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63
#1062.
대응하다 (2)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수령.”
요헤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기호지세다.’
이미 달리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탔다. 두렵다고 그 등에서 내리는 순간, 호랑이의 이빨이 그의 목줄기를 물어뜯을 것이다. 살고 싶다면 두렵더라도 등을 움켜잡고 버텨야 한다.
다만…….
그냥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왕 호랑이의 등에 올라탔다면 호랑이의 협조자가 되어야 한다. 같이 물어뜯지는 못하더라도 등을 긁어줄 수는 있겠지.
“하지만 한 가지 더 고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자금에 대한 문제가 나와 저들이 반발하게 된다면, 우리가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없게 됩니다.”
“숨겨?”
차이커창이 피식 웃었다.
“누구에게 숨긴다는 거지?”
“당연히 조선 놈들에게…….”
“하!”
차이커창이 이마를 잡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이 나라는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모르겠군. 분명 바깥세상은 더없이 발전한 것 같은데, 무인계 놈들은 하나같이 과거에 사는군.”
“무슨 말씀이신지…….”
“이봐.”
차이커창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쟁을 숨긴다는 게 가능할 것 같나?”
“…….”
“그건 천 년 전에도 불가능했던 일이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기습이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분명 그런 사례들이 있지 않소?”
“있겠지. 지도자라는 놈들이 멍청하게 징조가 있는데도 무시하거나 병신같은 자부심에 매몰된 경우. 하지만 한국 놈들은 그런 멍청이들이 아니야. 너희가 지금 전쟁을 준비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거다.”
“으음…….”
“그리고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하지? 이미 너희는 원정을 했다가 실패하지 않았나. 저들이 반응하지 않고 있다 해서 그 사실을 지웠을 것 같나? 천만에.”
차이커창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러니 쓸데없는 짓거리 좀 하지 마. 전쟁이란 건 결국 개전을 할 때 어느 쪽이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는가의 승부다. 그리고 그 격차는 지금 이 순간에도 좁혀지고 있지. 너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다.”
시선이 교차된다.
“저들이 안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전력을 만들어내 뒤도 보지 않고 쳐들어가는 거지.”
“그건 너무 빤한…….”
“필승법이지.”
“…….”
말 자체는 장난스럽지만, 차이커창의 표정과 태도는 조금의 장난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빤한 것을 빤하게 해낼 수 있다면, 빤하게 이기는 법이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어디서 어설프게 주워들은 놈들이 정공법은 빤한 책략이라 생각하지. 정공법이 정공법인 이유는 그게 가장 높은 승률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기략과 귀계 따위는 언제나 한계가 있는 법. 모험은 약자가 하는 것에 불과해. 아직 강자라면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으음…….”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시간이나 줄여.”
차이커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요헤이가 그런 차이커창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저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수령이 재미있다는 듯이 요헤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으냐?”
“저자의 말이 그리 틀린 게 없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 태도만큼은 도무지 버텨내기 힘듭니다.”
“흐음.”
수령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저놈이 홍왕계라고는 하지만, 저희를 이토록 깔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너무도 고압적이지 않습니까?”
“요헤이.”
“예, 수령.”
“나와 네가 그리 친근한 사이는 아니지만, 한동안 한 배를 타야 할 사이니 하나 이야기해 두마.”
“예.”
“너는 홍왕계의 이인자, 실권자라는 자리가 능력만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하느냐?”
“…….”
요헤이가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중국인은 예의가 부족할지는 모르겠지만, 체면은 더없이 중시한다. 당연히 상대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는 법에도 민감하지. 몰라서 저리 구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째서?”
“뒤흔드는 거지.”
수령이 나직하게 웃었다.
“홍왕계의 이인자와 신니치카이의 수령이라는 신분은 서로 예의를 차리고 서로의 체면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지는 관계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더없이 중요한 회의였지 않은가.”
“예?”
“그럼에도 지금 너의 머리는 차이커창으로 가득 차 있지.”
“…….”
“거물은 거물인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생각없는 행동 하나에 모두 계산이 깔려 있지. 흔들리지 마라. 저자가 원하는 대로 뒤흔들린다면 나중에는 모든 걸 내놓게 될 것이다.”
“하면 수령께서는?”
“광대가 날뛰면 박수를 쳐주는 게 예의 아니겠느냐. 광대를 불러놓고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면 광대도 흥이 나지 않는 법이지. 지금 우리는 놈이 필요하다.”
“이해했습니다.”
요헤이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군.’
하지 않아도 될 도발을 하는 이와 굳이 그 장단에 맞춰주는 이.
대체 무엇을 위해 서로 그런 짓을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다만, 그 둘 모두 나름의 속셈이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놈을 고분고분하게 만들려 하지 마라. 사람이 독사를 키우는 이유가 뭔지 아느냐?”
“쓸모가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 독이 있기 때문이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독이 없는 뱀은 그냥 뱀일 뿐이다. 독사가 될 수 없지. 독사는 독을 지니고 있기에 다른 가치를 가진다. 그 독을 빼버린다면 더는 독사가 될 수 없지.”
“아…….”
“도움만 된다면 그 독이라도 얼마든지 삼켜주지. 도움이 될 때까지는 말이야.”
요헤이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이커창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피식 웃었다.
‘늙은이가 애가 달았군.’
사람들은 계략이라는 것을 너무 꼬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진정한 계략이라는 것은 상대를 완벽하게 속여 넘기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커다란 착각이다.
진짜 계략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결국 계략이라는 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목표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상대를 속이는 불필요한 과정은 오히려 발목을 잡을 뿐이다.
진짜 계략을 드러내는 것.
빤히 의도를 알고, 빤히 자신이 당한다는 것을 알고도 제 발로 의도한 대로 걷게 만드는 게 계략이다.
필요한 것은 먹음직스러운 미끼.
한국이라는 미끼?
아니.
권력이라는 미끼다.
요헤이는 모른다. 귀가 뚫려 있어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은 충분히 경계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천만에.
‘알 수가 없지.’
권력의 맛을 제대로 보지 못한 이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권력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더 많은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차이커창은 수령에게 한국을 집어삼킬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게 아니다. 한국을 이용해서 어떻게 하면 절대의 권력을 쥘 수 있는지 알려준 것뿐이다.
수령은 알고 있다.
차이커창의 말대로 한다면 결국 일본은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의 정적들은 제거될 것이고, 그 세력들은 필요 이상의 희생을 치러야 한다.
일본이라는 개념에서 보자면 역적이나 다름없는 짓거리다.
그래서 망설인다고?
천만에.
권력자의 성향은 언제나 같다. 통제되지 않는 백의 권력은 완벽하게 통제되는 십의 권력에 미치지 못한다.
차이커창의 말을 따르면 한국을 집어삼키더라도 일본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약해진 일본은 홍왕계에 위협이 되지 못한다.
수령은 그 모든 것을 빤히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으면서도 차이커창의 말을 따를 것이다. 더 완벽한 권력을 손에 쥐고 왕이 되기 위해.
수령이라는 어정쩡한 권력으로 남는 게 아니라, 진정한 일본의 왕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을 웃으며 불구덩이로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게 계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계략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저들은 자신을 충분히 경계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멍청한 소리. 경계해야 할 것은 언제나 자신부터다.
‘이렇게나 쉬운데 말이야.’
차이커창이 한숨을 내쉬었다.
관서를 지배하는 신니치카이의 수장도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다. 적이라 불러야 마땅할 이들의 뱃속에 홀로 들어와 있음에도 그는 어떠한 위협조차 느끼지 못했다.
당연히 이랬어야 한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놈에게는 안 먹힌단 말이지.”
차이커창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강진호.
그 이름만 생각하면 숨이 가빠진다.
그의 모든 계략과 전략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존재.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곧 이곳을 마무리해야 한다.’
홍왕계에서 그가 맡고 있는 일은 절대적이다. 자리를 비우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지금 차이커창은 충분히 무리를 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용을 잡으려면 신검(神劍)이 필요한 법이지.”
강진호를 잡기 위한 마지막 퍼즐.
이제 그 퍼즐을 완성할 때다.
* * *
부우우우웅.
붕붕이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액셀을 밟는 강진호의 발도 간만에 경쾌한 느낌이었다.
‘확실히 느낌이 다르군.’
사람이란 참 이상한 존재였다.
액셀을 밟으면 차가 나간다. 이 기계적인 일을 하는데 감정이 스며들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향하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서 기분이 달라진다는 게 재미있는 일이었다.
재경으로 출근하는 게 딱히 기분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리 즐거운 일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총회를 향해 액셀을 밟는 일이 이리 즐겁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새빨간 스포츠카가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산길로 접어들었다.
강진호가 이곳에 처음 방문할 때만 해도 산길로 한참을 올라가야 겨우 건물을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우거진 산림을 좌우로 둔 비포장도로를 타고 올라가자 철문으로 가로막힌 사유지가 나온다. 강진호의 차가 접근하자 철문이 거친 쇳소리를 내며 좌우로 열렸다.
문을 지났음에도 풍경은 별달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풍경이 극적으로 바뀐 것은 1분쯤 더 액셀을 밟고 나서다.
흙길이 끝남과 동시에 완벽하게 포장된 이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도로의 좌우로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쭈욱 들어서 있었다.
‘거의 완성됐군.’
마교도들의 거주지.
그리고 ‘왜 짱개 새끼들은 기숙사에 살고, 우리는 한참 먼 원룸에서 살아야 하나’라는 불만에 대응해서 만들어진, 총회의 무인들을 위한 신축 기숙사가 강진호의 눈에 펼쳐진다.
하지만 우습게도 차도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대신 차도 좌우로 난 인도를 무인들이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출근을 위해 산을 오르던 이들이 강진호의 차를 발견하고는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강진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인사를 받고는 액셀을 더 힘차게 밟았다.
‘항상 이럴 때마다 어색하다니까.’
빠르게 차를 타고 올라가자 탁 트인 광장이 나온다.
그리고 고풍스러운 커다란 건물들이 보였다.
한국 무도 총회.
오랜만에 보는 총회 건물의 모습에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오랜 여행을 떠났다가 집에 돌아온 기분이다.
강진호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쪽에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