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14
#1013.
정리하다 (3)
쏴아아아아아아.
물이 쏟아지며 몸을 적셨다.
씻겨 내려가는 피를 보며 강진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하나는 좋군.’
현대로 돌아와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현대에서 기계로 해야 하는 일들을 무인들이 웬만큼 대체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현대가 만들어놓은 인프라와 시스템은 인력만으로 대체할 수는 없었다.
과거, 중원에서는 목욕물 하나 받는 것도 꽤나 손이 가는 일이었으니까.
욱신.
상처로 물이 스며들자 발끝을 저리게 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강진호는 고통에 익숙하다.
하지만 그게 고통을 즐긴다는 말과 같지는 않았다. 고통이란 건 피할 수 있다면 언제나 피하고 싶은 감각이다.
강진호가 가슴에 뚫린 구멍을 매만졌다.
거의 심장까지 꿰뚫린 상처가 어느새 아물어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끔찍하기 짝이 없는 상처이지만, 속에는 새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잘도 살아 있군.’
이럴 때마다 자신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이미 열 번은 죽었을 상처를 입고도 태연하게 샤워를 하고 있지 않은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강진호는 강해졌다.
총회에 처음 투신했을 때의 강진호와 지금의 강진호는 비교 자체를 불허한다. 그때의 강진호가 지렁이 수준이라면, 지금은 용은 아니더라도 이무기 수준까지는 강해졌다.
그런데 부상을 입는 빈도 자체는 늘어났다.
강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육체에 가해지는 위협을 제거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강해지면서 오히려 더 큰 부상을 입고 있었다.
지금의 상처나, 홍왕을 상대하며 입은 상처나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처들이다.
“흠.”
샤워기를 잠근 강진호가 머리를 털어내고는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베인 상처와 터진 상처들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피육의 상처 정도는 일주일이면 완벽하게 나을 테니까.
상처를 입었더라도 살아남기만 한다면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에는?
다음에도 이런 상처를 입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건 아니다. 지금껏 강진호가 그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강진호가 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때로 불운을 감수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운이 아니라고 해서 불운이 그에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한 번의 불운으로도 목숨이 사라질 수 있는 곳이 전장이다.
다시 말하면?
‘다음에는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
전장에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강진호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곳이 전장이다. 그렇다면 전장에 서는 이는 자신의 목숨을 잃을 각오 역시 해야 한다.
그게 룰이다.
전장에 나서면서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는 이는 감히 전장에 설 자격이 없다.
하지만 지금, 강진호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과거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적천마존일 때 그는 전장을 피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전장을 두려워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투 속에서 살아 있다는 감정을 실감하기도 했다.
적이 존재한다.
그것만으로도 싸울 이유는 충분했다.
당시에는 그게 너무도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강진호는 왜 적천마존이 그토록 전장을 즐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어째서 과거의 적천마존이 될 수 없는지를 깨달았다.
‘잃을 것이 없었구나.’
적천마존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야 할 것도, 지키고 싶은 것도, 그리고 마음 준 곳조차 없었다.
전장에서 그날 죽는다고 하더라도 아쉬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적천마존에게 있어서 전장과 전장이 아닌 곳은 다를 게 없었다.
그에게는 집이라고 할 수 있는 마교조차도 조금의 안락함을 주지 못했으니까.
적천마존을 움직이게 한 것은 살아야 한다는 맹목적인 생존욕과 가족들을 한 번은 더 보고 싶다는 끝없는 그리움이었다.
서글픈 인생.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저 강함만을 끝없이 좇은, 서글프기 짝이 없는 인생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적천은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다.
잃을 것이 없고, 두려울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강진호는 어떤가.
오늘 강진호가 엘더 나이트와 싸우다 죽었다면 적천마존처럼 미련을 두지 않을 수 있었을까?
강진호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에게 찾아온 두 번째의 죽음을.
강진호는 그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남은 것은 그저 가족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아쉬움뿐이었다. 생이 끝난다는 사실 자체에 미련을 두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렇게 죽을 자신이 없다.
그러기에 그는 이 세상에 너무도 많은 것을 남겼다.
함께하고 싶은 동료.
같이하고 싶은 사람.
그를 반겨주는 가족.
그리고 그를 필요로 하는 이들.
세 번째의 삶은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단 한 번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행복’이라는 낯간지러운 것조차 지금은 그와 함께하고 있다.
강진호가 고개를 내젓고는 옷을 움켜잡았다.
이번 전투는 과거의 전투와는 달랐다.
흥분해서 날뛰기 시작하면 머리가 백지장처럼 비어버리기 일쑤였던 강진호가 이성을 온전히 잡은 채로 전투에 임해서인지, 그게 아니면 강진호의 마음이 변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그의 전투에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한 ‘우려’라는 감정이 그의 전투와 함께했다.
두려움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 그는 전투를 주저했다.
당당히, 그리고 과감하게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전투가 그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렀을 때 벌어질 일을 ‘우려’했다.
이건 인간 강진호로서는 옳은 방향인지 모른다.
하지만 무인 강진호로서는 명백한 퇴보다.
‘나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는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인간 강진호의 길을 걸어야 할지, 그게 아니면 무인 강진호의 길을 걸어야 할지.
끝이 없는 딜레마였다.
걸레짝이 되어버린 옷을 바라본 강진호가 한숨을 쉬었다.
‘이건 못 입겠네.’
이런 옷을 입고 밖에 나갔다가는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경찰에 연행되고 말 것이다. 영국의 경찰들이 한국의 경찰보다 자비롭다면 모르겠지만.
“흠.”
강진호가 미간을 좁혔다.
그의 눈에 테이블에 놓여 있는 검은색 정장이 보였다.
한국이고 영국이고 새 옷을 입어야 할 때마다 이런 정장이 준비되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래도 강진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옷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별수가 없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릴 수는 없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정장을 대충 다 차려입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위긴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다.
“무슨 일이지?”
“로드, 마스터께서 로드를 뵙고 싶어 합니다.”
“일임했을 텐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위긴스가 머리를 긁었다.
“마스터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로드의 입에서 직접 듣지 않은 말은 의미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번거로우시더라도…….”
“알았다.”
“예. 그리고 의사를 불러두었으니, 회담이 끝나면 진료를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굳이?”
“……로드.”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로드의 회복력이 보통 사람을 능가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로드가 사람이라는 것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손상되면 회복을 필요로 합니다.”
“음.”
“자연적으로 놔두면 완벽하게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의사는 그 기간을 줄여줄 겁니다. 원탁에서 보증하는 솜씨 좋은 의사이니만큼 진료를 받아보시길 권합니다.”
위긴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일반적인 의사는 아니니까요.”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렇게 하지.”
위긴스가 저리 권하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 진료를 받기 싫어서 의사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니까. 도움이 된다면 진료는 받는 쪽이 낫다.
“그럼 이쪽으로.”
위긴스가 앞서서 걸었다.
강진호가 고소를 머금고는 위긴스의 뒤를 따랐다.
“무슨 말로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다시 봐서 반갑다는 말을 하기에는 몇 번 눈이 마주친 것 같고, 그렇다고 ‘안녕하세요’ 하는 말도 애매하고.”
“굳이 인사가 필요하지는 않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지금 딱 좋은 인사말을 찾았습니다. 나이스한 패션이군요. 사람이 달라 보입니다.”
“…….”
강진호가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로 장착하게 된 정장으로 평가가 올라간다는 것은 어쩐지 서글픈 일이었다.
“안색이 나빠 보이는군.”
강진호의 말에 마스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안색이 좋을 수가 없다.
우선 마나를 강탈당한 채 감금당해 있던 시간은 그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신체는 이미 고령에 접어들었다. 그런 마스터가 젊은이들처럼 활동할 수 있던 이유는 마나의 보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시간을 겪으면서 노화가 꽤나 진행이 되었다. 지금 마나를 되찾아 몸을 회복하고는 있지만, 과거와 같은 완전한 몸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원탁이 강진호의 손에 풍비박산이 나는 걸 지켜본 정신적인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예상한 일이라고 해서 충격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든 부모가 죽는 것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지만, 막상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은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이 든 부모라…….’
마스터의 쓴웃음이 깊어졌다.
정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지금 그는 원탁을 그리 여기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나약해지고…… 과거에는 한없이 강인해 보이던 원탁이 이제는 그에게 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를 버릴 수 없듯이 그도 원탁을 버릴 수 없다. 그렇기에 이처럼 강진호와 대화를 하려 드는 것이다.
“회주님.”
“음.”
“일단…….”
마스터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케이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잘 포장되어 있는 갈색의 시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질 좋은 담배입니다.”
“음?”
“뇌물이라고 해두죠.”
“고맙군.”
뇌물이라는 말에도 강진호는 거리낌 없이 시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가라앉은 눈으로 시가를 바라보았다.
“……이거, 어떻게 피우는 거지?”
“…….”
앞을 잘라내고 불을 붙이라는 말을 들은 강진호가 신기한 눈으로 시가를 보며 앞을 잘라낸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불꽃을 피워 올려 시가에 불을 붙였다.
숙련된 이들처럼 제대로 불을 붙이지는 못했지만, 맛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깊게 시가를 빨아들인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초코 맛이 나는데?”
“…….”
마스터는 전장에서의 강진호와 평소의 강진호 사이에 왜 이런 커다란 괴리가 생기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총회의 누구도 풀지 못한 난제였고, 마스터에게는 너무 버거운 숙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