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81
다음 날, 능운비가 막 잠에서 깨어나 세안을 마쳤을 무렵 탁발려가 그의 거처를 찾아왔다.
“주군, 일어나셨습니까?”
“아, 지부장. 이른 시간부터 어쩐 일이요?”
고개를 돌린 능운비가 활짝 웃자 탁발려가 미소를 머금었다.
명을 내리고 꾸지람을 할 때는 오금이 저려 올 정도로 위엄 넘치고, 적을 상대로 싸울 때는 같은 마교인으로서도 두려울 만큼 잔인하나, 평소에는 그 나이대에 딱 알맞은 정도로 해맑은 얼굴이었다.
한참이나 직위가 낮은 지부장인 자신에게도 함부로 하대치 않았다. 임시로 맡은 지부장 자리 임에도.
“주군, 앞서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어서 깨시길 기다렸습니다.”
“저런, 기별하지 않구요. 많이 기다렸습니까?”
탁발려와 함께 온 이를 힐끗 쳐다본 능운비가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다,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어찌 주군의 휴식을 방해하겠습니까? 내내 기다려도 상관없습니다.”
“……”
무척이나 송구해하는 그의 모습에 능운비는 더 말하지 않았다.
굳이 말을 덧붙여 봐야 죄송하다는 말밖에 더 할까?
“누구시죠? 그분은?”
“아, 왕 호위장이 섬서로 갈 준비를 하라 하여……”
“아! 함께 가실 상단주시군요?”
“예, 주군. 낙명 상단의 오등이라는자입니다.”
탁발려가 소개하자 상인이 냉큼 고개를 숙여 왔다.
“반갑습니다. 셋째 능운비라고 합니다.”
“오등입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삼공자님.”
“한참 어른이신데 그래서야 되나요? 자, 앉으세요. 오랜 시간 함께해야 할 터이니, 일단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예? 시, 식사를 함께요?”
“아, 이미 드셨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어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
오등이 난감해하자 능운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옆을 힐끗 쳐다봤다.
“향아, 밥 먹자. 애들 불러와라.”
“예.”
향이 곱게 답하며 밖으로 나갔다.
오등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아무리 일반인들에겐 친절하다고 소문난 삼공자라지만, 어찌 감히 동석을 한단 말인가?
“괜찮습니다. 밥상에 자리가 정해진것도 아니고, 전, 늘 호위들과 함께 먹습니다.”
“하지만 제가어찌……”
“너무 불편하시면 더는 권하지 않겠습니다.”
“……”
능운비의 배려에 잠시 고민하던 오등이 결국 탁발려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어쨌든 섬서까지 함께하신다고 하니 잘 부탁드립니다.”
“어이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드려야 할 말씀입니다. 안 그래도 섬서까지 어찌 가나 했는데, 삼공자님과 함께하게 되어 마음이 든든합니다. 상단 행렬은 지부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 그럼 식사하고 난 뒤에 바로 떠나도록 하죠.”
상단주 오등의 말에 능운비가 빙긋이 웃었다.
상단과의 거래. 그들은 지부에 호위를 요청했고, 때마침 능운비가 그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놀면 뭐 하나?
어차피 섬서로 가야 하니 뭐라도 득이 되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임시 지부장이 된 탁발려가 한사코 반대했지만, 능운비는 개의치 않고 계약을 체결하라 명했다.
또한, 이미 전부 소문난 마당에 몰래 숨어 다닐 이유도 없지 않은가?
정무맹의 승인하에 마교 지부가 창설되었으니, 마교인이 중원을 돌아다닌다고 한들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와중에 교주의 제자에게?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간 큰 놈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위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반대파에서 자행할 암살 위협은 여전하니까.
하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능운비가 왕천과 주승을 부르러 갔다 막 돌아온 향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왜 혼자 와?”
“배가 안 고프대요. 식사가 끝날 때쯤 온다네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우리끼리 먹자.”
“예.”
차려진 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는 향이를 보던 능운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이런 작은소녀가…….
듣자 하니, 배효강과 싸울 때 살수들이 찾아왔었던 모양이다.
신월가의 흑사라던가?
기회를 노리고 있던 그들은 향이라는 괴물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지금은…… 그 이름 그대로 진짜 모래가 되었다.
아마 땅바닥 어딘가에 뒹굴고 있겠지.
뭐, 어쨌거나 든든하다.
이젠 맘 편히 도망칠 준비만 하면 된다.
수련, 또 수련.
반드시 강의 경지를 이루어 향이에게 그 놀라운 술법을 배우고 말리라.
그때까진 착실히 감찰 업무를 수행해 주마.
굳이 자신이 할 필요도 없다. 왕천과 주승……응?
막 식사를 마치고, 숭늉 한 사발을 들이켤 때쯤 도착한 왕천과 주승의 모습에 능운비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뻔했다.
“컥, 케켁, 니들 뭐하냐?”
“……”
능운비가 묻자 둘이 동시에 어깨를 움찔거렸다.
“저, 저희가 뭐요?”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주군.”
“……”
누가 뭐라 했니?
그리고 아무 짓도 안 했다며? 근데 왜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어?
“안 덥냐?”
“안 덥습니다.”
“어유, 추워라. 고뿔이 오나?”
왕천과 주승이 양 팔뚝을 쓸어내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들의 모습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던 능운비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것들이…….
“벗어.”
“……”
“니들 보고 있으니까 내가 덥다, 내가! 그리고, 어디 물건이라도 훔치러가냐? 대낮에 웬 복면이야? 빨리 안 벗어?”
능운비의 신경질적인 말에, 왕천과 주승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주섬주섬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건…… 멍?
둘 다 얼굴이 온통 울긋불긋하다.
와중에 왕천은 한쪽 눈두덩이가 잔뜩 부어 있었다.
이게 뭔…….
당황하던 것도 잠시, 이내 능운비는 어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눈치가 없어도 알겠다.
평소라면 옆에 다가와 재잘거렸을 놈들이 멀찍이 떨어져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거리의 중심이 되는 것은 향이다.
“니들…… 맞았지?”
“마, 맞긴요? 그럴 리가요?”
“일절 그런 일 없습니다, 주군.”
동시에 답해 오는 그들의 모습에, 능운비의 입가에 실소가 머금어졌다.
맞았네, 이 새끼들.
필시 먼저 시비를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될 리가 있나?
내 그리 경고를 해 주었건만, 어쩌자고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쯧쯧.
“삼공자님, 식사도 끝났으니 서둘러 나가시죠? 다들 기다리겠어요.”
“어? 어”
향이가 살포시 보조개를 만들며 공손히 말하자, 능운비가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호위장님은 뭐 하세요? 안 가요?”
“예? 예! 시비님!”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는 꼴이 가관이다.
어찌나 놀랐는지 몸이 뻣벗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시비님?
대체 어찌 맞았으면 자존심까지 전부내려놓은 거냐?
그래도 무척이나 고소했다.
더하여, 앞으로 녀석들이 말을 안 듣거나 반항할 때면 어찌하면 될지 알 것 같았다.
최근엔 명이라고 해도 들어 처먹질 않더니…….
“하하, 향! 아, 너무 재촉지 말거라. 놀라지 않느냐?”
“예.”
“허허, 향! 아.”
“예.”
“핫핫! 향! 아.”
“……”
향이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움찔거리는 왕천과 주승의 꼬라지가 참으로 볼만했다.
“크칵캭칵! 향……”
“그만하시죠, 삼공자님. 채신머리없이……”
“캬……?!”
짜증스럽게 일그러지는 향의 눈초리에 방정맞게 웃던 능운비가 사레가 들려 캑객거렸다.
하여간 눈깔 하곤…….
어쨌든 향이가 한 식구가 되었다.
왠지 앞으로 더 재미있어질 것만 같았다.
“자, 그럼 밖에서 마차가 기다린다고 하니 서둘러 나가 볼까?”
“예! 주군!”
능운비를 필두로 상단주와 삭월대가 뒤따랐다.
그리고 왕천과 주승은…….
학익진이냐? 니들이 양 날개야?
왜 같이 가면서 좌우로 활짝 펼쳐져있어?
그 이유는 오직 셋, 아니 넷만 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이 즐겁다.
“크흐흡, 맞았어. 내 그럴 줄 알았어. 크흡, 크흐흡.”
능운비는 살벌하게 두들겨 맞았을 둘을 떠올리며 문밖으로 나섰다.
“삼공자님이시다!”
“삼공자님!”
“……?”
어? 뭔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 있어?
엄청난 인파였다.
와중에 칼을 차고 있는 것은 지부 무인과 자신들뿐.
지부의 문 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들은 인근에 사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삼공자님, 이것 받으십시오.”
“이게……?”
“가시는 길에 요기나 하시라고 조금 싸왔습니다.”
“……”
푸근하게 웃으며 건넨 보자기에는 심심할 때 씹을 만한 육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아니, 이걸 왜?”
“아 참, 좀 받으세요. 사람 성의도 있는데.”
“아, 예……”
한사코 밀어 대는 통에 능운비가 어색한 손길로 육포 보따리를 받아 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곳곳에서 선물 공세가 이어졌다.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버렸으나, 제지하기는커녕 모두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무림 문파 앞에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일도, 떠나는 이들을 위해 선물을 주는 일도 흔치 않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무림인들이 내쁨는 기세에 겁을 먹어, 다가서기조차 꺼리는 것이 현실이다.
와중에 마교인이라니?
뒤에서 손가락질이나 안 당하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모두가 서슴없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모두가 떠남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허, 참……”
손에 다 들 수가 없었기에 사람들이 건넨 것들을 수레에 옮겨 실은 능운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신이 뭐라고 다들…….
“삼공자님, 이제 떠나시면 언제 다시 오십니까?”
“예? 다시 오라구요?”
“암요! 오셔야지요. 제가 오실 때를 대비해서 좋은 술을 담가 두겠습니다.”
“……”
객점 주인이 자신 있게 가슴을 탕탕치며 하는 말에,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찰이 끝나면 꼭 들르겠습니다.”
“약속하셨습니다.”
“예.”
“모두들 삼공자님 말씀 들었지? 내 그날 술 창고를 전부 텀세. 잔치를 벌인다 이 말일세!”
“오오! 와아아아! 삼공자님 만세!”
“……”
이젠 아주 사방에 환호성이 난무한다.
하긴, 공짜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장사꾼이 그래도 되냐?
이 많은 사람들에게 술을 내주고 나면, 넌 뭐 먹고 사냐고…….
더 있다가는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능운비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상단주를 재촉했다.
“상단주님, 그만 출발하시죠.”
“예, 삼공자님. 말에 오르시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예.”
곧장 말고티를 잡으려던 능운비가 순간 멈칫하며 탁발려를 쳐다봤다.
“탁 지부장.”
“예?”
“앞으로도 열심히 하게.”
“예? 예……”
답은 했지만,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능운비는 그 이유를 알았다.
아마 ‘임시’기 때문이겠지.
능운비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탁발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부장이 교체되는 일은 없을 게야.”
“……예?”
“그래 달라고 했어. 정식으로 지부가 출범했으니 본성에서 지원이 시작되겠지만, 원래 지부에 있던 이들의 지위는 보장해 달라고.”
“그, 그게……?”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괜히 있을까? 앞으로도 쭉 자네가 지부장이야. 혹시나 누가 지랄하면 나중에 나한테 말해. 아가릴 찢어 버릴 테니까.”
“주, 주군!”
“대신, 지금처럼만 해 주길 부탁하네.”
“……”
“굳이 확장하려 애쓰지 말고, 품 안에 있는 것들을 지키게. 지금처럼 웃을수 있게 말이지.”
“……”
“마교임을 버리란 게 아니야. 정파, 사파가 덤벼 오면 싸워. 우리의 영역을 침하면 똑같이, 아니 더욱 강하게 들이박아 버려. 사정 따윈 봐주지 말고. 힘이란 건 그럴 때 쓰는 거야. 알겠지?”
“……”
“그리고 지난 과오를 잊지 말아. 그대가 행한 죄는 아직 전부 씻기지 않았으니까. 지부장으로 있는 내내, 그들에게 속죄한다는 생각으로 살아.”
당부의 말을 끝낸 능운비가 어깨를 툭 하니 쳐 주곤 말에 오르자, 탁발려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곧 그 눈에 물기가 어린다.
물기가 점점 더 차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볼을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주군!”
“……”
“이 탁발려! 주군의 명을 명심, 또 명심할 것입니다!”
냅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그의 모습에 지부의 무인들이 하나둘 엎드렸다.
……젠장, 쪽팔리게.
제 볼을 긁적거리던 능운비가 홱 하니 고개를 돌리고 말고삐를 당겨 잡았다.
“출발한다.”
“존명!”
능운비가 탄 말이 앞서고, 향이가 뒤를 따른다.
좌우로 활짝 펼쳐진 학 날개와 함께 삭월대가 움직이자, 비로소 상단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섬서를 향해서.
사람들은 그 행렬의 끝이 관도를 지나 멀리 사라질 때까지 지부 앞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