품이고. 새로 지부장 된 탁발려가 주고 가더라. 마실래?”
“……”
빈 잔을 꺼내 반대편으로 슬쩍 밀어놓는 능운비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향이가 짐짓 심각하게 물었다.
“꼬시는 거냐?”
“……뭐?”
“미리 말하지만, 애새낀 관심 없다.”
“……”
정말 단호하다.
근데 나도 너한텐 관심 없거든?
차 한잔 마시자 했을 뿐인데 괜히 지랄이다.
어디 무서워서 연모나 하겠냐? 뭐 하나 잘못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모가지 따일 걱정을 해야할 판인데…….
“그냥 차다. 곡해 마라.”
“흠.”
“천장 먼지에 질렸을 거 아니냐? 그거 기관지에 별로 안 좋더라. 그리고 귀식(鬼息)을 오래 쓰는 것도 안 좋아.”
“……?”
“괜히 귀신의 호흡이겠냐? 너무 오래 쓰면 정말 귀신 된다.”
허락도 받지 않고 빈 잔을 채우는 능운비를, 향이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우리 같은자들의 습성을 아는군.”
“책으로 익혔다.”
“그러기엔 너무 생활 친화적인 느낌이었는데? 혹 은신 공부를 수련했었나? 네가 가끔 보여 주는 보법도 그렇고, 검에 스며 있는 움직임도 그렇고……”
“……”
의아해하며 묻는 말에 능운비는 뜨끔함을 감추지 못했다.
눈치도 빠르지.
그걸 전부 보고 있었을 줄이야.
“생각해 보니, 그 눈도 좀 이상해. 실력이 못 미치는데 벌써 관조에 들었잖아?”
“……”
“그건 살수들 방법인데? 죽일 상대를 완벽하게 파악하기 위해 눈부터 수련하거든.”
의심에 의심이 더해진 눈빛에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 같았던 능운비가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혓바닥이 제법 기네. 죽이기로 결심한 거냐?”
“뭐?”
“아까 그랬잖아. 죽일 놈이 아니면 대화도 안 하고, 쓸데없는 말도 안 한다고.”
“……”
“어떻게, 목이라도 길게 빼 줄까? 어차피 내가 상대가 되진 않을 테니까, 시신 상태라도 좋아야지.”
능운비가 너스레를 떨며 일부러 목덜미를 내보이자, 향이가 참지 못하고 보조개를 만들며 웃었다.
“큭, 큭큭큭. 너 진짜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칭찬으로 들으마.”
“좋아. 차, 함께해 주지. 아, 남자로서 관심 있어서 수락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알고.”
“……”
다시 말하지만, 나도 너한테 관심 없다.
향이가 의자를 들고 능운비의 앞에 앉았다.
“맛이 제법이지?”
“아직 안 마셨다.”
“향미(香味)를 말한 거거든?”
“……향은 좋네.”
“서호 용정이니까. 지부장의 뇌물이고.”
“큭.”
한번 터진 터라 그럴까?
향이가 사춘기 소녀처럼 능운비의 말끝마다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왠지 비웃음 같았다.
능운비는 떨떠름함을 속으로 삼키며 물었다.
“근데,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고 다니는건어떠냐?”
“모습을 드러내?”
“그래. 딱히 감출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혹, 대인 기피증 같은 게 있는건 아니지?”
“그냥 귀찮아서야.”
“그럼 됐네. 귀찮게 할 놈 없으니까. 말했듯 천장 먼지는 안 좋아. 귀식도 그렇고.”
“큭큭, 뭘 잘 모르네.”
“뭐?”
“귀식 같은 건 뭘 모르는 놈들이나 쓰는 거지. 난 그런 저급한 건 안 쓴다.”
“……”
귀식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뭘 쓰길래, 그렇게 기척조차 드러내지 않을 수가 있는 거지?
“굉장하네. 귀식 말고도 그렇게 대단한 호흡법이 있었어?”
“네가 아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
“허……”
“하지만, 네 권유는 받아들이기로 하지.”
“응?”
“옆에 있어 주겠다.”
사실 향이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다.
정체를 들키지 않아야 할 상대라면 모를까, 이미 대화도 나누고 모습까지 드러낸 판에 뭐 하러 계속 숨어 있는단 말인가?
사실 은신이란 게 보통 고역이 아니다.
상대에게 들켜서 안 되기에 항시 긴장감 속에 있어야 하고, 외부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려야 한다.
와중에 수면 상태도 별로 좋지 않다.
자는 중에도 항상 귀를 열어 두어야 하니까.
그 때문에 신경 쇠약까진 아니어도 늘 편두통에 시달린다.
뿐인가?
능운비의 안전이 확보된 상황에서야 겨우 씻을 수 있고, 식사 때도 제각각이라 소화불량이 업처럼 따라다닌다.
와중에 하루 이틀 만에 끝날 감찰이 아니지 않은가?
능운비가 감찰을 마치고 돌아가자면 최소 일 년이다.
그 기간 내내 지금처럼 할 순 없다.
그러니 차라리 옆이 낫다. 밥도 마음껏 먹고, 가끔 잠도 푹 잘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다른 놈이야 죽건 말건 능운비의 생사만 신경 쓰면 된다.
자신하건대, 맘먹고 지키려 하면 중원에서 능운비의 목을 취할 자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결정한 거냐?”
“그래.”
향이가 차향을 음미하다 호로록 소리를 내며 들이켰다.
그 모습에 능운비가 피식 웃었다.
이걸로 되었다.
가장 신경 쓰이던 부분 중 하나가 해결된 것이다.
연놈의 존재.
도통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수가 없으니 마음껏 행동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두면 얼마든지 그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게 중요하다.
새로이 계획하는 도주의 첫 번째 단계였으니까.
……흐흐흐.
“왜 웃냐?”
“어?”
“웃는 게 보였거든.”
“아, 안 웃었는데?”
“놀고 있네. 나 정도 되는 감각을 지닌 사람은 공기의 흐름은 물론이고, 상대의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는다. 특이나 이 정도 거리에선 더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어. 호흡의 변화, 근육의 움직임, 하다못해 곤두서는 털까지. 고로 넌 분명 웃었다.”
확신하듯 말하는 투에 능운비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좋겠다, 이 쉐끼야. 그런 걸 전부 파악하고 있어서.
“음, 지금은 짜증이 좀 난 건가?”
“……”
섬?하기까지 한 기민한 감각에, 능운비가 흠칫 놀라며 향이를 쳐다봤다.
이거 괜히 옆에 두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그냥…… 여동생 같았다.”
“뭐어?”
“아니, 나이가 그렇잖아. 누가 널 그 엄청난 실력을 가진 살수라고 여기겠냐고?”
이건 진심이었다.
대체 누가 알겠는가. 이 작은 소녀가 단천문을 습격한 삼백여 명의 무인을 몰살시킨 괴물이라는 걸.
자신들이 돌아왔을 때, 단천문 내부는 온통 핏빛이었다. 생존자는커녕 성한 시신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교인들조차도 치우는 내내 토악질을 하기 일쑤였다.
그걸 혼자 해낸 놈이다.
지금 이렇게 태연하기까지 한 녀석이고.
왕천이나 주승, 지부의 무인과는 종자 자체가 다른 진짜배기 마교인이다.
“어쨌든 옆에 있게 되었으니…… 신분을 뭘로 한다?”
“시비.”
“뭐?”
“시비로 해라. 이름값도 생겼는데 개인 시비 하나쯤 있어야지.”
“……”
설마하니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이만한 고수가 시비를 자처해?
왕천과 주승, 삭월대까지 그녀에게 반말을 할 텐데?
“괜찮겠어?”
“괜찮다. 익숙하니까. 원래 그런 신분으로 있기도 했고.”
“뭐? 그럼 교주님 시비였다고?”
“눈썰미가 없네. 매번 찾아올 때마다 내가 차도 따라 줬는데.”
“서, 설마? 그 차 따르던……?”
“네가 교주님께 부적을 던질 때도 있던 나다. 처맞는 것도 전부 봤다. 전에 상락에서 도사 흉내를 내며 부적을 준 것도 그 때문이고.”
“……”
머리가 멍해졌다. 설마하니 그리 가까운 위치에 있었을지는 상상도 못 했다.
“설마 너? 교주님의 비밀 호위 뭐 그런 거냐?”
“아니.”
“뭐?”
“난…… 암살자다.”
“암살 뭐?”
“기회를 잡는 순간 교주의 목을 따는 조건으로 옆에 있는 거다. 너를 지키라는 명을 듣는 이유도, 목 따다 실패했기 때문이고.”
“……”
그야말로 엄청난 말을 뱉어 내는 향이의 표정은 너무 태연했다.
“놀라긴, 하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다. 교주의 목을 따는 건 우리 일족의 숙원이라서.”
“……”
황당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누가 마교 놈들 아니랄까 봐.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목을 따기 위해 시비를 자처하는 암살자와 늘 신경이 곤두선 채 그녀의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교주라니…….
이런 불편한 동거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이냐?
능운비는 너무 놀라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했다.
호로록.
향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시고 생긋 웃었다.
“맛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