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8
수련이 끝난 뒤, 능운비는 푹 잤다.
정말 푹, 내리 열 시진을.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어찌나 개운한지.
무언가를 이루어 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은 기대감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그 때문인지 밥도 잘 먹힌다.
“한 그릇 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비워 낸 그릇을 내밀자 왕천이 애정 어린 손길로 밥을 듬북 퍼 그릇을 채운다.
역시 사람은 밥심이지. 암, 그렇고말고!
“꺼억!”
역시나 순식간에 그릇을 비워 낸 능운비가 요란하게 트림하며 밥상에서 물러났다.
잘 먹었으니 간단한 몸풀기로 소화를 시켜야지.
식사를 끝내자마자 일어난 능운비가 마당으로 나섰다.
마교도라면 누구나 익히는 기본공을 시작하는 그의 모습을, 왕천이 밥상을 치우며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찌 저리 대견할까?
“후우……”
한차례 마공 수련도 끝낸 능운비는 본격적으로 과거의 무공을 수련하고자했다.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사라지기전에 몸에 익혀 둬야 한다.
괜히 구결을 잘못 외기라도 했다가는 큰일이지 않겠는가?
다만 그전에…….
“이보게, 왕천.”
“예?”
“어제는 모처럼 자네 자당(慈堂)을 만나 기분이 좋았겠구만.”
“모처럼이라뇨? 이삼일에 한 번은 뵙는데요.”
“어허 이 사람! 늙으신 노모님을 어찌 이삼일에 한 번 찾아뵌단 말인가?”
“늙어요?”
“그래.”
“주안술로 피부가 탱탱해졌더라고 하신 분이 누구신지 모르겠을 말씀이네요.”
“……아, 그렇지. 조만간 아파질 예정이라시기에.”
“그럴 예정 없구요. 어제 뵈니 더 쌩쌩하시더라고요. 막 날아다니시고, 아주 그냥 맨손으로 소도 때려잡으실 것 같았어요.”
“그, 그런가?”
“암요.”
하긴 그렇다.
소설옥수가 맘먹고 근처에만 가도 소들이 떼로 몰살당하고도 남을 것이다. 아마 꽝꽝 얼어서.
“그럼, 시집간 자네 막냇동생은 어떤가?”
“개야 뭐 잘 살겠죠. 부잣집에 시집갔으니.”
“어허! 오라비가 되어서 어찌 이리 무정한 겐가! 어서 다녀오게! 혹 처가에서 관심이 없다고 소박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소박이요? 그 아이 처가의 주인이 누군지 잊으셨어요?”
“소설……”
“예. 맨손으로 소도 때려잡으실 그분이지요. 아마 제 여동생을 소박 놨다가는 멸문을 면치 못할걸요?”
“……하긴, 그건 그렇지.”
소설옥수의 성격이면 그러고도 남을것이다.
그나저나 이놈은 왜 이렇게 눈치가 없을까?
지금 내가! 제발 꺼져 달라고 등을 떠밀고 있잖아, 이놈아!
목까지 차오른 속내를 그저 꿀꺽 삼킨 능운비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아, 어쩌지?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왕천을 떼어내야 하는데?
미간까지 찌푸리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왕천이 눈을 샐쭉하게 뜨고 물었다.
“왜요? 저 몰래 다른 수련이라도 하시게요?”
“응? 아, 아니야. 수련은 무슨?”
능운비가 손사래까지 치며 고개를 젓자 왕천이 피식 웃았다.
“오늘은 수련 그만하시고, 서둘러 채비부터 하세요.”
“응? 채비?”
“예.”
“왜?”
“갈 데가 있으니까요.”
“갈 데가…… 헉! 설마? 스승님께서 또 나를 찾으신단 말인가?”
“그럴 리가요? 교내의 일들로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세 연속으로 삼공자님을 찾겠어요? 심지어 요 며칠 사고도 안 치고 조용히 지내셨는데.”
“아, 그렇지. 그럼 어딜 가는데?”
“어머님께서 모셔 오래요.”
“자네 자당(慈堂)께서?”
“예.”
“왜?”
“……”
능운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왕천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럼 그냥 가만히 계시게요?”
“……”
“진짜 답답하십니다. 탄신연을 위한 예물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아……! 스승님?”
“예! 다른 제자분들은 저마다 휘황찬란한 것들을 준비해 오실 텐데, 설마 몸만 가실 생각이셨던 건 아니죠?”
“그건……”
“자, 서둘러 가시죠. 어머님께서 도와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걸 왜 소설옥수께서 도와줘?”
“제가 청을 드렸으니까요?”
“……”
왜 자기 멋대로 그딴 청을 드린단 말인가?
그리고 기왕 도와줄 거면 알아서 좀 골라 주지, 뭘 또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지.
지금부터 몸에 익혀야 할 무공들이 산더미 같은데.
“이것도 제가 간곡하게 무릎 꿇고 부탁을 드려서 설득한 겁니다. 아시겠어요?”
“아, 음……. 난 괜찮은……”
“잔말 말고 따라오세요! 이건 제 위신과도 관계된 문곕니다. 제가 모시는 공자님이 교주님 생신날 빈손으로 가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지가 언제부터 위신 같은 게 있었다고…….
능운비가 마뜩잖은 표정을 짓자 왕천이 귀가 솔깃해질 만한 말을 꺼냈다.
“참! 이참에 제가 새 거처와 삼공자님만을 위한 폐관 수련장도 하나 마련해 뒀습니다.”
“응?!”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삼공자님처럼 지체 높으신 분이 이런 다 쓰러져가는 모옥에 계시면 남들이 절 욕합니다.”
욕은 늘 먹고 있으면서…….
“거창한 건 아니고, 저희 집 근처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어머님께서 직접 교주님께 인가를 받아 주시겠다 하셨구요. 아마 그 근방은 저희 가문에서도 통제하겠지만, 지금처럼 교주님의 명이 내려질 겁니다. 누구도 공자님의 목숨을 노리지 못하게요.”
“……!?”
그 순간 능운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깐만,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소설옥수의 집 근처면 당연히 성 외곽이다.
더욱이 교주가 지금처럼 통제를 해줄 거란다. 아니, 통제가 없어도 상관없다.
이 마교에서 소설옥수의 그 지랄맞은 성품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단 말인가?
괜히 중원인들에게 빙옥마녀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 일선에서 물러난 채 여가 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한때는 아주 살벌했던…….
수틀리면 교주와도 한판 붙을 수 있는 양반이 직접 마련한 곳에 누가 감히 함부로 쥐새끼를 보내 겠는가?
즉, 자신에게 있어선 득보다 실이 휘얼씬 많다.
완벽히 통제된 공간 안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떠날 준비를 할 수 있다는 뜻.
폐관 수련장이라 했으니 왕천을 떼어 내는 일도 쉬울 터다.
아, 기회가 이 리 빨리 찾아오다니.
길게도 필요 없다.
이미 의기에 이른 상황이니, 마교의 무공뿐 아니라 자신이 가졌던 예전의 기예를 최대한 빠르게 갈고 닦으면?
모두의 이목을 속이고 소리 소문도 없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행 일은?
당연히 교주의 탄신연 전날이지! 모두가 생일 준비로 정신이 팔려 있을 테니까.
“왕천!”
“예?”
“가세.”
“예? 아니, 채비를……”
“소설옥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데 채비는 무슨 채비? 먼저 갈 테니 서들러 따라오게!”
“아니, 그래도……”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왕천이 당황하였지만, 능운비는 이미 몸을 날려 한참 멀어지고 있었다.
낡은 수련용 무복 차림으로.
“하아, 정말이지. 어찌 저리 격이 없으실까.”
늘 내쉬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왕천이었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다.
능운비는 역시나 자신에게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수련하는 내내 곁눈질로 자신을 쳐다보던 것을 느끼지 않았던가.
필시 자신에게도 감추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지난밤 어미인 소설옥수에게도 고해바쳤는데 비밀은 무슨.
그래, 옷차림이 뭐 그리 중요할까?
중요한 건 외양이 아니라, 약관도 되기 전에 의기의 경지에 오른 천부적인 실력인 것을.
“걱정 마세요, 도련님. 절대로 저만, 아니 저와 제 어머님…… 아니 가문 사람들 정도만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 준비한 거처니까요.”
왕천은 간단한 짐만을 챙겨 능운비가 향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떤 채로.
* * *
마교의 본성은 해가 잘 드는 천산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중원을 내려다보며 무려 수백 년 동안 천산을 지켜 온 곳.
하지만 마교의 본성보다 더 오래전부터 천산에 자리 잡았던 곳이 있었으니.
“설산장(雪山場)”
능운비가 굳게 닫힌 문 위에 당당히 내걸린 현판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천산의 북쪽. 거대한 산악의 그늘에 있기에 해가 들지 않아 사시사철 눈으로 뒤덮인 그곳에서 굳건하게 견뎌 온곳.
중원인들은 곤륜이 마교와의 경계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 한다.
설산장은 마교에 있어 곤륜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마교라고 늘 중원 침공만 하겠는가?
그들에게도 수많은 적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북쪽의 동토에서 신강을 호시탐탐 노려 온 새외의 세력이다.
설산장은 세가원 중 하나로서, 오랜세월 북쪽의 적들로부터 마교를 지켜왔다.
사실…… 그런 조직이 있다는 것도 능운비가 되고 나서야 처음 알았다.
마교가 폐쇄적인 집단이라 알려진 정보가 적기 때문이 아니었다.
알려고 하면 언제든 알아낼 수야 있었겠지만, 이전의 삶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상대해야 할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원하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된 마교의 조직 구조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교주와 호법부를 제외하고도, 본성내에서 마교의 예하 세력을 통제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 여덟 곳의 장로부.
일선에서 물러난 전대 고수들로 구성된 원로원.
초대 교주와 함께 마교를 세운 뒤로 지금껏 존재해 온 가문들의 의결 기구인 세가원(勢家院).
신강 전역에 퍼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각지의 거대 문파들과 상인회 등등.
굵직한 세력만 모아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인데, 그 외의 사조직은 훨씬 더 많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충성과 지지를 한 몸에 받아야만 교주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위엄과 체면을 유지한 채 그 대단한 조직을 거느리고, 각종 분쟁에서 모두가 만족할 만한 현명한 판단까지 내려야 한다니.
정말이지 범인(凡人)은불가한 일이다. 아마 자신이였다면 뇌 용량 초과로 머리가 터져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담운천은 실로 대단한 인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 어려운 것들 해내며 마교를 이끌어 가고 있으니까.
다만, 조금 의아한 점이 하나 있긴했다.
왜 봉문을 한 걸까?
지금껏 마교를 한 손에 틀어쥔 교주는 역사를 통틀어서 몇 되지 않았고, 그런 교주가 나왔을 때마다 중원이 피바다가 되지 않았던가?
물론 중원에 위장 세력으로 침투해 있는 마교의 분타에선 자잘한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정도는 정사간에도 늘 벌어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힘을 가졌음에도 나서지 않는 담운천으로 인해서 세상의 평화가 지켜지고 있는지도 모르지.”
능운비가 교주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가자!’ 그 한마디면 마교인들이 성난 맹수처 럼 중원으로 돌진할 텐데.
그런데 그 대단한 담운천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교내에서 벌어지는 후계 다툼이다.
다섯 제자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 간의 치열한 싸음.
때론 물밑에서, 때론 대놓고. 하루가 멀다고 벌어지는 그 싸움에 교내에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지경이다.
다만, 어쩌면 담운천은 통제할수 있음에도 내버려 두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마 좀 더 강한 세력이 마교를 차지해야 통제권이 유지된다 여기는 것이리라.
어쨌든 설산장은 그런 권력 다툼의 중심에서 유일하게 중립을 지키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능운비는, 과연 그들이 누구를 지지할지에 대해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운 상황에서 제 발로 설산장을 찾은것이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마 이 일이 알려지면 그를 견제해 온 세력들 사이에서 난리가 날지도 모른다.
그 자손을 호위로 둔 것과, 본인이 직접 설산장을 찾은 것은 명백하게 다른 문제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혹시 그 때문에 지지고 볶고 생 난리를 치든 말든!
어차피 자신은 떠날 생각이 아니던가?
중요한 것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수련할 수 있는 장소가 생 겼다는 사실이다.
목적은 도주. 이곳에서 바라던 경지를 이룬 뒤에 마교를 떠날 것이다.
자, 그럼 왔으니 존재감을 한껏 뽐내줘야지.
머리를 휘저어 잡생각을 지워 낸 능운비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흠.”
생달걀이라도 하나 깨 먹고 왔으면 좋았으련만, 급히 오느라 미처 준비를 못했다.
일단 숨을 깊게 들이쉬고, 큰 소리로!
“후웁! 이……”
“뉘요?”
“……리, 켁, 케켁”
젠장, 외치기도 전에 별안간문이 열리는 바람에 사레가 들렸다.
“나, 느……컥, 움…… 켁, 비이……”
덕분에 무척이나 볼품없는 첫 방문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