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58
#1057.
추궁받다 (2)
“듣고 계십니까?”
“……음?”
청마의 미간에 한 줄기 주름이 졌다.
웬만해서는 표정의 변화가 많이 없는 청마의 미간에 주름이 진다는 이야기는 그가 지금 무척이나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안 듣고 계시는군요.”
“으음.”
청마가 깊게 아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존의 앞에서 한숨을 쉰다는 건 당장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불경이다. 만약 청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저런 짓을 했다면, 강진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밖으로 끌려 나갔을 것이다.
오로지 청마이기에 강진호의 앞에서 한숨을 쉴 수 있다.
“마존이시여.”
“말하라.”
“마존께서는 세상 모든 것에 너무 무관심하십니다.”
강진호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물론 마존께서 사사로운 것들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 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존께서는 그저 모두를 이끌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청마가 조금은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때로는 조금 안타깝기도 합니다. 마존께서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니면?”
청마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면 그저 사람이 발밑의 개미를 신경 쓰지 않는 것과 같은 건지.”
“과도하군.”
“그럴지도 모릅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천마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속하가 우둔하여 마존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다.”
강진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나를 따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한 바가 아니지. 나는 그저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를 우상시하고 나를 따르는 이들에게 의무가 있다는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존이시여.”
청마가 고개를 저었다.
“설사 마존께서 저들을, 그리고 저를 개미처럼 여긴다고 할지라도 누구도 그걸 잘못되었다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타인의 가치라는 것은 스스로 정하는 법이죠.”
강진호가 가만히 청마를 바라보았다.
말은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말투는 그게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마존이시여.”
청마가 살짝 양팔을 벌렸다.
“마존께서는 모든 것을 손에 넣으셨습니다. 마존께서는 지고한 신교의 교주이시며, 천하의 모든 세력이 마존의 발아래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습니다. 소소한 반란이 이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결국 모두가 마존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흠.”
“하나 저는 그런 생각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마존께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강진호는 아무 말 없이 청마를 바라보았다.
청마의 말이 틀리지 않다.
지금 청마가 말한 그 어떤 것도 강진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저들이 강진호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마존이시여.”
“말하라.”
“결국 세상은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
“마존께는 그저 하찮기만 한 이들일지 모르지만, 사람과 어울리지 않으면 삶의 즐거움을 찾는 건 지난한 일입니다.”
“즐거움이라…….”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청마는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강진호와 청마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청마가 어찌 알겠는가.
왜 그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는지, 왜 그들을 같은 사람이라 여길 수 없는지.
그걸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네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는 알고 있다.”
“예.”
“하지만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로군.”
“마존이시여.”
청마가 빙그레 웃었다.
“언젠가는 마존께서도 사람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느끼실 날이 오실 겁니다.”
“즐거움이라…….”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소리군.’
그럴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즐거움이란 다른 세상에 두고 온 감정이니까. 그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강진호는 죽는 그날까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런 날이 올까?”
“물론입니다, 마존이시여. 그리고…….”
강진호는 가만히 청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날이 온다면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마존께서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보고는 제대로 들을 테니, 잔소리는 이쯤 해두지.”
청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고를 다시 시작했다.
* * *
청마의 예언은 결국 이루어졌다.
물론 강진호가 현대로 돌아올 것까지 청마가 예상하지는 못했겠지만, 결과적으로 강진호는 청마가 말한 대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 관계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법을 알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왜 이건 미리 말해주지 않았지, 청마?’
강진호가 마른침을 삼킨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최연하의 표정이 가슴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다.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건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 속에 이런 위험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강진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려다가 다급하게 입꼬리를 멈춰 세웠다.
‘웃으면 안 된다.’
그래도 그가 현실로 돌아온 세월이 얼마던가. 이제는 없던 눈치가 생기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 눈치가 지금 말하고 있었다. 최연하가 웃고 있다고 해서 마주 웃으면 안 된다고.
“아…… 그러니까?”
강진호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자, 웃느라 가늘어졌던 최연하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한다.
‘거 봐.’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적의 눈빛에 공포를 느껴본 적 없는 강진호지만, 지금 최연하의 눈빛은 천하의 강진호조차 움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강진호가 아니라면 잡아낼 수도 없을 정도의 짧은 순간 만에 최연하의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아, 네, 그…….”
강진호가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한세연이요?”
“네.”
침착해라.
생각해 보면 딱히 주저할 이유도 없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까.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아, 그래요?”
“네. 예전에 친했죠. 유민이하고 같이.”
“아아…….”
“군대 가면서 연락이 끊겼어요.”
“아, 옛날 친구구나.”
“예.”
강진호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 웃어도 되겠…….
“사귀었다던데?”
아직 아니네.
강진호가 다급히 입꼬리를 밀어 내렸다. 잘못 웃었다가는 죽빵 날아올 각이다.
“……그렇죠.”
등골이 싸늘하지만,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 어설프게 시도하는 변명이 모든 것을 망치는 법이다.
“흐음.”
최연하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강진호를 위아래로 훑었다.
“왜 그렇게 긴장해요?”
“예?”
“내가 뭐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하하…….”
“예전에 뭘 했든 그런 게 뭐가 그리 중요해요. 지금 다시 안 만나면 되지.”
“…….”
강진호는 순간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까지 말했는지를 못 들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박유민에게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왔어야 한다.
최연하가 피식 웃더니 손을 뻗어 강진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담 와요. 힘 빼시고.”
“……아, 네.”
“그렇게 오버하지 마요. 구박하려는 거 아니니까. 그냥 좀 궁금해서 그런 거예요. 나를 만나기 전에 강진호 씨가 어디서 뭘 하고 다녔는지. 생각해 보면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으니까.”
“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는 최연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바가지 긁는 마누라 바라보는 얼굴을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
강진호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최연하가 피식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괜히 긴장하지 말라니까. 이제 연락이 오는 것 같던데, 제가 알고 있으면서도 말 안 하면 괜히 서로 어색해질까 봐 미리 말 꺼낸 거예요. 강진호 씨도 연락 오는 애 연락을 안 받을 수는 없을 거 아니에요. 그런 성격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여야 하나?
아니면 아니라고 해야 하나?
강진호가 선택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답을 찾을 수가 없던 강진호는 그저 어색한 얼굴로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괜히 숨기려고 하지 말고 당당하게 이야기해요. 알았죠?”
“명심할게요.”
“그런데 뭐, 반응은 좀 충격이네. 그냥 태연하게 말할 줄 알았는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질 않나.”
땀을 흘렸나?
강진호의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훔쳤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낚였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최연하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긴장하긴 했나 보네.”
“…….”
“좀 더 놀려 먹고 싶지만, 여기까지 할게요. 나는 신경 안 쓸 테니까, 강진호 씨도 신경 쓰지 마세요. 알았죠?”
“예.”
“대신 하나만.”
“예?”
최연하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표정을 지었다.
“정리 끝났죠?”
“물론입니다.”
이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확신을 담아 대답하는 강진호를 보며 최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그럼. 이건 여기까지!”
살았다.
어찌 되었든 큰 고비 하나는 넘겼다는 생각에 강진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이야기는 유민이한테 들으셨어요?”
“네. 박유민 씨도 나름 의리는 있는 것 같던데, 상황이 엄청 공교롭더라구요. 변명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CF 찍는다고 긴장하고 있기도 했고.”
“아…….”
하기야 아무 일 없을 때도 한세연이라는 이름이 나왔으면 긴장할 박유민인데, 촬영장에서 그런 상황에 처했으니 대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 신기하더라구요. 나는 박유민 씨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최연하의 기준으로는 유명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확실히 박유민도 인지도가 꽤 있는 편이었다.
“능력이 있으니까요.”
“하긴 강진호 씨 친구니까.”
강진호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촬영은 잘하던가요?”
“최악.”
“…….”
최연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강진호 씨 친구니까 NG 50번 나도 내가 웃으면서 촬영했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걷어차 버렸을 거예요.”
유민아.
내가 너 한 번 구했다. 잊지 마라.
“그래도 잘 마쳤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더빙 좀 다시 하고, 때깔 좀 맞추면 볼만한 그림 나올 거예요.”
“다행이네요.”
박유민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연수는 괜찮아요?”
“그냥저냥 받을 만합니다.”
“흐응?”
최연하가 강진호를 위아래로 살펴보고는 피식 웃었다.
‘정장까지 다 입고 오고서는.’
아마도 최연하와의 데이트가 끝나는 순간, 바로 회사로 달려갈 모양이다. 생각 같아서는 조금 더 괴롭혀 주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모를 최연하가 아니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밥 좀 해주려고 했는데, 밥보다 회사가 급해 보이니까.”
“아, 괜찮…….”
“보내줄 때 가요. 아니면 안 보내줄 거니까.”
강진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