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24
#1023.
재회하다 (3)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강진호가 마스터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아이러니하군.’
지금 그들은 공항에 나와 있었다.
영국에 들어올 때는 숨어서 빠져나간 공항을 당당히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 무척 재미있게 느껴졌다. 더구나 이 많은 인원이 VIP 라운지 하나를 완전히 점거하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였다.
“가시는 길에 불편함이 없도록 준비했습니다. 혹여 불편한 점이 있다면, 승무원에게 말씀하시면 바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동맹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음.”
강진호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따로 대우를 요구할 생각은 없지만, 해주는 대우를 굳이 거절할 생각도 없다. 그리고 이건 강진호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거절할 만한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허리 좀 펴고 가겠군.”
바토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일등석 좌석조차도 힘겨워하는 바토르에게 다시 짐칸에 오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전용기를 한 대 더 준비하는 쪽이…….”
“괜찮아.”
강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마스터는 전용기를 두 대 준비하려 했다. 하나는 일반 무인들을 위한 전용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간부진들을 위한 전용기.
간부진들을 특별 대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수를 위해 개조된 전용기는 그만큼 좌석이 넓기 마련이고, 바토르가 조금 더 편히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제 몸이 큰 걸 남에게 이해해 달라고 하면 안 되지.”
“쳇.”
바토르가 툴툴대기는 했지만, 대놓고 불만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일등석 정도면 적당히 앉을 수 있기도 하고.
그리고 바토르 역시 특별 대우를 받는 걸 딱히 원하지 않았다.
“마스터.”
위긴스가 빙그레 웃으며 마스터에게 말을 건넸다.
“한국에서 포탈 준비를 끝마치는 대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서둘러 주게나.”
마스터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저들이 반발하고 나선다면, 나는 더 이상 막을 힘이 없네.”
“엄살이 심하시군요.”
“엄살이겠는가, 이 사람아.”
마스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살다 보니 알게 되더군요. 명예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지만,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스터도 그 사실에 동감했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 명예보다는 실리를 택한 쪽이었으니까.
“예전에는 낭만이라는 게 있었는데 말이야.”
“지금도 낭만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생긴 것뿐이죠.”
“세상이 나를 두고 너무 앞서가는 느낌이야.”
피식.
살짝 터져 나온 비웃음에 마스터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강진호가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마스터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죄송합니다, 어린것들이.”
생각해 보면 그들이 강진호의 앞에서 세월을 논한다는 게 웃긴 일이기는 하다.
“아니, 그런 것보다는…….”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보통 세상이 가면 갈수록 실리적이고 각박해져 간다고 생각하지만, 강진호가 보기로는 그 반대였다.
오히려 지금의 세상이 몇 배는 더 따뜻하고 아름답다.
중원에서는 쥐꼬리만큼 작은 권력을 잡기 위해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태연하게 자행되었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백, 수천의 인간이 죽어 나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현대는 사람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인식과, 천륜은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실하게 박혀 있지 않은가.
‘말해봐야 모르겠지.’
역사서만 보더라도 권력 때문에 부모자식 간의 살육이 심심찮게 일어났는데, 왜 다들 저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강진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스터를 강진호가 살던 당시의 중원으로 데리고 간다면 그 참담함에 말을 잇지 못할 것이다.
강진호가 조금 당황해하자 마스터가 빙그레 웃었다.
‘도무지 이 사람은 그 속을 짐작할 수가 없구나.’
보통은 어떤 사람과 지낸 시간이 길어지고,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 이해하기가 쉬워져야 하는데, 강진호는 그 반대였다.
강진호라는 사람을 겪으면 겪을수록, 마스터는 강진호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지금도 보라.
그를 찍어 누르고, 원탁을 뒤집어엎어 버린 강진호와 지금 눈앞에서 마스터의 말에 당황하는 강진호를 어떻게 동일 인물이라 볼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마스터는 그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 인식하고 절대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 느낌이 달랐다.
이익을 위해 자신을 숨겨 타인을 속이는 게 아니다.
그저 강진호가 원래 그런 사람일 뿐이다.
마스터는 강진호가 바다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바다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잔잔한 바다의 모습만을 생각하지만, 바다를 잘 아는 이들은 폭풍이 몰아칠 때의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나도 각오를 해야지.’
지금까지 그는 강진호라는 바다를 그저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원탁이라는 배를 몰고 강진호라는 바다를 겪어야 한다.
그가 얼마나 조타를 잘해내느냐에 따라 원탁이라는 배가 가라앉을 수도 있고, 더 넓은 대양으로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회주님.”
“음.”
“동맹을 환영하는 의미로 일차적인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성에 차지 않으시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슬쩍 돌려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위긴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게 받지.”
“예.”
마스터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포털이 열리면 원탁을 다시 한 번 방문하는 걸 잊지 말아주십시오. 중요한 일입니다.”
“명심하지.”
지금의 마스터는 원탁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다.
그가 내세워야 할 무력인 엘더 나이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의 권위는 나이트 르보에게 밀려나면서 훼손되었다.
“얼마나 바꿀 셈이지?”
“근본부터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스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마스터 역시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그중 그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이런 방식으로는 원탁이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강진호라는 완벽한 구심점을 바탕으로 뭉친 총회는 원탁을 위협할 만큼 강해졌고, 애매한 연합체를 유지한 원탁은 과거에 비해 약해졌다.
단순히 총회와의 비교만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다. 엘더 나이트들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한 이상, 자신들이 과거보다 약해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방법이 없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원탁을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강진호의 힘이 필요했다.
그가 잃은 힘과 권위는 강진호를 등에 업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더한 힘과 권위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호가호위의 전형이긴 하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여우가 되어줄 수 있는 마스터였다.
“받기만 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회주님은 이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음.”
강진호가 볼을 긁었다.
무공적으로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서양의 무학은 강진호에게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진득하게 연구를 할 시간이 있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강진호에게는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더구나…….
“일단은 위긴스와 함께 고민해 볼 부분이 하나 있다.”
“예?”
“내가 알고 있는 특정한 무학이 너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익힐 수 있다면 좋겠지.”
마스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강진호의 무공이라면 절대 평범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새로운 무공을 익히기 어려운 마스터이지만, 강진호의 무학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욕심이 생겨났다.
“위긴스와 연구라시면?”
“언어의 문제가 있다.”
“아…….”
그 한마디로 마스터는 모든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학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지만, 무학을 전수하기 위해서는 결국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무학은 그 문화권 특유의 함의(含意)가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그 함의를 다른 언어로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강진호라고 해도 골머리를 썩을 만한 일이다.
“그렇게까지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고받는 것이 동맹이겠지.”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시도는 해보는 거니까.”
“그런 정도라면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말이지요.”
그때,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강진호를 비롯한 이들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된 모양이군요.”
“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스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음에 보지.”
마스터가 두 손으로 강진호의 손을 맞잡았다.
“회주님.”
마스터가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는 우리의 동맹이 선의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하지만 선의로 시작되지 않은 관계라고 해서 선의로 이루어진 관계로 발전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스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계산으로만 이루어진 얄팍한 관계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강진호도 노력해 달라는 말이다.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건 네게 달려 있겠지.”
마스터도 마주 웃었다.
“그럼 좋은 관계가 되겠군요.”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자동문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강진호를 보며 마스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터.”
“음.”
다른 이들은 모두 자동문 안으로 들어가고, 위긴스만 남은 상황이었다.
“약속하신 정보는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걱정할 것 없네. 우리도 동아시아의 정보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까.”
“마스터가 계셔주셔서 다행입니다.”
“맘에도 없는 소리를.”
마스터가 강진호가 떠나는 자리를 보며 작게 뇌까렸다.
“이제 큰 변화가 시작되겠지. 원탁의 변화는 원탁만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세계의 정세가 지금 이 순간부터 뒤틀리기 시작할 걸세.”
“그렇겠지요.”
“격변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최선을 다해야 할 걸세. 자네나 나나.”
“앞으로도 많은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그럼.”
위긴스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자동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쯧.”
모두의 모습이 문 안으로 사라지자, 마스터가 가볍게 혀를 찼다.
폭풍이 한차례 쓸고 지나간 느낌이다.
“이 나이에 격변이라니.”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뭐랄까, 꼭 걱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가슴을 채우는 기대감을 느끼며 마스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그도 젊음을 자부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변화가 즐거운 것을 보니.
창가로 다가간 마스터가 강진호들이 탄 비행기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