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04
#1003.
지배하다 (3)
꿀꺽.
마른침이 절로 넘어간다.
‘영화라고 해도 안 믿겠다.’
이제는 만화마저도 완벽하게 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할리우드이지만, 지금 이현수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영화로 구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영상은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현수를 짓누르는 이 무거운 긴장감과 피부를 따끔하게 만드는 압박감은 그런 영상 매체로는 절대 재현할 수 없다.
개안을 하는 기분이었다.
‘따라오길 잘했어.’
아마 지금 이 전투를 보지 못했다면, 이현수는 평생을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저 머릿속으로 개념만 잡혀 있는 전력을 활용하고 움직이는 이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현수는 절대자들의 전투가 어떤 것인지 어설프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단 하나의 절대고수.
그 절대의 고수가 가진 파급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쟁을 멈췄어.’
강진호와 엘더 나이트들이 맞부딪치기 시작한 순간, 이곳의 전쟁이 멈춰 버렸다. 목숨을 노리고 싸우던 이들이 서로에 대한 경계마저 푼 채 넋을 놓고 중앙의 전투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어쩌면 이성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떤 승부를 내더라도 대세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테니까. 저 중앙의 전투가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나는지에 따라 이 전쟁의 승패가 갈릴 것이다. 그러니 굳이 목숨을 걸어가며 싸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건 그저 밖에서 본 결과에 불과하다.
전투에 돌입하여 죽고 죽이던 이들이 전투의 의미가 사라졌다는 이유로 손을 멈출 수 있을 리가 없다. 본디 전쟁이란 이득과 목적으로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원한으로 지속되는 법이니까.
이들이 전투를 멈춘 이유는 그런 이유가 아니다.
보고 싶은 거다.
평생에 걸쳐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최고 수준의 격전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에 오른 이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는 모든 이들이 궁금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무인계에서는 그 궁금증이 타 분야보다 몇 배는 더 큰 법이다.
세인들은 세계 최고의 무인으로 중국의 삼왕을 뽑는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 삼왕이 직접 싸우는 모습을 본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무인은 필연적으로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거물이 되어간다. 그리고 거물이 될수록 직접적인 전투에는 잘 뛰어들지 않게 된다.
그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해 줄 이들이 구름같이 몰려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력의 노출을 피해 전투를 기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큰 이유는 거물의 패배는 파급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총회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만약 강진호가 홍왕에게 패배해 중국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면, 총회는 박살이 났을 것이다.
총회의 모든 조직은 강진호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 강진호가 존재할 때는 유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중심을 잡아주는 강진호가 사라질 경우에는 모래알이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 강진호는 대체가 불가능하다.
강진호가 없어진다면 어찌해야겠는가.
바토르? 위긴스?
외국인인 그들은 총회의 회주를 맡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럼 방진훈?
방진훈은 강진호 같은 카리스마가 없다. 물론 방진훈도 순혈 한국인들 중에서는 최고의 무인이라 할 수 있겠지만, 강진호의 그것에는 범접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총회는 수많은 것들을 받아들였다. 마교가 총회와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고, 슈발리에들도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총회 내에는 마공이 전수되고 있고, 새로운 무학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강진호가 죽는다?
총회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일단 지금 이현수의 뒤에서 넋 놓은 얼굴로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이명환부터 통제를 벗어나 버릴 게 빤했다. 이명환, 이놈은 은근히 야심이 있다. 총회 최고의 전력이 되어버린 마염이라면, 이명환이 마염을 이끌고 단독 행동을 할 시 제지할 방법이 사라져 버린다.
마교와 슈발리에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해결되었다고 생각한 영남회와 총회 사이의 해묵은 갈등마저 다시 폭발할 확률이 높았다.
‘아니, 차라리 거기까지 갈 수 있다면 다행이지.’
그리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강진호가 없었다면 일본이 한국으로 쳐들어왔을 때 막아낼 수 없었을 것이고, 한국의 무인계는 그대로 절멸했을 것이다.
한국이 이상한 거라고?
천만에.
만약 그 전투에서 홍왕이 패배했다면, 홍왕계 역시 똑같은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 총회야 당장 중국에 개입할 여력이 없으니 조그만 영토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광활한 홍왕의 영역은 창왕과 흑왕의 손아래 갈기갈기 찢겨 나갔을 게 빤하다.
아마 차이커창의 비명 소리가 대륙 전체에 울려 퍼졌겠지.
이렇듯 절대자의 패배는 절대자를 따르는 이들 전체에 막대한 위기를 초래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쉽사리 전면에 나서지 않고, 설사 승부를 겨룰 기회가 오더라도 타인의 눈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을 평범한 무인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절대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평범한 이들이 절대자들의 전투를 볼 기회는 평생에 걸쳐도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그런데 어찌 이 기회를 놓치겠는가.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고 있던 기준과 상식이 붕괴하고 무리(武理)가 재정립되는 느낌인데.
무학에 딱히 재능이 없는 이현수가 이런 충격을 느낄 정도라면, 다른 이들이 받는 충격은 굳이 들어볼 필요도 없다. 당장 지금 그 의 앞에 있는 마스터와 위긴스조차 홀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으음.”
마스터가 침음을 흘렸다.
그 침음에 위긴스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듯 헛기침을 한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스터가 머리를 긁적였다.
“허허, 거참.”
감탄사 하나하나에 당혹과 황당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미 강진호와 손을 섞어보았고, 자신과 싸울 때는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한 마스터조차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대체 나는 무엇을 보고 살아온 건가.”
“자괴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스터. 마스터께서도 충분히 대단하십니다. 다만…… 다만, 저분들이 과도하게 인간 같지 않을 뿐이지요.”
“위로가 전혀 되지 않는군.”
“위로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스터가 그런 기분을 느껴 버린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으음…….”
마스터도, 위긴스도 나름 일가를 이룬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조차도 대체 어떻게 해야 저 경지에 범접할 수 있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근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위긴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방식대로라면 아무리 강해져도 그는 결국 강진호의 발끝조차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저 엘더 나이트들의 경지에 도달할 자신조차 없었다.
천외천.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에게 있어서 엘더 나이트는 하늘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마스터가 선망의 대상이었다면, 엘더 나이트들은 너무도 높이 있어 감히 비교할 마음도 들지 않은 신화에 가깝다.
그런 엘더 나이트들이 지금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있었다.
그럼 대체 강진호는?
그리고 그 강진호와 호각으로 다툰, 실질적으로는 강진호를 쓰러뜨리기까지 한 홍왕은 얼마나 강하다는 것인가.
평생을 무학에 매진해 왔건만, 위에는 또 위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위긴스가 입술을 핥았다.
아직 저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섣불리 뭔가 평하는 것은 이르겠지만, 만약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다면…… 지금의 이 전투를 본 것이 그의 인생을 크게 바꿀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 그건…….
‘저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위긴스의 시선이 바토르에게로 향했다.
“저…….”
공영길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바토르의 상태가 이상해서 뭔가 말을 해보려고 했지만, 바토르가 내뿜고 있는 기이한 압력이 공영길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다물고 있자.’
괜히 입을 열었다가는 바토르의 커다란 주먹이 그의 입에 틀어박힐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거대한 폭탄.
지금 바토르를 보는 공영길의 느낌이 딱 그랬다.
공영길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내려간다.
바토르의 주먹이 살짝살짝 떨리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 머리보다 큰 주먹이 꽉 움켜쥐어진 채 바르르 떨리는 모습은 아무리 간담이 큰 사람이라도 절로 모골이 송연해지게 만들 것이다.
‘왜 이렇게 화가 나신 거지?’
공영길은 바토르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전방을 향한다.
‘좋은 일 아닌가?’
워낙 수준 높은 공방이라 그 안을 내밀하게 들여다볼 능력은 없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강진호가 일방적으로 저 이상한 기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총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바토르는 저 광경을 보고 화가 난 것처럼 굴고 있었다.
게다가…….
‘바토르 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심지어 조금 거리를 벌린 채 그들과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유럽의 기사단에서도 말도 못할 긴장감이 풍겨지고 있었다.
공영길이 머리를 긁었다.
애초에 눈치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고, 무학적으로도 센스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그라서인지, 다른 이들의 반응에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야.”
그나마 공영길이 가진 큰 장점 중 하나는 타인의 지도를 올바르게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과 배움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점이었다.
모르면 물어본다. 그게 너무도 당연했다.
공영길이 작게 속삭였다.
“바토르 님 왜 저러시냐?”
바토르에게 들리지 않을 리는 없겠지만, 한국어니까 정확히 이해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안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의 바토르는 귀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으니까.
“영길아.”
“응?”
“제발 주둥아리 좀 닥치고 있어라.”
“…….”
공영길은 남의 말을 잘 들었다.
입을 꾹 다문 공영길이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를 제외한 이들은 다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강진호를 주시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놀라운 거지?’
애초에 강진호는 사람이 아니다.
강진호가 총회에 들어온 시점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와 충돌을 일으킨 공영길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강진호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공영길은 지금 당장 강진호가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제 와 새삼 강진호의 신위에 놀라는 다른 이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바토르에게로 향했다.
‘바토르 님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지금 바토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있는지는 지켜보는 공영길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새삼 깨닫게 된다.
그의 입장에서는 바토르나 강진호나 범접할 수 없는 강자이지만, 그 둘의 힘에도 분명 격차가 존재한다. 이 바토르조차 경악하게 만드는 격차가.
우드득.
바토르의 주먹에서 뼛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