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59
#1058.
추궁받다 (3)
“들어갑니다!”
한은솔이 눈을 찌푸리며 문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이건 무척 대단한 일이다.
최연하의 집은 금남의 영역이나 다름없다. 세상의 수많은 남자 중에 이 집에 들어가는 걸 허락받은 사람은 한은솔과 강진호뿐이다.
굳이 한 명을 더 추가하자면, 최연하의 아버지 정도겠지.
하지만 그중 최연하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남자는 오로지 한은솔뿐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매니저의 특권!
‘대스타 최연하의 현관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남자라…….’
얼핏 듣기에는 굉장히 좋은 일 같지만, 이건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였다.
이 현관 비밀번호를 아는 대가로 한은솔은 잠에 취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는 최연하를 깨워야 하는 지옥 같은 임무에 시달리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이상한 상황이었다.
‘아무라 봐도 잘 시간은 아닌데…….’
최연하가 아침에 좀 약하기는 하지만, 이미 시간은 오후 세 시다. 그가 알고 있는 최연하의 생활 패턴을 고려한다면, 지금 이 시간에 그녀가 자고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 시간이면 분명 깨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 강진호 씨가 집에 방문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 분명 깨어 있을 텐데, 왜 전화를 안 받…….
“어, 씨!”
한은솔이 자신도 모르게 문을 쾅! 닫았다.
“…….”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한은솔이 현관에 귀를 댔다.
‘아니겠지?’
집 안에 젊은 남녀가 둘이 있는데 연락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으로 온갖 불온한 상상이 오가기 시작했다.
‘에이, 설마…….’
한은솔은 즉시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 둘은 그럴 리가 없다. 해외의 호텔에서 한방에 묵으면서도 아무 일이 없던 두 사람이 아닌가.
그러던 그들이 이런 벌건 대낮에 거사를 치를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센 척하는 최연하나, 진중한 척하는 강진호나 그런 쪽으로는 영 면역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후우…….”
심호흡을 한 한은솔이 다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귀를 기울였다.
‘안에 있나?’
아니면 없나?
현관문이 닫힘과 동시에 안쪽에서 뭔가 퍽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들어가도 돼요?”
“들어와.”
깔끔하게 대답이 돌아오자 한은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쪽으로 향했다. 현관에 강진호의 신발이 없는 것을 봐서는 최연하 혼자 있는 모양이다.
최연하의 방으로 향한 한은솔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응?”
방 안을 들여다본 한은솔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 안에는 최연하가 혼자 서 있었다. 그런데 방이 좀 이상하다. 최연하는 나름 깔끔한 성격이라 언제나 방이 정돈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어지러운 느낌이 든다.
특히나 언제나 침대 위에 정자세로 앉아 있던 곰 인형이 바닥에 처박혀 있는 모습을 보니…….
‘잰 왜 찌그러졌지?’
그냥 처박힌 게 아니라 좀 밟힌 것 같은 모습이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수도 없이 최연하에게 시달려 온 한은솔의 촉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왔어?”
“누, 누나, 전화를 왜 안 받으세요?”
“전화?”
최연하의 고개가 주변을 훑는다. 이불 아래 파묻혀 있는 휴대폰을 발견한 최연하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한다.
“몰랐어.”
“…….”
아니, 무음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니면 전화가 세 통이나 가는데 그걸 몰랐다는 게 말이나 되나.
물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낼 마음은 전혀 없었다.
“누나, 무슨 일 있어요?”
“은솔아.”
“네.”
최연하가 뭔가 살짝 머뭇했다.
‘히이이익!’
그 모습을 본 한은솔이 기겁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최연하가 어떤 여잔가.
방송국 국장 앞에서도 수틀리면 아무것도 거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질러 버리는 여자가 바로 최연하다. 그런 최연하가 머뭇거린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짓을 한다는 뜻이었다.
“야.”
“예?”
“이거.”
최연하가 손에 든 쪽지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인적 사항.”
“예?”
쪽지를 받아 든 한은솔이 눈을 좁혔다. 쪽지에는 이름과 전화번호 하나가 쓰여 있었다.
“이게 뭔데요?”
“뒷조사 좀 해봐.”
“…….”
한은솔이 툭 튀어나온 눈으로 쪽지와 최연하를 번갈아 보았다.
“이거 범죄예요, 누나!”
“나도 알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상식은 있어야지! 누가 매니저한테 뒷조사를 시켜요! 여기가 흥신소도 아니고! 회사 새로 차린다더니, 심부름센터로 업종 전환하셨나!”
“에이 씨!”
최연하가 이불을 걷어찼다.
‘거참, 신기하네.’
뒷조사라는 걸 태연자약하게 시키는 그 인성이야 둘째 치더라도, 최연하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게 일단 의외였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이 이름은 여자인 것 같은데, 최연하가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진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누군데요?”
“내가 그걸 알면 너한테 그런 거 시키겠냐?”
“최소한은 아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최연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자 친구.”
“네?”
“강진호 씨 전 여자 친구.”
“…….”
한은솔이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뭔가 말하려는 순간, 최연하가 손을 번쩍 들어 한은솔의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말하지 마! 니가 무슨 말 하려는 건지 다 아니까!”
“아신다니까 다행이네요.”
“꼴사납겠지!”
최연하가 사자처럼 일갈했다.
“구차하고! 쪼잔해 보이고! 한심하고! 같잖겠지!”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그래서 뭐! 그럼 신경 쓰이는 걸 뭘 어떻게 해? 신경 쓰이는데도 안 쓰이는 척, 태연한 척하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뻔뻔함도 이 정도면 당당함이라고 쳐줄 수 있다. 한은솔은 진정으로 최연하에게 감탄했다. 웬만큼 최연하를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또 새로운 경지가 아닌가.
고개를 탁 젖히고 배를 쭉 내민 최연하의 모습은 당당함, 그 자체였다.
겉만 보면…… 겉만 보면 말이다.
“어설프게 남 뒷조사하다가 걸리면 누나 이미지 박살 나요.”
“더 박살날 건 있고?”
“……그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는데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더 박살 날 이미지는 없는 것 같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
한은솔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쨌든 안 돼요.”
“왜!”
“그걸 강진호 씨가 알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아요?”
“……진짜 깨겠지.”
“잘 아시네요.”
“안 들키게 잘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은솔아, 누나는 너의 능력을 믿는단다.”
“이런 데서 신뢰 보내지 마세요. 안 할 거니까.”
“쳇.”
최연하가 짜증난다는 듯 이불을 다시 걷어찼다. 보나마나 계속 이러다가 방이 작살 난 모양이다.
“아니, 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강진호 씨가 바람이라도 피운데요?”
“그럴 사람이겠냐?”
“그러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상대가 강진호라면 그런 일은 발생할 수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이 바람을 피운다고 해도 강진호는 바람을 피울 만한 위인이 안 된다.
설사 최연하보다 더 예쁜 여자와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바람을 피울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여자가 노골적으로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귀찮다고 손을 내저어 버릴 사람이 강진호가 아닌가.
‘그렇게 쓸 거면 그 얼굴 나 주지!’
한은솔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생불 같은 사람이 강진호였다. 그런데 그런 강진호를 만나는 사람이 뭐가 찝찝해서 다른 여자 뒷조사를 한단 말인가.
까드득.
“에헤이! 손톱! 손톱! 그거 물어뜯지 말라니까!”
최연하가 엄지를 입에서 때면서 웅얼거렸다.
“어쩐지 촉이 오더라, 촉이. 불안할 때부터 알아봤어.”
답도 없다.
한은솔은 최연하를 진정시키는 걸 포기했다.
일단은 사고를 치지 않게 막는 게 우선이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강진호 씨한테 신경 쓰이니까 엮이지 말라고 대놓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럼 내 이미지가 뭐가 돼!”
“……더 망칠 이미지가 있어요?”
“안 돼. 다른 데서는 미친년 소리 들어도 남자 친구한테는 착하다 소리 듣고 싶은 게 여자야.”
“여자가 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럼 그게 나야.”
“…….”
뭐라 반박할 말이 없네.
“겉으로는 쿨하게 보여야 할 것 아냐.”
“누나.”
“응?”
“겉으로만 쿨하게 굴지 말고, 진짜 좀 쿨하게 굴 수는 없어요?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이미 끝난 일이잖아요.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최연하가 피식 웃었다.
“은솔아.”
“예?”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모양인데…….”
“……예.”
최연하가 턱을 들고 말했다.
“사람은 그렇게 논리적으로 못 살아.”
아니, 뭐…….
그건 그렇겠지.
“머리로는 안 그래도 된다는 걸 아는데, 자꾸 신경 쓰인다니까?”
“네, 누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대로는 안 돼.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해.”
“아니, 강진호 씨는 그럴 일이 없다니까요.”
“은솔아.”
“……누나, 이제 안 부르고 그냥 말씀하셔도 돼요.”
“나도 강진호 씨가 뭔 일을 벌일 거라 생각하는 거 아냐. 그 사람이 그럴 깜냥이 안 된다는 걸 누가 몰라?”
“그런데요?”
“강진호 씨가 아니라 그년이 문제다.”
“네?”
최연하가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말했다.
“헤어지고 연락도 없던 게 이제 와 다시 연락을 한다는 건, 보나마나 빤하지. 어떻게든 찔러볼 생각이야.”
“…….”
“안 돼. 나는 그 꼴 못 봐. 속 뒤집어져서 못 참아.”
한은솔이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인성 하나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아.’
역시 최연하다.
“차라리 전화를 할까?”
“네? 전화해서 뭐 하려구요?”
“요망한 뇬, 꼬리치지 말라…….”
“으아아! 진짜!”
한은솔이 달려들어 최연하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누나! 제발 진정 좀 해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그러지 말고…….”
한은솔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겨야 한다.
“누나 말대로라면 가까운 시일 내에 그 여자가 강진호 씨를 만나려고 할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럼 그 뒤에 만나든 머리채를 쥐어뜯든 해요. 지금 누나가 뭘 하려다가 아무 일도 아니면 누나 꼴만 우스워진다니까요. 강진호 씨가 안 좋게 볼 수도 있잖아요.”
“그럴까?”
“네. 그렇다니까요.”
“으으음.”
최연하가 슬그머니 엄지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손!”
“쳇!”
손을 내린 최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은 내가 참는다. 그런데 진짜 니가 말한 대로 연락이 오거나 기미가 보인다 싶으면, 정말 머리채 쥐어뜯어 버릴 거야.”
“……그러세요.”
한은솔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강진호 씨가 봐야 하는데.’
앞에서는 착한 척 다 했을 텐데.
미안합니다, 강진호 씨. 제가 그래도 누나 매니저라 도와드릴 수가 없네요.
“그러니 일단은 일하러 가요. 네?”
“알았어.”
일단은 수습을 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한은솔이지만, 그는 몰랐다. 그가 한 말이 어떤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올지.
세상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격하게 돌아간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