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45
#1044.
연수받다 (4)
“…….”
박유민은 얼어붙어 있었다.
‘나, 전에는 이거 어떻게 찍었지?’
촬영장을 보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예전에도 분명 한 번 경험한 일이지만, 도무지 이 분위기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남들은 경험이 쌓이면서 긴장이 풀린다는데, 박유민에게만큼은 그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되레 긴장감이 높아진다. 이미 한 번 흑역사를 적립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진정하자.’
그가 CF를 찍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팀은 난리가 났다. 아무리 그들이 TV에 자주 나오는 사람들이라지만, CF는 그들과 그리 연관이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공중파에 얼굴을 한 번 들이미는 일만 있어도 반응이 터져 나가는데, 공중파 방영용 CF는 격이 다른 것이다.
‘역시 유민이 형!’을 외치는 팀원들의 반응이 박유민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정말 어색하지 않게 찍어야 돼.’
박유민이 주먹을 불끈 움켜잡았다.
이건 그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박유민이 이번에도 얼을 타면 관계자들이 다음에는 프로게이머를 CF에 섭외하는 걸 망설일 수밖에 없다.
흑역사를 청산하는 동시에,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줘야 한다. 그게 선배로서의 역할 아니던가.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한 박유민이 눈에 힘을 주는 순간, 매니저 겸 따라온 오진형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감독님 오신다.”
“예!”
앞쪽에서 한 사람이 그에게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박유민?”
“예? 아, 예! 박유민입니다!”
“반갑다. 이번 CF 감독인 최종철이다.”
“네! 감독님, 잘 부탁드립니다!”
박유민이 허리를 폴더처럼 꺾으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는 살짝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최종철의 눈빛이 영 곱지 않았다.
“그래. 뭐, 게임한다고?”
“예. 프로게이머입니다.”
“세상 참 좋아졌어. 뭔 컴퓨터 게임 중독자를 데리고 CF를 찍으라니. 거참,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
박유민이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오진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감독의 말을 대신 받았다.
“하하, 다 감독님의 능력을 믿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매니저요?”
“소속팀 감독입니다.”
“큼.”
최종철이 미묘한 눈으로 오진형을 한 번 훑어보았다. 할 말은 있지만, 감독이라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입을 열 수는 없다는 표정 같았다.
아무래도 나이 어린 프로게이머와 프로팀 감독을 같은 취급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연기는 좀 해봤어?”
“전에 한 번…… CF 찍은 적 있습니다.”
“그럼 초짜구만.”
“예, 그렇습니다.”
감독이 초짜라면 초짜다. 박유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오늘 촬영할 사람이 만만치 않아서 신경 쓰이는 것 많은데, 쓸데없이 사고 치지 말고 시키는 것만 하자. 알았어?”
“예, 감독님.”
“쯧, 잘해보자.”
“예. 잘 부탁드립니다.”
둘의 인사를 받은 감독이 삐뚤삐뚤한 걸음걸이로 몸을 돌렸다.
최정철이 멀어지자 오진형이 박유민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재수 없는 새끼. 유민아, 신경 쓰지 마라.”
“괜찮아요.”
“아직도 저런 꼰대들이 있다니까. 지들은 뭐 대단한 줄 아나?”
“진짜 괜찮아요, 감독님.”
“아니. 내가 열 받아서 그러는 건데?”
“…….”
박유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오진형이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괜히 더 화를 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진짜 괜찮아요. 이런 말 하면 좀 이상하겠지만, 무시받는 건 익숙하거든요.”
“……그거 좋은 거 아냐, 인마.”
“알아요. 아는데도 그러네요.”
절로 손이 머리를 긁는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무시받는 것에는 익숙하다. 프로게이머가 되면서 다른 이들의 선망을 받게 된 박유민이지만, 지금까지도 선망보다는 멸시의 시선이 더 익숙하다. 다른 이들의 눈총을 받으며 살아온 세월이 박수를 받으며 산 세월보다 훨씬 더 기니까.
“제가 촬영 감독이라도 저를 배우로 쓰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당연한 거죠.”
“……자기 객관화가 잘 된다는 건 참 좋은 일인데 말이야.”
오진형이 살짝 안쓰러운 얼굴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오기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프로게이머 업계에 박유민 같은 호인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박유민 개인으로 볼 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촬영할 사람이 만만치 않다는 건 무슨 소리예요?”
“너, 콘티 봤잖아.”
“예. 봤죠.”
“상대 배우가 급이 엄청난 모양이다. 나도 정확하게는 못 들었는데.”
“……못 들으셨다구요?”
오진형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아무리 우리가 아직 메이저 업계는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의 정보는 줘야 할 거 아냐.’
촬영장에 불러놓고 상대 배우가 누군지도 알려주지 않으면 어쩌라는 건가.
물론 상대 배우가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이라고 해도 거부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고 나오는 것과 모르고 나오는 것의 차이는 컸다.
“여하튼 열심히 해보자.”
“네, 감독님.”
박유민이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앞쪽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온다! 준비해!”
“의자! 의자부터 챙겨!”
촬영장이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전쟁이라도 났나?’
뭔가 혼비백산했다는 느낌이다. 조금 전에 본 감독의 이미지로는 이런 분위기를 싫어할 것 같은데, 호통을 쳐 말리기는커녕 같이 혼비백산하고 있다.
오진형과 박유민은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온다는 것 같은데?”
“그러게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들의 눈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와!”
“헐!”
일단 감탄부터 나온다.
거리가 있음에도 일단 그 포스가 남다르다. 일단 기본적으로 뭔가 길쭉한데, 머리가 작아서 이질적인 느낌이 확 들었다.
“헐. 저, 저거, 최연하 아냐?”
“최연하요?”
“그래, 최연하 씨.”
“어?”
박유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맞네?”
박유민이 멍하게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와, 확실히 프로는 다르기는 하구나.’
최연하를 본 건 이게 처음은 아니다. 이미 과거에 피자집에서 몇 번 안면이 있지 않던가. 하지만 그때는 평상복을 입고 있어서 지금과 같은 기분은 느끼지 못했다.
일에 들어간 프로는 그 포스부터 남다르다는 게 확연하게 느껴진다.
“……아, 오늘 같이 찍는 사람이 최연하 씨구나.”
“난리 났다. 어떡하냐?”
“왜요?”
“최연하 씨 성격 나쁘다는 거 유명하잖아. 팬한테는 잘하는데, 관계나자 업계인들한테는 개차반이 따로 없다던데.”
“에이.”
“아냐, 아냐. 뜬소문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니까. 지금 스텝들도 완전 쫄았잖아.”
“아니에요. 좀 까칠한 면이 있어서 그렇지, 성격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던데요?”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박유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설명을 하려고 들면 말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아이구, 최연하 씨! 어서 오세요!”
최연하가 밝은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감독을 보며 눈을 살짝 찌푸렸다.
‘뭐야, 두꺼비같이 생긴 게.’
느물느물거리는 인상이 시작부터 비호감이다.
기분이 확 나빠진 최연하가 턱을 살짝 내리는 것으로 감독의 인사를 받았다.
“모시느라 힘들었습니다. 요즘 주가가 너무 뛰셔서.”
“그렇죠.”
“……아, 예. 그렇죠.”
최종철 감독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죽겠네.’
성격이 더럽다는 거야 워낙 유명하지만, 요즘은 좀 더해진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드라마를 찍고 나서 활동이 좀 뜸해져서 이제는 좀 내려가나 싶었는데…….
‘왜 중국에서 대박이 나냐고!’
한국에서 한물간 연예인이 중화권에서 인기를 얻으면 한국의 인기에 영향을 별로 주지 못하기 마련이지만, 톱 자리에 있는 연예인이면 말이 달라진다.
‘여기선 별로더니 중국에서는 인기가 있는 모양이네’가 ‘한국에서도 쩔더니, 중국도 정복하네’로 바뀌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금 최연하의 주가는 하늘 모르게 상승하는 중이었다.
CF만 해도 지금 조율 중인 게 열 개가 넘는다. 어설픈 광고였으면 돈이 있어도 섭외를 할 수가 없다. 그나마 지금 이 광고가 연예인들이 선호하는 통신사 광고이기 때문에 최우선적으로 섭외를 완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종철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못했다.
‘죽겠네, 진짜.’
기본적으로 통신사 광고 같은 경우는 감독이나 광고주가 갑이 되기 마련이지만, 저 정도의 인기를 끌고 있는 스타의 경우에는 갑을 관계가 역전된다.
막말로 최연하 정도 되면 기분 나쁘니까 안 찍겠다고 돌아서도 문제가 없다. 다른 통신사나 중국의 업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테니까.
안 그래도 성격적으로나 입지적으로나 답이 없는 사람인데, 거기에 기세까지 더해졌으니 대책이 없다. 최대한 기분을 맞추는 수밖에.
“먼저 죄송스런 말씀을 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최연하의 얼굴이 벌써 살짝 일그러진다.
‘아직 말도 안 했다, 이년아.’
최종철이 내심 욕지기를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콘티가 조금 변경이 돼서요. 원래는 톱 배우를 상대역으로 섭외하고 싶었는데, 이번 콘티는 광고주의 의견이 개입이 너무 많이 돼서 초짜가 섭외되었거든요.”
“초짜요?”
“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찍으실 때 불편함이 없도록 최대한 애써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저도 고민이 많습니다. 아무리 광고라는 게 소비자의 니즈에 맞추는 거라지만, 어디서 비주얼도 안 되는 일반인을 데리고 와서는.”
최종철이 이를 갈 듯 말했다.
“다리도 저는 것 같은데,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최 배우님이 마음에 안 드시면 제가 광고주랑 다시 이야기해서 단독으로 바꾸든 해보겠습니다.”
“……다리를 절어요?”
“네. 병신이에요.”
최연하의 얼굴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최연하가 화가 난 이유는 감독의 워딩 때문이지만, 최종철은 상대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지 최연하를 계속 부추겼다.
“움직이면서 찍어야 하는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애를 섭외해 왔더라구요. 최 배우님이 조금만 말씀을 해주시면 제가 광고주랑 말해서 배우님을 단독으로 찍는 세컨 콘티로 변경을…….”
“누군데요?”
“아,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저기 저 사람입니다. 프로게이머라고 하는 것 같던데…….”
최연하의 고개가 돌아갔다.
멀리 유니폼을 입은 사내를 발견한 최연하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그 반응을 본 최종철이 쾌재를 불렀다.
“전화할까요?”
“당신, 일단 입 닫고 있어요.”
“네?”
“주둥아리 닫으라고.”
“…….”
갑자기 날아오는 쌍소리에 최종철이 멍한 눈으로 최연하를 보다가 입을 닫았다.
최연하가 바닥을 내려치는 듯한 걸음으로 멀리 보이는 프로게이머에게 다가갔다.
저벅! 저벅!
파워 워킹으로 한달음에 박유민 바로 앞까지 다가간 최연하가 하이 톤으로 소리쳤다.
“박유민 씨! 이게 얼마 만이에요!”
감독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스텝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모두의 집중된 시선을 받은 박유민이 어색어색한 얼굴로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