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77
#1076.
찾아내다 (1)
“예?”
[석동수가 입장을 철회했습니다. 대체 뭘 한 겁니까?]“아, 아니…….”
이현수는 당황한 호성을 낼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물어도…….’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로 이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 알긴 하지.’
강진호.
그가 간밤에 무언가를 한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무슨 일을 한 건지 모르는데.
“저는 잘…….”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납치해서 고문이라도 한 겁니까?]“저희, 그런 것 안 합니다.”
[압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서 그렇습니다.]“아니, 대체 무슨 일이…….”
[새벽부터 석동수가 총리님 댁을 찾아가서 난리를 피웠답니다.]“예?”
[총회에서 원하는 걸 지금 당장 진행해야 한다고 미친놈처럼 날뛰었답니다.]“아니…….”
이 양반, 대체 뭘 한 거야?
[얼마나 절박해 보이는지, 총리님이 석동수 장관 집에 누가 납치된 건 아닌지 알아볼 정도였답니다. 세 살박이 애가 유괴돼서 잘린 손가락이 와도 그런 몰골은 아니었을 거라고 하시더군요.]이현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농담거리가 아니다.
‘대체…….’
해결이 될 거라고는 생각했다.
강진호는 언제나 이현수의 상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만들어왔으니까. 그런 일을 몇 번이나 겪고도 ‘이번에는’이라고 생각하는 건 만화에 나오는 삼류 악당이나 하는 짓이다.
당연히 해내겠지.
그 강진호가 장담한 일이니까 해결이 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미친놈처럼 질려 있었다고?’
위화감이 든다.
물론 적당히 겁박할 거라는 생각은 했다. 애초에 강진호의 해결책이라는 게 보통은 그런 식이니까. 일단은 다짜고짜 사람 목을 틀어잡았겠지.
거기까지는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적당히 혼을 내서 마음을 돌리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사람을 거의 폐인으로 만들어 버린 수준이 아닌가.
이현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회주님이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었나, 이게?’
물론 화를 낼 만한 상황이기는 하다.
어떻게 보면 석동수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매국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애국자의 입장에서 보면 쳐 죽여도 시원찮은 짓을 저지르려 했다.
문제는 이현수가 아는 강진호는 전혀 애국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애국은 무슨.’
한 번씩은 강진호에게 정말 국가라는 개념이 존재하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강진호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강진호의 말대로라면 강진호는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중국에서 산 세월이 더 기니까. 강진호의 성향을 생각하면 석동수가 중국 쪽에 붙었다고 딱히 더 분노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여하튼 덕분에 일은 잘 풀릴 것 같습니다.]“아…… 그렇죠.”
발목을 잡아대던 이가 최대의 우호파로 돌아선 상황이니, 막혀 있던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총리님께서도 일단은 이 기회에 밀린 일들을 쫙 정리해 버릴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그럼 그쪽에 요청하는 자료들도 생길 겁니다. 미리 준비하셨다가 바로바로 보내주십시오.]“물론입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는데…….]“예?”
[석동수, 저 양반…… 정상으로 돌아오기는 하는 겁니까? 일단은 저 양반이 지금 기재부 장관인데, 저런 몰골로는 대외 활동이 불가능합니다. 새로 장관으로 임명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 경질도 어려워요. 정권에 타격이 갑니다.]“아…….”
이현수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건강상의 무리가 왔다고 자체적으로 사임하는 건 안 되겠습니까?”
[말이 통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켜야 합니다. 장관이 미쳐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이 돌면 난리가 날 테니까 쉬쉬하고 있는 것뿐입니다.]그렇겠지.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안만으로 일주일은 즐겁게 떠들 만한 일이 될 것이다. 정권에서는 절대 그런 구설수는 만들고 싶지 않겠지.
“일단 그럼 그 부분은 제가 한 번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그쪽에서 손을 쓴 건 맞는 거군요?]실수.
이현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게 아니라…….”
할 말이 궁해졌지만, 다행히 더 추궁해 오지는 않았다. 그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튼 알겠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다시 전화드리죠.]“감사합니다, 의원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작은 선물이라도…….”
[아니, 아니. 됐어요! 선물은 무슨. 그동안 받은 게 있는데, 여기서 뭘 더 바라면 염치가 없는 거죠. 제가 딱히 뭘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아, 그럼 총리님에게라도…….”
[괜찮습니다. 총리님도 뭘 바라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제가 상황 보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현수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바짝 쫄은 것 같은데.’
평소 같았다면 선물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반색했을 것이다. 이놈들은 이제 총회의 돈을 처먹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으니까.
최근에는 최소한의 겸양조차 떨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선물을 거절한다는 것은, 이놈들도 이제 부담스러운 부분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렇겠지.’
이현수가 피식 웃었다.
이중걸은 정치권과 연줄을 만들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다만, 그 접근의 방식은 돈 있는 조폭들이 정치권과 연줄을 만드는 방식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최대한 돈을 풀고, 그쪽에서 귀찮아 하는 일이 생기면 이쪽에서 해결을 해준다.
그런 과정을 이어가면서 관계를 맺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쪽의 부탁을 저쪽에서 딱 끊어내기 힘들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동안 먹은 돈이 무시하지 못할 만큼 쌓인데다가, 구린 일들을 시켜 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 그 일로 정치인을 협박하지는 않는다.
그건 관계를 끊을 각오를 했을 때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그런 소문이 퍼지면 새로운 관계를 맺기가 어려워진다.
품 안에 넣어둔 칼처럼 그저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위협일 뿐이다. 칼이 녹이 슬어 뽑히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을 뿐.
그러니까 좋게 말하자면 동업 관계고…….
‘호구지, 호구.’
돈 주지, 심부름해 주지.
하기야 그렇게 저자세로 나갔으니까 총회가 세력을 쭉쭉 뻗어 나갔음에도 정권에서 딱히 견제를 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중걸의 처세술은 감히 이현수가 따라가지 못할 경지에 올라 있었다.
군사정권 때는 군사정권의 끄나풀로 온갖 더러운 일은 다 도맡아 했고, 민주화가 되고 나서는 정권에 돈을 무더기로 풀면서 과거를 세탁했다.
민주화가 되고도 목에 힘을 준 군대 내 사조직들이 모가지가 잘려 나갈 때, 바짝 업드린 총회는 충실한 애견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이제 저들도 알게 된 것이다.
그 충실한 애견의 이빨이 그들의 생각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롭다는 것을, 그 이빨이 목줄기에 틀어박히면 죽는다는 걸 말이다.
‘생각보다 좀 빠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저쪽의 반응을 보아 역효과는 딱히 찾아볼 수 없으니,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른다. 이걸로 총회도 운신의 폭이 조금 넓어질 테니까.
‘지금은 그보다…….’
이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그의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문으로 강진호의 스포츠카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일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지.”
조금 무서운데.
“……어.”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현수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뭔가…….’
딱히 뭔가를 짚어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강진호의 느낌이 조금 달라졌다. 그 달라졌다는 것도 매우 미묘한 정도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조금 옛날에…….’
싫은 기억이 떠오른다.
예전 강진호가 영남회에 처들어왔을 때, 총회의 인원을 있는 대로 끌고 오고서는 혼자 영남회의 무인들을 싸그리 도륙해 버리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이현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면 잘도 이런 사람이랑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구나.’
적의 피를 전신에 뒤집어쓴 채 천천히 걸어오던 강진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강진호가 마음을 조금만 달리 먹었다면 이현수는 그 자리에서 천참만륙이 났을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인생을 통틀어 그에게 가장 큰 공포를 안겨준 사람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니.
소파에 앉아 담배를 무는 강진호의 모습에서 예전의 나른함이 느껴졌다.
최근 들어서는 잘 보이지 않던 모습.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석동수 장관을 찾아간다는 건 꽤나 독특한 이벤트이긴 하지만, 그런 장관 따위가 강진호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강진호 스스로 뭔가 마음을 달리 먹은 게 있다는 건데…….
“보고.”
“아, 예!”
이현수가 정신을 퍼뜩 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석동수 장관이 새벽에 총리님댁을 찾아가서 회의 일을 당장 추진하겠다며 날뛰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강진호가 대답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확실하게 알 것 같다.
예전에 그가 총회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이현수가 긴장도를 확 올렸다.
“총리 쪽에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틈을 타서 법인화를 마무리하겠다는 의견입니다.”
“진행해.”
“예! 그리고 그쪽에서 석동수 장관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물어왔습니다. 지금 당장은 퇴장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총회의 일이 끝나면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아, 그럼 혹시?”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앞으로 이쪽에 방해될 일은 없다.”
“알겠습니다.”
이현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럼 석동수는 해결했고…….’
“이현수.”
“예!”
이현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번 일에서 회를 압박하려 했던 이들의 명단 확보해.”
“친중파 말씀이십니까?”
“그래.”
“확보해 두었습니다.”
“그중 쳐낼 수 있는 이들은 바로 쳐내라고 해. 그리고 그쪽에서 쳐낼 수 없는 이들은 따로 알려 달라고 해.”
“……완전히 제거하시려는?”
“홍왕계의 입김이 닿은 놈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만한 이들이 단번에 실각하면 분명 화제가 될…….”
“구실을 만들어.”
강진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로 두면 다시 발목을 잡아온다. 귀찮다고 쓰레기를 방치하면 파리가 끓기 마련이지. 네가 처리할 수 있는 놈까지는 네 선에서 처리하고, 어려운 이는 내게 넘겨.”
“아…….”
이현수가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강진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신 정권에서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몇 가지 해결해 준다고 해. 적당히 돈도 풀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찰칵.
강진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연기를 빨아들인 강진호가 천천히 숨을 내뱉자, 새하얀 연기가 허공에서 느릿하게 흩어졌다.
“정리가 되는 대로 연수 다녀와.”
“예, 회주님.”
“이사들 들어오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구십 도로 고개를 숙인 이현수가 밖으로 나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분명 뭐가 달라지셨는데…….’
소매를 걷어보니 팔뚝에 소름이 돋아 있다. 이현수는 이 오싹오싹한 감정이 싫지 않았다.
‘친근한 회주님도 좋지만…….’
이런 난세에는 친근함보다 카리스마가 더 중요하다.
어쩌면 재밌는 변화가 생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이현수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른 이들도 이 변화를 느껴야 한다.
느슨하게 풀린 마음을 바짝 조일 수 있도록 말이다.
이현수가 재빠르게 복도를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