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16
#1015.
정리하다 (5)
마스터는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농담이겠지?’
당연히 농담일 것이다. 이만한 거물들이 그런 이유로 움직일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더구나 저 반응은 뭔가.
위긴스는 괜히 말했다는 듯이 떨떠름해하고 있고, 강진호도 조금은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알겠군.’
어쩌면 이 총회의 원정은 마스터가 생각하는 것처럼 체계적인 계획을 가지고 이뤄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나이트 르보의 죽빵을 갈기러 왔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충동적이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럼 정말 지금 딱히 대책이 없는 건가?’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강진호는 몰라도 위긴스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마스터가 알고 있는 위긴스는 냉정하고, 이성적이고, 철두철미한…….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인마!’
위긴스가 맹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본 마스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 마스터의 시선을 느꼈는지 위긴스가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사람이 항상 계획적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허허…….”
마스터는 웃고 말았다.
아무리 사람이라는 게 환경에 좌우되는 존재라고는 하나, 그 위긴스가 저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거참.’
좋게 말하면 여유가 생긴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나사가 풀렸다고 해야 한다. 마스터는 될 수 있으면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정말 제가 반기를 드는 상황은 생각도 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렇다.”
“무슨 배짱으로…….”
마스터가 입을 가렸다.
이야기가 전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황당함 때문인지, 아까부터 자꾸 쓰지 말아야 할 워딩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강진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가볍게 입을 열었다.
“거부할 이유가 없으니까.”
“예?”
“어느 쪽도 손해는 아니다. 너는 원탁을 다시 움직일 수 있어서 좋고, 우리는 원탁의 협조를 구할 수 있으니 좋지.”
“그건 협조라고 할 만한 게 아닙니다. 겁박이라고 해야 할 일이지요.”
강진호가 가볍게 웃었다.
“이해를 못하는군.”
“……예?”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 위치와 입장이 어디인지를 자각하는 게 좋아.”
“…….”
마스터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걸 강진호의 협박이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너는 지금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는 걸로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틀린 생각이지. 조금만 따져 보면 알 텐데?”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물러나고 다른 나이트가 원탁의 전권을 잡게 된다면, 그는 과연 우리에게 저항하려 할까?”
마스터의 눈이 흔들렸다.
이건 생각하지 못한 문제다.
강진호와 총회의 선택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마스터를 꼭두각시로 내세워서 원탁을 휘두르거나, 그게 아니면 위긴스가 직접 원탁을 다스리거나.
강진호가 위긴스를 원탁에 배치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 자신이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스터가 물러나고 제삼의 존재, 살아남은 나이트 중 하나가 새로운 마스터가 된다면?
그는 과연 강진호와 위긴스의 압박을 거부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지.’
총회가 누구를 새로운 마스터로 만들지는 빤하다.
이번 전투를 겪고 살아남은 이 중 하나를 마스터로 만들 것이다. 그럼 자신이 직접 강진호의 강대함을 겪고, 엘더 나이트들까지 쓸려 나가는 것을 본 이가 과연 강진호에게 대항하려 할까?
자기도 나이트 르보 꼴이 될 게 빤한데?
‘무리다.’
이건 총회의 입장에서는 최상의 결과다.
마스터처럼 최소한의 생각과 최소한의 저항조차 할 수 없는 꼭두각시가 원탁을 장악하고, 그 장악력을 바탕으로 원탁을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을 테니까.
마스터가 총회의 입장이라면 주저 않고 그런 방향으로 일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럼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야기가 맴도는군.”
강진호가 시가를 깊게 빨았다.
“빙빙 돌리지 말고 핵심만 이야기하지, 마스터.”
“예, 회주님.”
“나는 너를 원한다.”
“…….”
강진호가 선명한 눈으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내게 복종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나는 원탁을 움직이고 바꾸는 데 너만한 적임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원탁의 모두를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니까 확언할 수는 없지만. 위긴스마저 같은 생각이라면 확인할 필요도 없겠지.”
“일단 그 평가에는 감사드립니다.”
“간단한 이야기야. 우리가 원탁에게서 도움을 받으려면, 원탁이 강해져야 한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원탁을 장악하겠답시고 전력을 약화시켜 버리면 그 힘이 한국까지 닿지 않지. 그렇다고 병력을 차출해 데려간다고 해도 포로를 잡은 꼴밖에 안 될 테니 제대로 된 협조를 바랄 수도 없겠지.”
위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원탁을 활용하기 위해서 원탁을 좀 더 강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그 적임자는 너라는 거지.”
“…….”
마스터가 한숨을 쉬었다.
그에 대한 고평가, 그리고 원탁에 대한 저평가, 게다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얼마든지.”
“그 모든 계획의 전제는 회주님이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제가 회주님께 협조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 같군요. 저를 믿으십니까?”
“전혀.”
강진호가 어이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나는 내 식구가 아니면 안 믿어. 그리고 너는 내 식구가 아니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찌?”
“원하는 걸 주지.”
“…….”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원탁의 문제를 느꼈겠지. 그리고 원탁을 개혁하지 않으면 결국 도태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사실은 좀 급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게 문제다. 지금 마스터의 지배력은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다.
나이트 르보들에게 제압당하여 마스터의 직위를 상실했다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그것보다 엘더 나이트들이 전멸했다는 사실이 더 크다.
일반적인 원탁의 무인들은 전자를 더 크게 느끼겠지만, 실질적으로 마스터의 지배력이 발휘되어야 할 나이트들에게는 후자가 훨씬 크게 다가온다.
마스터가 무력적으로 그들을 압박할 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스터가 아무리 원탁 내에서는 강자라고는 하나 나이트가 둘이면 비등하고, 셋이면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통제가 먹힐 수가 없다.
개혁은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개혁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지만, 그 개혁을 이룰 힘이 없는 상황이다.
“밀어주지.”
“회주님께서 말입니까?”
“음.”
마스터가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하려 들 때, 위긴스가 선수를 쳤다.
“포털을 설치할 겁니다.”
“포털?”
“예. 마스터와 로드의 집무실을 서로 잇는 것도 좋고, 그게 아니라도 적절한 곳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죠. 포털을 설치해서 로드가 유럽을 오가게 만들 수 있으면 원탁에 대한 지배력은 고민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마스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양쪽에서 마법진을 설치해 포털을 연다면, 강진호가 자유롭게 유럽을 오갈 수 있다.
그리고 이 방법의 가장 큰 장점은 누구라도 원하는 순간 마법진을 해체해 포털을 닫아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스터가 원할 때만 강진호를 소환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뜻이다.
나쁘지 않다.
아니, 활용할 수 있는 방안 중에는 최상이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돼. 나는 너를 돕는다. 나의 무력뿐 아니라 원하는 것은 최대한 도와주지. 너는 그 힘을 바탕으로 원탁을 다시 장악하고 개혁한다. 그리고 그 개혁의 대가로 되찾은 힘을 갖고 우리를 지원해 주면 된다.”
“하나…….”
“이 동맹의 대가로 하나 더 얹어주지.”
강진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동맹이 지속되는 한, 총회가 원탁을 넘볼 일은 다시는 없을 거다. 우리는 유럽으로 오지 않아.”
마스터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차마 먼저 물어볼 수 없던 말이다.
강진호는 자신이 줄 것을 모두 주었다.
이제는 마스터가 강진호의 말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릴 차례다.
총회는 이미 그들에게 모든 조건을 제시했다. 그 조건은 마스터가 생각하기에도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최상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은 조건들이 연달아 들어왔으니까.
그러니 결국 그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강진호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가.
그 결론은 이미 내린 뒤였다.
“회주님.”
“음…….”
“아직 마스터의 자리를 되찾은 것은 아니라 민망하기는 하지만, 저는 원탁의 마스터의 자격으로 회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원탁과 총회의 영구적인 동맹을. 서로 이득만을 좇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다면, 원탁은 영원히 총회의 친구로 남을 것입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환영한다. 받아들이지.”
강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스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스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강진호의 손을 맞잡았다.
둘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쉽게 풀릴 수 있는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멀리 돌아왔군.”
“그러게 말입니다.”
“세부 사항은 위긴스와 논의하지.”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강진호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마스터는 한참 동안이나 그런 강진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강진호가 밖으로 나간 뒤에도 그의 시선은 강진호가 나간 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스터.”
“여러모로…….”
마스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하기 힘든 분이로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스터가 회주님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생각 이상으로 단순한 분이시니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겉으로 보이기엔 말이죠.”
위긴스가 고소를 머금었다.
“저도 아직 회주님이 어떤 분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충동적인 것 같으면서도 계산적이고, 이성적인 듯하면서도 감정적이신 분입니다.”
“복잡하다는 뜻이로군.”
“부정할 수는 없군요. 하지만 한 가지 대원칙은 확실하게 존재합니다.”
“대원칙?”
“자기 사람이라 생각되는 이들은 끔찍하게 아낀다는 점이죠.”
위긴스가 빙그레 웃었다.
“저는 마스터 역시 회주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끔찍한 일이로군. 이 나이에 다른 사람의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니.”
“나이는 회주님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아, 그건 그렇군.”
마스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큰 변화가 시작되겠군.’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게 과연 잘한 결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택한 것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그는 이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해야 한다. 강진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총회에서 얻어낼 수 있는 이득을 최대한 얻어내는 것. 그게 마스터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스터가 고개를 돌려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능글맞게 웃는 그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자네, 원래는 그렇게 얄미운 캐릭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사람은 다 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짜증 나는 놈.”
마스터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지루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