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71
#1070.
수정하다 (5)
“용인이라는 말은 조금 이상합니다.”
이현수가 석동수의 말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용인이 아니라 협조입니다.”
“협조?”
“예, 그렇습니다.”
“그 말부터가 건방지단 말이다.”
석동수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자네는 총회라는 곳에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지만, 정부의 입장에서 보기에 그 총회라는 것과 무인계라는 곳은 그냥 크기가 큰 암흑가에 지나지 않네. 그런데 우리가 자네들에게 협조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하는 협조는 공조와 같은 의미입니다. 총회가 법인화, 합법화하는 것은 정부와 국가에도 분명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우선 말씀하신 대로 세수 확보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착각하는 모양이로군.”
석동수가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세금 이야기를 하려거든 국세청장을 찾아가게. 자네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부터 이게 단순히 세수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그 이중성이네. 법망을 피해서 살아가고 있는 자네들이 돈만은 합법화하겠다는 걸 용인할 수 없다는 뜻이지. 인생이란 전부가 아니면 전무인 법이지. 합법화를 하고 싶다면 사람까지 법의 영역에 들어오게. 그게 아니라면 돈의 합법화도 포기하든가.”
이현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무인계를 합법화하라는 것은 더 이상 무인으로 살아가는 걸 포기하라는 말과도 같았다. 그들의 어떤 것도 법과 공존할 수는 없으니까.
‘모를 리가 없다.’
석동수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협상 자체를 뒤엎겠다는 뜻이었다.
‘가능한가?’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현수와 석동수가 협상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이곳에 나와 있는 두 사람은 협상의 주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엉덩이가 무거운 윗사람을 대신하는 대변인에 불과했다.
이현수가 아무리 총회의 실장이자 실질적인 총회의 이인자라 불린다고 할지라도 감히 강진호를 대신하여 총회를 대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석동수가 아무리 대한민국 의전 서열 9위라는 드높은 지위에 있는 기재부 장관이라고 할지라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대변할 수는 없다.
결국 이현수와 석동수 모두 사정상 직접 대면하여 협상을 할 수 없는 윗사람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꼭두각시가 지금 실을 끊고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곤란한데…….’
이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안의 적절한 대가를 확정하고 세부 사항을 조율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한 사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장관님도 알고 계실 텐데요.”
“그럼 더 할 말은 없겠지.”
석동수가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결렬하는 수밖에.”
“장관님!”
이현수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하지만 석동수는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담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자네들은 정부를 너무 우습게 봤어. 그깟 돈 몇 푼 벌자고 그 구리고 더러운 돈을 정부가 나서서 깨끗하게 세탁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가?”
“…….”
“한 번의 세탁으로 끝난다면 또 모르지. 하지만 자네들은 앞으로도 계속 같은 짓을 하겠지. 그런 더러운 일에 계속 어울려 줄 생각은 없네.”
“오해십니다. 저희는 불법적인 사업에는 손을 끊었습니다. 그렇기에 합법적인…….”
“아아…….”
석동수가 손을 내저었다.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자네들이 아니더라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수도 없었지. 그자들이 지금 다 어떻게 됐는 줄 아는가?”
이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협상을 할 생각이 없다.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물어보게.”
“이게 장관님의 의사입니까, 아니면 정부의 의사입니까?”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석동수가 비웃듯 말했다.
“내 의사가 곧 정부의 의사가 아니겠는가. 자네, 장관이라는 자리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그쯤 되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라 해야겠지.”
‘정부의 의사라는 뜻이군.’
그럼 어느 선까지?
가장 위? 아니면…….
이현수가 가만히 석동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 역시 합법화를 하라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관습이라는 이유로 자네들에게 당연하게 주어지던 특혜를 회수하겠다는 뜻이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나?”
석동수가 피식 웃었다.
“사람 죽여놓고 은근슬쩍 묻어 없애고, 저들 전쟁하는 데 군을 동원하고, 경찰은 우습게 보고, 온갖 불법 사업을 해 대면서 교묘하게 대리인을 내세워 법망을 피해가고, 심지어는 마약까지 손을 댔더군.”
“앞부분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말을 빼주십시오. 그건 전임 회주의 일입니다. 새 회주님이 선출되고 나서는 마약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꼬리 자르긴가?”
“사실이 그렇습니다.”
“뭐, 좋네. 그 죄목 하나 뺀다고 자네들이 저지른 일이 깨끗해지지는 않으니까. 법치국가에서 이런 짓들을 해 대고 있으면서 은근슬쩍 햇빛 아래 얼굴을 들이밀고 떳떳하게 살겠다?”
말이 점점 과격해진다.
“나는 그런 걸 용납해 주기 위해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게 아니네.”
“장관님.”
이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분노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관님, 장관님은 임기가 있지만, 무인계는 임기가 없습니다.”
“음…….”
“국가가 존재하는 한 무인계는 존재합니다. 장관님이 원하시는 대로 깨끗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무인계를 양지로 끌어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장관님이 무인계를 용납할 수 없다고 해서 다시 저희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다면, 지금까지와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석동수가 말없이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니 부디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이번 일만 잘 해결해 주시면, 저희도 협조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허허허허허.”
석동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석동수가 안색을 확 바꾸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오냐오냐해 줬더니, 천지를 모르고 설치는군.”
“……장관님.”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
석동수가 이를 갈 듯 말했다.
“사회의 기생충 같은 것들이 돈 좀 벌더니 주제를 모르는군.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 같은 것들은 깔끔하게 쓸어버릴 수 있어.”
“협박이 아닙니다, 장관님. 그저…….”
“일없네.”
석동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관님!”
이현수가 만류하려 했지만, 석동수는 단호한 동작으로 제지했다.
“쓸데없는 일에 서로 시간 뺐기지 않았으면 좋겠군.”
“저…….”
보좌관이 일어나자 석동수가 미련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이현수는 방을 빠져나가는 석동수를 제지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석동수를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석동수가 고개를 돌렸다.
느물느물한 얼굴로 이현수를 훑어본 석동수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준 자료는 잘 읽어보겠네. 그중 합법적이지 않거나, 명의가 불분명한 곳은 조사가 들어갈 테니, 잘 관리하길 바라네.”
“이…….”
“아무리 범죄자 놈이라고 하나 제 손으로 바친 걸로 꿀꺽하자니 조금 민망해서 말이야. 공직에 몸을 담은 사람의 양심이라고 해두지. 하하하하!”
석동수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가 버렸다.
이현수는 석동수가 사라져 버린 문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돼지 새끼가!’
참기 힘든 굴욕감이 이현수를 덮쳤다.
얼굴에 피가 몰려 숨이 가빠오고, 눈앞에 아득해진다. 이현수가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해 마음을 진정시킨 이현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야.”
흥분했다고는 하나 이성까지 잃지는 않았다. 그의 이성이 경고하고 있었다.
‘장관이 이럴 이유가 없다.’
알량한 정의관을 내놓긴 했지만, 정치인은 정의가 아니라 이득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저자가 총회와 정부의 협력을 막으려 든다면, 그 상황을 통해 얻어낼 이득이 있다는 뜻.
하지만 대체 누가 저자에게 그만한 이득을 줄 수 있단…….
“설마…….”
이현수가 입을 벌렸다.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에서까지 손을 써온다는 건…….
이현수가 다급하게 전화기를 들었다.
이건 그 혼자 생각할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회에 알려야 한다.
* * *
석동수를 태운 검은 세단이 빠르게 도로를 내달렸다.
쏟아지는 비를 헤치며 나아가는 세단 안에서 석동수는 공손한 자세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예, 위원님.”
유창한 중국어.
그가 통화를 하는 대상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분부하신 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걱정되기도 합니다. 상부에서 좋게 해결하라는 지시를 이미 내렸건만, 제 선에서 끊는다는 건……. 예. 위원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면 걱정이야 있겠습니까.”
석동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송구스러운 말입니다만,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석동수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하하하, 물론입니다. 제가 설마 위원님의 힘을 모르겠습니까. 위원님께서 힘을 써주신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네, 물론입니다. 저야 위원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그럼.”
전화를 끊은 석동수가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쳤다.
‘귀신이 따로 없군.’
그가 오늘 이현수를 만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고 그 타이밍에 전화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덕분에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었다.
‘중국 상무위원의 지원이라…….’
석동수의 입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한국이 아무리 친미 국가라고는 하지만, 이제 중국이 한국에 미치는 힘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한민국 대통령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중국 상무위원의 지원이 있다면, 지금까지는 꿈도 꿀 수 없는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대표적인 친중파로 분류되는 그가 아닌가. 거리낌은 없다.
‘하지만 의외로군.’
총회의 발목을 잡는 대가로 저들이 제시한 대가는 너무도 파격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 역시 한국의 무인계를 그만큼이나 견제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강대한 힘을 가진 자들이 경계하는 이들이라면, 그들 역시 강대한 존재라고 봐야 한다. 석동수는 총회를 경시하는 마음을 버렸다. 지금부터는 전쟁이다.
“아까 그 자료 다시 줘봐.”
“예, 장관님.”
석동수가 보좌관이 내민 자료를 받으며 눈을 빛냈다.
‘함께 갈 수 없다면, 철저하게 망가뜨려야 한다.’
그게 지금까지 석동수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총회에 대한 자료를 읽으며 석동수는 어떻게 해야 이 발칙한 놈들의 명줄을 확실하게 끊을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누구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 건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