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51
#1050.
미묘하다 (5)
찰칵.
매캐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보고서를 쭈욱 훑어본 황정후가 혀를 찼다.
“고등학생 수준이라는군.”
“…….”
“말이 고등학생이지, 고등학생 애들이 뭔 업무를 알겠나. 백지라는 뜻이야. 무슨 말인지 아나?”
강진호가 머리를 긁었다.
“신경을 못 썼습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걸 다른 말로 뭐라고 하는 줄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만.”
“무능하다고 하지.”
“…….”
변명의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현장이 손발이라고 하면, 사무는 뭔 줄 아나?”
“뇌?”
“뇌는 너지. 그리고 이사진, 사장단들이고. 사무직은 말하자면 신경이나 핏줄 같은 거야. 아무리 손발이 단련되어 있으면 뭐 하나, 핏줄이 막히면 손발은 괴사하는 거야.”
“실감하고 있습니다.”
“흐음.”
황정후가 미소를 지으며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실수는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진호는 좋은 경영자의 자질이 있었다.
‘보통은 변명이 나오기 마련인데 말이야.’
변명이 그리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특히나 대한민국 사회는 변명에 관대하지 못하다. 우선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문제점이 터지기 시작하면 다들 우선은 면피용 변명을 늘어놓기 마련이다.
몰라서?
아니다.
그만큼이나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다른 이의 흠집을 잡아 책임을 돌리려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하지만 강진호는 자신의 책임이라 하기에는 억울할 수도 있는 일임에도 조금의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근이라…….”
황정후가 피식 웃었다.
“고전적이지만, 좋은 방법이지.”
황정후는 묘한 감회에 빠져들었다.
처음 그가 강진호를 보았을 때, 그는 강진호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황정후는 정말 강진호가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얼핏얼핏 무인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강진호의 능력은 그가 들은 이들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악마거나, 그게 아니면 괴물이거나.
여하튼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그 무언가가 사람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게 차라리 현실적이었으니까.
단순히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때의 강진호에게는 인간미라는 게 없었다. 냉혈한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무언가가 결여됐다는 느낌에 가깝다.
그런 강진호가 이제 능수능란하게 아랫사람들을 구슬리고 있다. 이 어찌 재미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건 당근이라고도 할 수 없어.”
“예?”
“악덕 사장의 특징이 뭔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악독한 놈이라고 해도 월급은 당연히 올려줄 수밖에 없지.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를 봐도 월급이 올라가지 않은 회사는 없단 말이야.”
“예.”
“그런데 왜 그놈들이 악덕이라 불리는 줄 아나?”
“…….”
황정후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다른 회사는 당연하게 다 해주는 걸 현실화해 주면서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생색을 낸단 말이야. 그러면서 자기가 또 직원들을 엄청 생각해 주는 것처럼 말하거든.”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는 듯 황정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생색은 내지 않았다고 해도, 자네도 지금 그런 악덕 사장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는 거지. 연봉을 현실화한다는 건 오히려 미안해해야 할 일이야. 지금까지 직원들이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강진호가 입을 닫았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당근을 주려면 당근을 줘야지, 미지급된 임금 주면서 생색내는 꼴 아닌가.”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는 나름 뿌듯했는데…….
듣고 보니 본인이 굉장히 악덕 회장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 당황스러운 강진호였다.
“그러니 생색내지 말고,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돼.”
“예.”
“이 직원들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야.”
황정후가 둘둘 말린 보고서로 테이블을 퉁퉁, 내려쳤다.
“회사에 내가 원하는 인재가 알아서 척척 들어오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언제나 아쉬운 게 인재인 법이지. 그럼 데리고 있는 인재를 가르쳐서 더 좋은 인재로 만다는 게 윗사람의 몫 아니야?”
“그렇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아랫사람이 부족한 것도 윗사람의 잘못이라는 뜻이지.”
“예.”
황정후가 묵묵히 대답하는 강진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억울해?”
“아뇨.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억울하겠지. 내가 관련이 없는 것까지 다 내 책임이 되니까. 억지 같기도 하고.”
“…….”
황정후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위에 선다는 건 그런 거야. 내가 관여한 부분만 책임을 질 거라면 회장이니, 사장이니 그딴 말로 불리면서 거들먹거리면 안 되는 법이지.”
딱히 거들먹거린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강진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쉽지 않지?”
“쉽지 않다기보다는…….”
강진호가 속내를 내놓았다.
“조금 아이러니하다는 걸 느낍니다.”
“아이러니?”
“예.”
살짝 머뭇거린 강진호가 말을 잇는다.
“관심이 없던 분야를 공부하고, 조금 더 알아가면 일이 쉬워지고 나아져야 하는데, 알면 더 알수록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지고,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게 뭐가 이상해?”
“예?”
“당연한 거 아냐?”
황정후가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가 익히는 그 무학이라는 건 뭐가 다른가? 익히면 익힐수록 더 어려워지는 거 아냐?”
맞는 말이다.
무학에 처음 입문한 이가 느끼는 어려움과 절정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는 이가 느끼는 어려움은 그 차원이 다르다.
일반적인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취미로 스포츠를 즐기는 이가 느끼는 어려움과 국가대표급에서 느끼는 어려움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떠한 분야든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 어려워지고, 더 힘들어지는 게 당연하다.
“경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야. 어설프게 볼 때는 쉬워 보이지. 적당히 월급 올려주고 좋은 사람 데려다가 쓰면 알아서 잘 돌아갈 것 같거든. 그런데 그게 그리되지 않는다는 게 경영이지. 경영자들이 그걸 몰라서 망하는 게 아니거든.”
“그런 것 같습니다.”
강진호가 한숨을 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한 가지는 뼈저리게 느낀다.
‘나는 결국 싸우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게 없구나.’
팔방미인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이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만큼은 충족을 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건 강진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살짝 고민에 빠진 듯한 강진호를 보며 황정후가 미소를 지었다.
‘잘 익어가고 있군.’
제아무리 능력이 있는 이라고 한들, 치고 올라가다 보면 반드시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이 온다.
이건 절대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능력이 없는 이든, 능력이 있는 이든, 바라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능력을 상회하는 결과물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 고민이 이어지고 이어질 때, 사람은 성장한다.
황정후는 강진호라는 사람이 결코 자신에 못지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경영자라는 측면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보면 강진호는 황정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황정후가 지금 강진호에게 바라는 건 오직 경영자적인 측면이었다.
“이보게, 진호.”
“예.”
“경영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
“예?”
황정후의 말에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너무 고민이 많아 보이는 것 같으니 내가 팁을 한 가지 주지. 사실 이건 내 비전과도 같은 거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건데…….”
황정후가 슬쩍 몸을 앞으로 당겼다.
강진호 역시 황정후가 이런 식으로 뜸을 들이는 건 본 적이 없기에 호기심이 동한 듯 몸을 당겼다.
“내가 재경을 어떻게 키웠는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그걸 궁금해하더군. 내게 특별한 비책이 있었다거나, 그게 아니면 내가 엄청 잘난 놈이라 그랬다고 생각하더라, 이 말이지.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게 아냐. 내가 재경을 키울 수 있던 이유는 사실 아주 간단하지. 그게 뭐냐면…….”
황정후가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직원들을 가족같이 여겼기 때문이야.”
“…….”
강진호가 맥이 탁 풀린 얼굴로 황정후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공익광고도 아니고…….
“가족같이 여기셔서 가족 경영은 안 하셨군요.”
“이봐, 이봐.”
황정후가 낄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비결을 알려 달라고 하는 놈들이 있어서 비결을 알려주면 꼭 이렇게 나온다니까. 말을 해주면 뭐 하나, 들어 처먹지를 못하는데.”
“들어 처먹지 못하는 게 아니라…….”
강진호가 한숨을 쉬었다.
“직원들을 가족같이 여기겠습니다.”
“에라이.”
황정후가 역정을 냈다.
“보통은 여기서 못 알아먹으면 더 설명해 주지 않지만, 자네니까 내가 특별하게 주석을 달아주지. 잘 들어.”
“예.”
딱히 기대감이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황정후의 말은 강진호가 생각하고 있던 빤한 내용과는 조금 달랐다.
“자네, 직원들을 가족같이 여긴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잘해주는 거죠. 내 가족을 아끼듯이.”
“그러니 자네가 안 되는 거야.”
“……예?”
“자네, 자식이 있다고 치자고. 그럼 자네 자식이 능력도 떨어지고 다른 직원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는데, 그걸 보며 잘해주는 게 능사인가?”
“…….”
아니겠지.
“자네가 가족들을 생각할 때는 어떤가? 기본적으로 그 사람들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아?”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꿈도 이루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강은영을 가수로 만들고 지원해 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직원을 가족같이 대하라니까 연봉이나 올려주고 복지나 늘려주려고 하지. 대한민국의 가족이라는 게 뭐야? 내 새끼가 능력이 없으면 벌어놓은 돈으로 건물이나 쥐어 주는 게 가족이야? 아니지, 그게 아니란 말이야. 내 새끼가 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해서든 교육시키고 나보다 뛰어난 놈으로 만드는 게 가족이라 이거야.”
강진호의 눈이 커졌다.
이건 강진호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관점이었다.
“그렇게 직원 하나하나가 잘되고, 능력이 생기고, 인생에서 성공하고, 행복해지게 만들면 회사는 자연히 잘될 수밖에 없어. 그런 이들이 모여 있는 회사가 어떻게 잘되지 않을 수가 있겠냐, 이 말이야.”
“…….”
“그런데 직원을 가족같이 생각하라니까 그 말을 ‘사장이 착하게 굴어야 한다’로 이해하더군. 머저리 같은 것들. 착한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일 수는 있겠지만, 좋은 아버지가 반드시 착한 건 아니지. 때로는 엄하고 비전을 제시해 주는 아버지가 그냥 착하기만 한 아버지보다 훨씬 좋은 아비일 수 있는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확실하게 알았다.
“직원을 가족처럼.”
“그렇지.”
“잘될 수 있도록.”
“그래. 무슨 말인지…….”
“가족처럼.”
“…….”
황정후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강진호가 홀린 듯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진지해졌다.
아니, 진지하다기보다는 음산…….
‘왠지 실수한 것 같은데…….’
사업가의 감으로 볼 때, 지금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회장님.”
“으응?”
“감사합니다. 깨달은 것 같습니다.”
“아, 아니, 깨달은 것 같지 않은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 아니야. 내 생각엔 잘못하지 않았…….”
“머리가 복잡하니 일단은 생각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이, 이보게, 진호?”
강진호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황정후가 멍하니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도 때로는 실수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실수의 파장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이는 황정후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