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52
#1051.
대비하다 (1)
커다란 다다미방.
방 안에 모인 이들이 영 마뜩찮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모이라고 하셨답니까?”
“글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들은 게 없습니다. 하지만 빤한 노릇 아니겠습니까?”
각 구미들의 수장이 서로를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서로의 입장은 다 다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다들 공통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재정립.
신니치카이는 이번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한국 원정을 위해서 각 구미의 젊은 정예들을 모아 가놓고, 대패를 한 것은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실책이다.
하지만…….
이들의 속내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각 구미를 이루고 있는 전력 중 젊은이들의 힘은 사실 그리 크지 않다.
어느 집단이든 결국 권력과 실권은 젊은이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경향은 무인계에서는 더욱 크게 나타났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능력과 힘은 나이와 비례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미약하던 힘이 장년인일 때 절정을 이루다가, 노인이 되면서 점차 약해지는 게 기본적인 섭리다.
하지만 무인계에서는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내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50세만 되어도 가진바 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무인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일평생 쌓아온 내력이 더더욱 강해진다.
결국 더 오래 살고, 더 오랜 시간을 수련한 이들이 젊은이보다 더 강할 수밖에 없다.
젊은 무인들을 잃어 미래 특정한 시점의 약화를 피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냉정하게 보았을 때 지금 당장의 전력이 약화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피해가 컸습니다.”
“구미를 이끌어 나가야 할 녀석들이 모조리 수장되지 않았습니까? 이건 무엇으로도 만회할 수 없는 실책입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일이지요.”
하지만 그런 계산과는 다르게 그들은 침통한 어조로 성토를 이어갔다.
마치 잘 짜여진 연극에 출현하는 배우들처럼 말이다.
지금 교환되는 그들의 눈빛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신니치카이.
그리고 수령.
관서는 오랜 세월 신니치카이의 지배를 받았다.
물론 일본 구미들의 지배라는 게 타국처럼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지는 않지만, 그들이 신니치카이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니치카이는 벗어날 수 없는 족쇄와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 족쇄가 느슨해졌다.
‘잘만하면 반쯤은 끊어버릴 수 있겠지.’
‘수령, 이번에는 실수하셨소.’
연합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 아니다. 아무리 신니치카이가 강하다고 해도 관서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연합에서 실력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명분이었다.
신니치카이와 수령은 명분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신니치카이의 위상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겠지만, 이번 일을 잘 이용할 수 있다면 그들을 지금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때, 미닫이문이 활짝 열리고 수령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정좌한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수령에게 예를 표했다.
두말없이 상석에 앉은 수령이 가라앉은 눈으로 정좌한 이들을 쭈욱 둘러보았다.
“빠진 이 없이 참석해 주셔 고맙소.”
“…….”
“이리 수장들을 소집한 이유는 한 가지 중요한 안건에 대한 의논을 하기 위해서요.”
“……중요한 상황이라 하시면?”
“전쟁.”
수령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간결했다.
하지만 그 간결함을 모두가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전쟁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눈을 찌푸리는 이들이 나타났다.
“전쟁이란…… 한국과의 전쟁을 말씀하심입니까?”
“그렇소.”
“으음.”
수장들이 서로의 눈치를 봤다.
수령의 화법이 순간적으로 그들의 말문을 틀어막고 있었다.
만약 그가 평소처럼 덕담을 한다든가, 현재의 상황을 물으며 대화를 이끌어갔다면 여기저기서 불만과 성토가 튀어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을 던져 버리니, 당장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너구리 같으니.’
노련하다.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수령은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대화를 끌고 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나온 대화의 화제였다.
“조선을 다시 침공할 생각이십니까?”
“다시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겠지. 우리는 제대로 조선을 노려본 적도 없으니까.”
“없던 일로 치부할 생각이십니까?”
“없던 일?”
수령이 차가운 눈으로 요헤이를 노려보았다.
“요헤이.”
“예.”
순간적으로 들려온 차가운 음성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지만, 요헤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 물러나 버리면 일전의 사태는 정말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
‘이건 정치다.’
정치에서 사건은 딱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이 어떤 의미를 띠게 만드느냐는 것이다. 대처에 따라서 별것 아닌 사건이 세상을 위진시키는 거대한 폭풍이 되기도 하고, 엄청난 사건이 찻잔 안의 태풍이 되기도 하는 게 정치니까.
“그게 정말 침공이었소?”
“물론입니다, 수령. 침공이란…….”
“그렇다면 그대는 왜 침공의 전면에 서지 않았소?”
“…….”
요헤이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간사한 너구리.
그 말이 더없이 어울린다.
저 말 한마디로 수령은 변명의 여지를 차단해 버렸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조선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은 이는 단 하나도 없다.
적당히 젊은 놈들을 태워 보냈을 뿐이다.
수령이 저런 식으로 나와 버리니 딜레마가 생겨났다. 그 원정이 제대로 된 침공이라 하기에는 젊은 놈들만을 태워 보낸 그들의 처신이 불충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침공이 아니라 하기에는 수령에게 면죄부를 줘버리는 꼴이 아닌가.
“그대들도 같은 생각이시오?”
수령이 고개를 들어 다른 구미의 수장들을 쭉 훑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수령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속으로는 욕을 하고 이를 갈지언정, 지금 그들에게는 명분이 없다. 몇 마디 말로 간단하게 수령이 명분을 선점해 버린 것이다.
이가 빠득빠득 갈리지만, 지금 당장은 대처할 수단이 없었다.
“거참, 재미있는 말이로군.”
수령이 이죽였다.
“제대로 침공을 했음에도 반도에 닿아보지도 못했다면, 대일본제국의 무사들이 겨우 그런 수준에 불과했다는 뜻이 아니겠소?”
“수령.”
요헤이가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불충했고, 안일했으며, 또한 무능했습니다.”
수령이 눈을 가늘게 뜨고 요헤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책임에서 수령 역시 자유롭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모든 계획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기신 건 바로 수령이 아니십니까?”
요헤이가 총대를 멨다.
그러자 분위기가 일변한다.
“흐음.”
수령이 불편함이 담긴 눈으로 요헤이를 노려봤다.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수령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것은 이제 더는 과거의 관계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이 선포된 것이다.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군.’
요헤이가 깃발을 세우는 순간, 다른 구미의 수장들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느 쪽에 서는 것이 이득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익숙한 광경.
하지만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한때, 그도 이런 과정을 통해 신니치카이의 입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그가 관서를 완전히 지배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없던 상황이다.
그의 입지가 그만큼이나 약해졌다는 반증이다.
“책임은 통감하고 있소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 책임이라는 것에 그대들의 지분 역시 적지 않을 터.”
“수령!”
“아아, 그리 화낼 것 없소.”
수령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 여유로운 동작을 보며 요헤이가 눈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이지?’
교묘한 화술로 분위기를 끌어가기는 했지만, 이 모든 일에 수령의 책임이 적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들 승냥이처럼 상처를 물어뜯으려 준비하고 있으니, 아무리 수령이라고 한들 적지 않은 것을 내주어야 할 것이다.
수령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수령의 저 여유는 무엇에서 나오는 것인가.
“지금은 책임을 논할 때가 아니니까.”
“예?”
수령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커다란 실패를 경험했소.”
“…….”
“잘잘못을 따지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한 가지를 놓쳤소이다. 우리는 이미 전쟁을 시작했소.”
요헤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쟁 중이니 잘못을 따질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건 아니겠지. 하지만 전쟁 중이니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굴 것 없다는 뜻이오.”
“애초에…….”
요헤이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정말 수령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만다.
‘물러날 곳은 없어.’
이 상황을 뒤집어야 한다.
“애초에 전쟁…….”
“그만.”
수령이 단호하게 요헤이의 말을 끊었다.
요헤이가 부릅뜬 눈으로 수령을 바라본다.
“입 밖으로 내야 할 말과 내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시오. 말은 화를 부르는 법. 생각 없이 내지른 말 한마디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소.”
“…….”
어른이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요헤이가 이를 갈려는 순간, 수령이 입을 열었다.
“내 하나 묻겠는데, 그대들은 강진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
“적의 수괴가 어떤 인물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무작정 쳐들어갈 생각만 했겠지. 그것만으로도 그대들이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알 수 있소.”
“저희는 그를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아니!”
수령이 더없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대들은 모르오, 강진호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만약 그걸 알았다면 지금처럼 태연자약하게 뜯어먹을 것을 찾아대지도 않겠지. 모르겠소이까? 전쟁은 이미 시작됐소. 공격을 받은 강진호는 절대 일본을 내버려 두지 않을 거요. 모르시겠소?”
수령이 모두를 돌아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서로 얼마나 뜯어먹을 수 있느냐는 의미가 없소. 그 모든 것을 강진호가 가져가 버릴 테니까.”
요헤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게까지?’
한국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증명됐다. 그 망망대해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의 증언만으로도 결코 얕볼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는 건 얼마든지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감히 일본의 본토를 노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이나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존재했으니까.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로군.”
수령이 피식 웃었다.
“뭐, 좋소. 그대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서 과장한다고 생각할 만도 하니까.”
정확한 말이었다.
“그래서 강진호가 어떤 인간인지 증언해 줄 사람을 모셨소이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이 열린다. 그러자 그 문을 통해 차이커창이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차이커창에게로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