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6
#105.
휴가 가다 (5)
박유민이 난처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 보는 그대로야.”
“상태는?”
“위암 4기.”
강진호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진단이 4기가 나온 순간 희망이 거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수술은?”
“복막으로 전이가 너무 많이 되어서 수술이 불가하다고 하더라.”
“그럼?”
박유민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강진호 역시 어떠한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냥 아무런 수 없이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가를 물은 것이다.
“……딱히 방법이 없어.”
강진호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혹시 몰라 챙겨 나온 담배가 손에 잡히자 일단 한 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
끊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이런 일들 때문에 끊을 수가 없는 게 담배였다.
“4기라면 진행이 많이 된 것 아냐?”
“그렇지.”
“징후가 있었을 텐데?”
박유민은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진호는 그런 박유민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다.”
“아니야. 내 잘못이니까.”
“네 잘못이 아냐.”
숙소에서 생활을 했을 박유민이 무슨 수로 원장 수녀님의 징후를 발견한단 말인가. 이전에 같이 생활을 했을 때라면 그래도 일말의 책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 달 내내 숙소에서 생활하고 보육원에 들르는 게 달에 채 이틀도 되지 않는 박유민에게 원장 수녀님의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징후는 있으셨던 것 같은데, 본인 몸을 워낙 안 챙기시는 분이라 차일피일 미루시다가…….”
“그러셨겠지.”
시간이 있을 리가 없다.
스무 명이 넘는 애들을 모두 챙겨야 하는 분인데, 병원에 갈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좀 더 신경을 써야 했어.’
박유민이 보육원을 떠났다고 얼굴을 들이밀고 남자가 할 일을 찾아볼 게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원장 수녀님께 몰리는 과부하를 해결했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은 강진호의 실수였다.
“세연이는?”
“한세연?”
“응.”
“세연이는 요즘 보육원에 잘 안 와.”
“그렇구나.”
강진호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위암 4기라…….’
복막에 전이가 되었다면 현대 의학으로는 죽음을 늦추는 것 이상의 것을 할 수 없다. 항암 치료를 받으며 연명할 것인가, 아니면 항암 치료를 포기하고 편안한 죽음을 위해 노력할 것인가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알고 계셔?”
“……응.”
“말씀드렸어?”
박유민이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씀을 안 드릴 수가 없었어.”
“그래도…….”
“강한 분이야. 본인에 상황에 대해 아셔도 절망할 분이 아니야. 그러니 차라리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그렇겠지.”
박유민의 선택에도 일리가 있다.
“간병은 어떻게 하고 있어?”
“교구의 다른 수녀님들이 와서 봐주셔. 나는 애들 보는 데도 정신이 없으니까.”
“너 훈련은?”
“……지금 상황에 무슨.”
강진호는 답답한 마음에 길게 담배를 빨았다. 입으로 나와 하늘로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보고 있자니 속이 더 쓰린 것 같았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겠네.”
“원장님이 겪고 계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아직 안 돌아가셨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른 박유민이 강진호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닌 것 잘 아는데…….”
“아니, 내가 실수했다.”
박유민은 뭔가 더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뻐끔대다가 그냥 자리에 앉아버렸다.
“직접 보육원을 맡아보니 그동안 원장님이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를 알 것 같더라. 잠잘 시간도 잘 없어. 정신이 하나도 없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나 혼자서는 원장님의 빈자리를 전혀 채울 수가 없어.”
“…….”
“성공만 하면 보답해 드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틀린 거였어. 내가 성공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 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조금이라도 먼저 내가…….”
“그만해, 인마.”
강진호가 박유민의 말을 끊었다.
“징징대지 마. 그런다고 달라질 것 없어.”
“그렇지.”
박유민이 얼굴을 훔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튼 그렇게 됐어. 이제 들어가 봐야지. 애들 기다리겠다.”
“……계속 그렇게 애들이나 보고 있을 거냐?”
“그럼 뭐 어떻게 하냐?”
“아니다.”
강진호는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의 박유민에게 어떤 말이 들리겠는가.
“먼저 들어가라.”
“약속 있어?”
“들를 데가 있다.”
박유민은 알겠다는 듯 인사를 하더니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한동안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강진호가 몸을 돌려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동으로 올라간 강진호가 원장님이 있던 병실로 다시 들어갔다.
“어머, 진호야?”
강진호가 다시 들어오자 놀란 원장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산책이나 가시지 않겠습니까?”
“으응?”
환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휠체어에 사람을 옮기고 앉히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치렁치렁 늘어진 수액들을 달고 거기에 온갖 담요를 뒤덮고서야 겨우 산책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쏟아진 간호사들의 잔소리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이나 지금 원장님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따뜻하구나.”
1층으로 내려와 정원에 들어서자 원장님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찬바람이 들면 안 된다.’
날씨가 따뜻하기는 하지만 혹시나 한기가 들까 싶은 강진호는 은근히 기를 뿜어내 주변의 공기를 데웠다.
“군 생활은 잘하고 있니?”
“네.”
“힘들다던데.”
“엄살입니다.”
원장님이 가볍게 웃었다.
“군대를 그렇게 말하는 건 진호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 그런 말을 해도 어울리는 사람도 진호 말고는 없을 것 같네.”
햇살이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에 내려앉는다.
언제나 머리 수건을 쓰고 있던 모습만 보다가 이처럼 환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녀도 그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작은 몸.
저 작은 몸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지탱해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유민이가 애들을 잘 보고 있더니?”
“예.”
“걱정이네. 힘들 텐데.”
“잘할 겁니다.”
“그렇겠지?”
강진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걱정이네. 계속 그렇게 있으면 안 되는데, 유민이에게도 인생이 있는 거니까. 아이들에게 잘하는 것도 좋지만, 얼른 자기 인생을 찾아야지.”
“…….”
그가 하고 싶던 말을 대신하는 원장님 앞에서 강진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진호야.”
“예.”
“유민이는 너를 많이 의지했단다. 알고 있니?”
“예.”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강진호가 언뜻 차가워 보이기도 하지만, 원장님은 그런 강진호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뻗어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강진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너를 만나고 유민이가 많이 밝아졌단다. 항상 입을 닫고 있던 아이였는데, 어느 날부터 돌아오면 학교에서 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지.”
그때의 모습을 회상하는지 원장님의 얼굴이 아련해졌다.
“그 뒤로는 무슨 일만 있으면 진호, 진호. 내가 다 지겨울 정도로 네 이야기를 해 댔지. 그래서 그런가, 몇 번 보지도 못했을 때부터 네가 참 친숙하고 익숙했단다.”
강진호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뭔가 쿡쿡대는 기분이다.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은 우라지게 맑기만 하다. 눈치도 없이.
“이제 내가 가고 나면 유민이는 의지할 데가 없어진단다. 그러니까, 네가 유민이를 도와주렴.”
“걱정 마십시오.”
“그저 친구가 되어주는 것으로 좋단다. 그럼 유민이도 외톨이가 된다는 기분은 느끼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예.”
손끝으로 전해지는 따스함에 강진호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슬쩍 기운을 보내 원장님의 몸을 살피자 가슴과 배 가득 독한 탁기가 느껴진다.
그는 신이 아니다.
아무리 그가 현대의 의학과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특정한 영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무공으로 모든 사람을 치료할 수 있었다면 그는 무사가 아니라 의원이 되었을 것이다. 과거 중원의 괴의(怪醫)나 약선(藥仙)쯤 되는 이들이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진호의 의학에 대한 지식은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강진호는 그 사실을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내가 가고 나서도 다들 씩씩하게 커야 할 텐데.”
“……이겨내셔야죠.”
강진호의 말에 원장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죽고 사는 건 그분의 뜻이란다.”
“…….”
“이제는 이생에서 내가 할 일을 모두 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구나. 아쉽지만 그뿐이란다. 언제가 되면 아쉽지 않겠니. 삶이란 언제나 미련을 남기는 것이고, 모든 것이 완벽할 때란 없단다. 그러니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지.”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저 담담했다. 딱히 스스로를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강진호는 그녀에게서 받고 있는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언어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저 조금은 편안해 보이고, 조금은 안쓰러워 보이고.
그저 자연스러웠다.
“아직은 다들 원장님이 필요합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혼자가 된단다. 알고 있지?”
“……예.”
“혼자라는 건 쓸쓸하고 힘든 거란다. 더없이 외롭고 슬프지. 하지만 그렇다고 품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은 결국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지 못하지. 조금 이르든 늦든, 결국에는 떠나야 하는 거란다.”
달라졌을까?
가족을 잃고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세상이 그를 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먼저 나서서 새로운 세상을 찾았더라면…… 어쩌면 그리 살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늦어버린 일이지만.
“그러니 담담하자꾸나.”
“……예.”
“이제 들어가야지. 간호사들이 걱정하겠구나.”
“알겠습니다.”
강진호는 천천히 휠체어를 몰아서 병실로 향했다. 휠체어 앞으로 보이는 앙상한 목덜미가 자꾸 눈에 밟힌다.
겨우 병실로 돌아가 원장님을 눕힌 강진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또 오겠습니다.”
“진호야.”
“예?”
원장님은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바라보았다.
“힘내거라.”
“……예.”
몸을 돌려 병실을 빠져나오는 강진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대로는 아니야.’
원장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주어진 삶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수많은 죄를 짓고도 뻔뻔히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저런 사람은 이리도 일찍 가야 한단 말인가.
강진호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제 한 몸을 아끼지 않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산 사람의 마지막이 이토록이나 초라한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적어도 몇 년의 시간이라도…….
우득.
주먹을 꽉 쥔 강진호가 차가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법을 찾는다.’
굳은 결심을 한 강진호가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