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31
#1030.
달려가다 (5)
“미치셨어요?”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다.
예의를 중시하는 사회이니만큼 상급자가 연장자에 대한 예의가 중요하다. 마음속으로는 연장자를 경외하는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외부적으로는 연장자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그게 사회생활이다.
그리고 조규민은 이런 사회생활에 통달한 사람이었다.
개차반 같았던 회장 아들의 비서이자 경호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조규민이 아닌가. 엿 같은데 웃는 것과 마음에도 없는 예의를 차리는 데 있어서는 신선의 경지에 들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조규민이 십여 년이 넘는 사회생활 동안 만들어낸 가면을 순식간에 깨부숴 버렸다.
[어이없게도 제정신이다.]“아닌 것 같은데?”
[제 정신이라니까.]“제 정신인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예?”
[형이 오죽하면 이러겠냐. 부탁 좀 하자, 규민아.]“업무 이야기 하는데 형이라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예, 조 실장님. 부탁 좀 드립시다. 제가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아니, 재경이 무슨 탁아소도 아니고, 시킬 걸 시키셔야죠. 병아리 데려다가 가르쳐서 닭 만들고 돌려달라니. 이게 뭡니까? 우리 양계장은 취급 안 합니다.”
[공짜로 부려먹겠다는 게 아니잖아. 돈 준다니까, 돈. 적절한 대가를 지급하겠다니까요? 조 실장님, 협의만 되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거참.”
조규민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총회에 돈이 그렇게 많으세요? 기부 천사도 아니고, 저번부터 계속 재경에 돈을 부으시네요. 이러다가 우리 이번 분기 최대 실적 찍겠어요. 대 총회 영업부라도 개설해야 할 판이네.”
[돈이 많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죽어서 이런다. 사람이! 내가 죽겠다! 내가!]조규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총회의 사무직들을 데려다가 신입 사원 연수를 시켜달라니. 경력직 연수도 아니고 신입 사원 연수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재경과 경쟁하는 외부 기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면 그 아이디어 낸 놈 정신 감정부터 해보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총회는 그나마 재경과 직접적으로 부딪히지 않는 기업이니 들어줄 가치라도 있을 뿐.
“상황이 그렇게 심각합니까?”
[이제 법인화도 들어가야 하는데. 장난 아니다. 이러다가 내가 분신술 쓰게 생겼어.]“그런 것도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인마!]“……그렇겠죠.”
조규민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지만, 듣고 보니 그리 나쁜 일도 아니다. 어차피 신입 사원 연수야 주기적으로 돌아가는 일이고, 하는 김에 몇 명 끼워 넣는다고 별 문제야 생기겠는가.
“인원이 얼마나 되는데요?”
[일단 한 삼백 명 정도 생각하고 있는데.]“다시 묻는데, 미치셨어요?”
[안 미쳤다고, 이 새끼야!]조규민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미친놈이 자기가 미쳤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으니까 이건 미쳤다고 봐야 한다. 제 정신 박힌 사람이 할 만한 제안이 아니다.
“삼백 명이면 교육 팀을 새로 짜야 하는 수준인데! 그리고 바라는 게 화합이나 기업 문화 쪽이 아니라 실무잖아요. 세상에 어느 회사가 남의 회사 직원한테 실무를 가르쳐 줍니까.”
[그러니까 돈 준다잖아, 인마! 돈!]“돈이면 다 될 거라고 생각하는 그 썩어빠진 근성 좀 버리세요!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진짜?]“거의 전부죠. 거의.”
완전히는 아니고.
대충 상황을 정리한 조규민이 넌지시 물었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이거 강진호 씨 아이디어는 아니죠?”
[아냐. 그 양반 실무에 관심 없는 거 알잖아.]그럼 이현수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라는 소린데.
알 것 아는 양반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떼를 쓰고 있다. 짜증이 나기 이전에 측은함이 들었다.
‘오죽하면.’
이현수가 총회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건 조규민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일 욕심이 강하고 본인이 직접 처리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점에서는 조규민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문제는 조규민은 자신이 손을 뗐을 경우, 그 일을 대신 맡아줄 팀이 있는 반면, 조규민은 대체 자가 없다는 점이다.
“그냥 외부에서 인력 영입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돈이 없는 회사도 아니고, 복지 좀 갖추고, 연봉 챙겨준다고 하면 일할 사람 넘쳐 날 텐데. 안 그래도 실업률 높고, 청년 실업이 사회 문제가 되는 세상인데, 생각 좀 해보시죠.”
[그게 되면 내가 이러겠냐? 외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야 인력수급하면 되지. 그런데 외부로 못 돌리는 일이 있단 말이야. 우리 특이성 알잖아.]“……알긴 아는데.”
확실히 골치가 아플 만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들이 벌이는 일을 수습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어설프게 관리했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다. 결국 무인계라는 곳의 특성을 알고 이해하는 이들을 쓸 수밖에 없다.
[황당한 이야기라는 건 아는데, 그만큼 절박하다. 그러니까…….]“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이거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회장님에게 올려야 해요.”
[……그 회장님.]전화기 너머에서 이현수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만도 하지.’
평생 업무적으로는 패배를 모르고 살던 이현수가 황정후 회장에게 팬티까지 탈탈 털리지 않았던가. 비행기 한 번 태워주는 대가로 황정후가 총회에서 뜯어낸 돈은 어마어마했다.
액수만 놓고 보면 사기꾼이라고 불려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수준이다.
“회장님이 받아들이시면 바로 진행할 수 있겠지만, 저도 회장님 속은 알 수가 없어서 어떻게 나오실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사업이 관련된 일에는 민감하신 분이라 거절할 확률이 훨씬 더 높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한 번 부탁하자.]“네. 그럼 지금 보고하고 바로 전화 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조규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가 점점 부탁이 희한해지네.’
총회의 재경이 암묵적인 협조 관계를 구축한 지는 꽤나 되었지만, 과거 총회가 부탁하는 일은 그래도 상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총회의 부탁이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흐르는 느낌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조규민이 회장실로 향했다.
황정후의 반응이 궁금하기는 조규민도 마찬가지였다.
* * *
“해줘.”
“…….”
분재를 다듬던 황정후가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조규민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황정후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게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할 일인가?’
“회, 회장님.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뭐가 어려운데?”
“……교육해야 하는 사원들에게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해야 할지도 문제고.”
“새로 개업하는 회사하고 협력 관계를 맺기로 해서 연수 차원에서 가르친다고 해.”
“예?”
“예전에는 흔했어, 이런 거. 해외 건설 현장에라도 나가면 말도 안 통하는 애들한테 개념부터 가르쳐야 했지. 그것도 했는데, 같은 한국인 가르치는 게 뭐가 그리 문제라고.”
“하, 하지만.”
“왜? 다른 문제 있어?”
조규민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양쪽에 걸쳐 있는 입장이긴 하지만 재경에 대한 애정도 총회에 대한 애정에 못지않습니다.”
“내 앞에서 잘도 양쪽에 걸쳐 있다는 말을 하는군.”
“죄송합니다.”
“괜찮아. 사실이니까.”
황정후가 피식 웃었다.
“양쪽을 이어줄 사람이 필요한 건 오히려 내 쪽이니까.”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인 황정후가 웃으며 말했다.
“계속해 봐. 뭐가 문젠지.”
“적당한 대가를 받는다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은 저도 동일합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저희가 총회의 해결책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부탁을 들어주다 보면 나중에는 선을 그어야 할 날이 올 겁니다. 그때 관계가 경색되기보다는…….”
“왜 선을 그어?”
“……예?”
황정후가 혀를 찼다.
“너는 뭐야?”
“무슨 말씀이신지?”
“너는 뭐하는 놈이냐, 이거야.”
“저, 저는 재경의 사원으로…….”
“헛소리하지 말고.”
조규민이 입을 닫았다. 황정후가 하는 말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여기 회사야. 회사란 결국 팔아먹는 놈들이 다니는 곳이지. 쉽게 말하자면 장사꾼들이라 이거야. 너는 장사꾼 아냐?”
“……맞습니다.”
“장사꾼이 뭔 정치인처럼 굴고 있어. 멀리 봐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멀리 보는 목적은 회사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는가지. 저놈들이랑 우리랑 엮여서 나쁠 게 뭐가 있어?”
“아…….”
“돈 많지. 할 일 없지. 돈을 어디다 써야 하는지도 모르는 놈들이지. 그런 놈들이 우리 쪽에 연수까지 보내서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앞으로는 우리한테 더 의지하려 들 거 아냐?”
“예, 그렇습니다.”
“가만 보니 그놈들이 지금 뭘 해야 할지 우왕좌왕한다는 말이지. 이럴 때 살살 도와주면 결국 사업을 해나감에 있어서 우리 쪽에 맡기는 일이 많아질 거야. 그게 다 돈이야, 그게. 게다가 저놈들은 돈 귀한지 몰라서 비용을 깎으려 들지도 않아. 저런 호구들이 어디 있어.”
“…….”
한마디 한마디가 틀린 게 없었다.
황정후가 씨익 웃었다.
“돈을 어디다 써야 할지도 모르는 졸부들이 돈 쓸 곳을 찾고 있는데, 그걸 안 먹으면 바보지. 그리고 이놈아, 돈 주고 연수시키는 건 우리가 아니어도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거절하면 방법이 없을 것 같아? 저 이현순가 하는 놈이 그리 멍청하지는 않다. 좀 편해보겠다고 이쪽으로 일을 밀고 있을 뿐이지.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겠다고 돈을 날려먹는 짓은 하지 말라, 이 말이야. 장사꾼이라면!”
“명심하겠습니다.”
머리가 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장사꾼이라면 상대가 제시한 걸 그냥 받아먹으면 안 돼.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이쪽에서 제시할 줄도 알아야지.”
“예?”
황정후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지어졌다.
“안 그래도 내가 이걸 해보려고 몇 년을 벼렸는데, 이놈들이 판을 깔아주는군. 잘됐어. 암, 잘됐지. 그 이현수인가 뭔가 하는 놈한테 전해. 총회와 재경의 협력을 돈독히 하는 의미로 모든 교육 과정을 무료로 해주겠다고.”
조규민이 눈을 크게 떴다.
말이 다르지 않은가. 조금 전에는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야 한다고 한 황정훈데, 갑자기 왜…….
“대신!”
황정후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치듯 말했다.
“산업 협력이라는 건 중요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 그러니까 윗대가리가 일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 말이야. 그러니 우리 조건은 간단해. 강진호, 그놈! 그놈도 연수 참가하라고 해!”
“…….”
아, 이거구나.
몇 년 동안 벼렸다는 일이.
하기야 그러고 보면 회장님이 몇 번이나 강진호 씨에게 업무 가르치려다가 다 실패했지. 그놈의 피자집 성공하는 꼴만 보고.
“강진호가 참가하면 교육 과정 최고급으로 맞춰주고, 업무 비숙련자는 AS도 해준다고 해! 대신!”
황정후가 씹어 먹듯 말했다.
“그놈이 참가 안 하면 우리도 안 해! 국물도 없어!”
조규민이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을 벼려온 황정후의 승부수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총회로 날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