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53
#1052.
대비하다 (2)
안으로 들어온 차이커창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이들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겁쟁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군.’
아니, 실제로 겁쟁이겠지.
차이커창이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이, 자신들이 잘 모르는 이가 이 자리에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늑대를 본 토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차이커창이 살짝 입술을 핥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일본인들은 이상한 민족이다.
세상에서 가장 신중한 걸로 유명한 놈들의 조상이 그 대책 없는 전쟁을 일으킨 놈들이라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다르지 않겠지.’
더없이 신중하고 침착해 보이는 가면 속에 불타는 듯한 욕망이 숨겨져 있다. 차이커창이 해야 할 일은 그 욕망을 부채질하는 것이다.
“그대는?”
차이커창이 머리를 긁었다.
“나는 차이커창이라고 한다. 세상을 지배하시는 홍왕을 모시고 있다.”
“차이커창?”
수장들의 눈이 커졌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차이커창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었다.
홍왕계의 이인자.
홍왕의 지낭.
유명한 만큼 수식하는 이름도 많은 자다.
“귀하신 분께서 왕래하셨군.”
살짝 비꼬는 듯한 말.
차이커창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일본과 중국은 서로 적이다. 적진에 홀로 걸어 들어왔는데 거창한 환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홍왕계의 이인자가 강진호를 증언하러 왔다라…….”
요헤이가 눈을 찌푸리며 수령을 바라보았다.
“상의도 없이 적을 심장부에 들이신 겁니까?”
수령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차이커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두 가지를 정정하지.”
“……두 가지?”
“첫째, 나는 홍왕계의 이인자가 아니다. 멋도 모르는 놈들이 제멋대로 그리 평가하는 모양인데, 홍왕을 모시는 이들 중에 나 따위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분들이 넘쳐 나신다. 그러니 그런 멍청한 소리는 두 번 다시 지껄이지 말도록.”
“이놈이!”
“그리고 두 번째, 나는 강진호가 얼마나 강한지 증언하러 온 게 아니다. 네놈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러 온 거지.”
이쯤 되면 시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요헤이가 이를 갈았다.
“중국 놈들이 예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너는 그중에서도 심한 측인 것 같군.”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는군. 너희 일본 놈들이 그리 지껄여 대는 예의도 결국은 중국에서 온 것이다. 뭘 알고 지껄이면 좋겠는데.”
“이놈!”
요헤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따위로 방자하게 굴고도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그런데?”
요헤이의 손이 허리춤에 찬 일본도를 움켜잡았다.
“자신의 실력을 너무 과신하는 모양이군. 내가 네 목을 잘라 그 과신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개소리하지 말고 앉아.”
“이익!”
차이커창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또 두 가지 정정해 주지. 하나, 나는 내 실력을 과신한 적 없어. 네가 내 목을 베려 달려든다면, 나는 네놈이 내 목을 단숨에 베어내서 고통이 적기만 바랄 뿐이겠지. 그리고 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해.”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당연하지. 내가 여기서 죽는 순간, 홍왕의 분노가 열도로 향할 테니까.”
“…….”
홍왕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분위기가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홍왕의 힘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라면, 감히 한 구미의 수장이 될 자격이 없다. 홍왕의 분노가 열도로 향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두가 이해하고 있다.
홍왕계가 일본으로 힘을 집중하는 순간, 다른 삼왕들이 홍왕계를 내버려 두지 않겠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이성적으로만 벌어지지 않는다.
이성을 흐리게 하는 것은 대부분 분노인 법이고, 차이커창의 죽음은 그 홍왕을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일이다.
“그러니 뽑을 일도 없는 그 검에서 손 내리고 앉아.”
“이…….”
“이봐.”
차이커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이 자리에 진지한 이야기를 하러 왔다. 그러니까 의미도 없는 연극 같은 건 집어치우자고. 네가 그런다고 내가 겁을 먹을 일도 없고, 내가 이런다고 네가 겁을 먹을 리도 없을 테니까. 아닌가?”
요헤이가 가만히 차이커창을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이상한 놈이군.’
대화라는 건 결국 서로의 패를 들고 벌이는 싸움이다.
하지만 차이커창은 싸움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치 배를 갈라 내장을 모조리 꺼내놓은 사람처럼 굴고 있다. 속내를 감추지도 않고, 말속에 다른 의미를 담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모든 것을 까 보이는 그 태도가 오히려 차이커창을 알 수 없는 인물로 만들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차이커창이 이곳의 분위기를 완전히 주도하고 있었다.
“엉덩이를 걷어차러 왔다고?”
“그렇다.”
“제대로 말해보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너희는 곧 죽는다.”
요헤이가 이를 악물었다.
대체 저 화법은 뭔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내게는 너희의 수명이 보이는군. 보자, 길어봐야 일 년 정도인가?”
“……제대로 설명을 해라, 제대로!”
차이커창이 요헤이를 슬쩍 보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어이, 요헤이라고 했나?”
“이놈…….”
“대가리가 나빠서 제대로 이해를 못하면 닥치고 해주는 말이나 들어. 겁먹은 개새끼처럼 철창 뒤에 숨어서 짖어 대지 말고 말이야.”
요헤이의 얼굴이 멍해졌다.
손발이 벌벌 떨린다.
그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 전에도 저런 저열한 욕설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위치에 오르고 나서는 더더욱 들을 일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홀로 일본의 심장부에 걸어 들어온 중국 놈이 그의 인생에 단 한 번도 없던 저열한 비난을 늘어놓고 있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황당하다.
‘대체 이놈은 뭐지?’
“좋아. 다물었군.”
차이커창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는 외교라는 걸 서로 속이는 게임 정도라 생각하는 것 같군. 병신같이 말이야. 외교라는 건 이해가 맞는 이들이 서로의 목적을 빤히 알면서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계산이다. 그러니 내가 여기에 너희를 속이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란 소리지. 어차피 내가 하는 말의 진위 정도는 너희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차이커창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닥치고 일단 들어. 다 듣고도 이해가 안 간다면, 그때 지껄여라.”
“…….”
“알아들은 것 같군. 계속하지. 너희는 강진호를 모른다. 그놈은 너희가 배를 두드리고 신니치카이를 물어뜯으려는 계산을 하는 사이에 이미 유럽을 접수했다.”
“뭐?”
“정보가 느리군. 확인해 봐라. 강진호가 유럽에 다녀온 걸 알 수 있을 거다. 내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원탁과 동맹을 맺었다는군.”
“…….”
너무 파격적이라 되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요헤이가 고개를 돌려 반응을 확인했다. 한둘 정도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있었다.
‘사실이구나.’
홍왕계나 총회와는 다르게, 관서는 연합체이기에 정보가 균등하지 않다. 누군가 알고 있는 정보가 다른 구미에 전해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자, 강진호는 이제 외부의 위협을 제거했다. 그러면 다음엔 무엇을 하려 할까?”
차이커창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목을 쭉 그었다.
“이를 드러낸 놈들을 죽이려 들겠지.”
“…….”
요헤이의 혀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그런 정도도 생각하지 못하는 놈들이라면 감히 이 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맞는 말이다.
몇 마디 듣지 않았음에도 머릿속에서 앞으로의 일이 그려진다.
“일 년, 너희에게 남은 시간은 일 년이다. 아니, 그 이하일지도 모르지. 언제나 강진호는 내 계산을 뛰어넘었으니까. 조금 보수적으로 잡으면 반년 정도일까?”
차이커창이 비릿하게 웃었다.
“반년 내로 수를 내지 못하면, 너희는 모두 죽는다. 강진호는 자신에게 대적한 이를 살려두지 않아. 협상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분위기를 완벽하게 고조시킨 차이커창이 본심을 꺼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수를 써볼 수 있지. 쉽지는 않겠지만, 승부를 결해볼 수는 있다. 홍왕계도 전력으로 돕겠다고 약속하지.”
요헤이가 가만히 차이커창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흐음?”
“일본과 한국이 이전투구를 벌이면 힘이 빠진 둘을 꿀꺽할 속셈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지?”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차이커창이 피식 웃었다.
“스스로를 굉장히 과대평가하는 모양인데, 너희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너희를 집어삼킬 수 있었다. 그러지 않은 이유가 너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천만에. 이 작은 섬나라가 너희의 입장에서는 무척 대단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땅덩어리에 불과하다. 먹을 가치도 없지.”
“이…….”
“그래도 못 믿겠다면, 홍왕의 이름을 걸고 내가 약속해 주지. 너희가 한국을 정리해 준다면 홍왕의 이름이 세상에 울려 퍼지는 한 우리는 너희를 적대하지 않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요헤이가 되레 멍해졌다.
‘왜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지만, 이건 불가침조약이다. 그것도 한시적이지 않은, 항구적인 불가침의 선언이었다.
“하나만 더 묻겠다.”
“얼마든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차이커창이 한숨을 내쉬었다.
“잘 들어. 내 본심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지.”
“…….”
“나는 강진호가 무섭다.”
차이커창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아무도 입을 열 수 없을 만큼.
“너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다가도 한 번씩 악몽을 꾸며 벌떡벌떡 일어날 정도로 무섭다. 그놈은 악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을 먹어 치울 기세로 배를 불려가고 있지.”
“……너는 홍왕계가 아닌가?”
“내 입으로 내가 왜 홍왕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놈의 악몽을 꾸는지 설명해야 하는가?”
“…….”
“지금이 아니면 강진호를 죽이는 건 더 힘들어진다. 나는 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너희가 원하는 것? 얼마든지 들어주지. 해줄 수 있는 건 뭐든 해주겠다. 네놈들이 강진호를 죽여주기만 한다면!”
요헤이는 알 수 있었다.
이건 완전한 본심이다.
처음부터 차이커창은 아무것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나는 외교를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을 보여줬다. 그러니 이제는 너희가 결정해야 한다. 이대로 그가 오기를 기다릴 것인지, 그게 아니면 마지막 기회를 잡아 놈을 죽일 것인지.”
차이커창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결정해.”
폭풍 같은 대화가 지나가고 나자 싸늘한 침묵이 장내를 휩쓸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요헤이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수령을 바라보았다. 수령은 말없이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결국 다른 수장들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도 요헤이였다.
마른침이 넘어간다.
한참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요헤이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처음부터 끝까지 휘둘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휘둘리지 않기 위해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보다는, 휘둘리더라도 절벽에 붙어 있는 쪽이 낫다.
“그럼.”
요헤이가 차이커창을 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차이커창이 씨익 웃으며 입에 문 담배를 바닥으로 뱉었다.
“함께 이야기해 보지.”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머물렀다.
“전향적으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