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81
#1080.
찾아내다 (5)
“협조적이라는 인상은 받지 못했습니다만.”
이현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회의실은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강진호는 상석에 앉아 있고, 이사진들이 주변에 배석하고 있다.
하지만 확실히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변화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너무도 극명하다.
상석에 앉아 있는 강진호가 다리를 꼰 채 몸을 살짝 소파에 기대고 앉아 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자세.
하지만 주변에 있는 이들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강진호의 기세가 조금 달라졌다는 걸 말이다.
‘예전의 그 표정이네.’
처음 강진호를 보았을 때, 이현수는 강진호가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감정이 거의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강진호가 회주가 되고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강진호는 꽤나 인간적으로 변했다. 예전보다 훨씬 웃고, 떠들고, 장난을 치면서 말이다.
‘딱히 완전히 예전 같아진 건 아닌데.’
무감정해 보이던 그때의 모습이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다만, 뭔가가 확실히 다르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일단은 이쪽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려 하는 것 같습니다.”
강진호가 턱을 괸 채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예.”
“의견은?”
이현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은 딱히 다른 대처가 필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저들이 들어주기로 한 이상은 말입니다.”
강진호는 재촉하지 않고 이현수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 일로 확실히 알 수 있던 건…… 변수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변수?”
“예.”
이현수가 마른침을 삼키고 설명을 이었다.
“장관이 마음을 바꾼 것만으로 총회의 계획이 완전히 뒤집혀 버렸습니다. 사실…….”
이현수는 오랜만에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정치인들이 가진 힘을 과소평가했다?
그런 말로는 이 느낌을 전부 표현할 수 없었다.
“총회가 가진 힘이 아직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는 거겠지.”
“……비슷합니다.”
강진호의 말이 조금 더 정답에 가까웠다. 저들이 가진 힘이 아무리 강대하다고는 해도 총회가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리 대책 없이 휘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긴스가 첨언했다.
“권력이란 건 생각 이상으로 무서운 힘입니다.”
위긴스의 얼굴도 더없이 진지했다.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무인계가 법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고는 하나, 발을 땅에 붙이고 사는 이상 국가라는 체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음.”
강진호가 침음을 냈다.
“하지만 딱히 나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위긴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원하는 것은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저들 역시 우리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읽어냈을 겁니다. 장기적으로는 우리 역시 저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어쨌든 한동안은 일이 쉽게 풀리지 않겠습니까?”
“장기적으로는.”
“예.”
“장기적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나?”
“모든 나라가 비슷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무인계를 인정하고 함께 가느냐, 아니면 무인계를 완전히 배제하느냐. 대부분은 앞을 선택했지만, 뒤를 선택한 국가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현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무인계를 배제하기로 한 선택은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외세의 침입이라든가…….”
“그렇지.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 있지.”
“그게…….”
“인간은 그리 이성적이지 않아.”
위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들이 반드시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해줄 거라는 보장은 없어. 설사 그럴 확률이 높다고 하더라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돼. 상대의 선택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는 건 무능 중에서도 최악의 무능이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위긴스.”
“예, 로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지?”
위긴스가 살짝 머뭇거렸다. 답은 이미 머릿속에 있지만, 그 말을 꺼내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군.’
오늘따라 강진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생각 이상의 무게로 다가왔다.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자세히.”
“지금 당장은 총회에 큰 영향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생각을 바꾼다면 어찌 될지 모릅니다. 결국 저들도 총회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할 테지만, 손발을 자르려 들 수는 있습니다.”
위긴스가 슬쩍 강진호의 눈치를 보고는 말을 이었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결국 총회에 우호적인 이들이 정권을 잡는 게 중요합니다.”
“한쪽을 밀어야 한다는 건가?”
“아닙니다, 로드. 50%의 확률에 거는 건 도박일 뿐입니다. 반드시 이기는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쪽이 이겨도 괜찮은 상황을 만들어야 합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기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양쪽을 동시에 지원해야 한다는 거군.”
“예. 당장 지금은 지출이 크겠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실장.”
“예, 회주님.”
“전담 부서 마련해.”
“예?”
이현수가 당황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총회 내에는 어차피 정계의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일 만한 이들이 없겠지.”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영입해.”
“…….”
강진호의 목소리가 단호하다.
“돈은 쓰라고 있는 거다. 적절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영입해서 부서 꾸려줘. 관리를 할 거라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 그쪽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지원해.”
이현수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제대로 해볼 생각이시구나.’
총리에게는 그쪽이 건드리지 않는다면 움직일 일이 없을 거라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강진호의 말은 총리에게 전한 것과는 분명 달랐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이현수의 마음을 아는지 강진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쪽을 어찌해 볼 마음은 없다.”
모두의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집중되었다.
“주제넘게 굴 생각은 없어. 휘두르려는 생각도 아니다.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다. 다만, 살길을 찾는 것뿐이야. 방향을 똑바로 잡아. 뭔가를 하려는 게 아니라 얻어맞지 않으려는 거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강진호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어려운 문제지.’
한 가지 전제가 있으면 일이 조금 쉽게 풀린다.
정권이 외부의 영향을 받는 나라는 발전하지 못한다. 이건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었다. 정권은 언제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때로는 그게 틀릴 수도 있지만, 맞고 틀림을 반복하면서 세상은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 선택에 일정한 경향성이 생기는 순간, 발전은 저해되고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총회의 발전을 위해 국가의 발전은 저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소속감이 조금 흐리기는 하지만, 강진호 역시 분명 한국인이니까.
다른 이들은 어찌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강진호는 얻어맞지 않는 이상 때리지 않는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부장.”
“예, 회주님.”
이현주가 살짝 긴장하며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골치 아픈 일은 다들 처리했으니까, 법인화 마무리 지어.”
“예, 회주님. 이달 내에 끝내겠습니다.”
“남은 이사들.”
“예, 회주님.”
“기조를 바꾼다.”
강진호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탈락자가 나와도 상관없다. 더 몰아붙여.”
“……회, 회주님.”
방진훈이 당황한 듯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주인.”
역시나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바토르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마공을 익히고 있다. 마공을 익히다가 탈락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주인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정공을 익히다가 무리를 하게 되면 주화입마에 들 수 있다. 하지만 마공을 익히다가 방향이 엇나가게 된다면 주화입마로는 끝나지 않는다.
정신이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다.
과거, 강진호가 상대한 외도(外道)처럼 광인이 되어버릴 위험이 존재한다.
“안정성을 높였으니 버틸 수 있다.”
“하지만…….”
“모두를 끌고 갈 수는 없어.”
강진호의 눈은 낮게 가라앉은 채 흔들리지 않았다.
“다들 모여서 소꿉장난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위협은 실제적이고, 아직은 힘이 부족하다. 그럼 다소의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
바토르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너무 부드럽긴 했지.’
처음 강진호를 믿고 총회에 들어왔을 때, 그가 기대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빠르게 발전하기는 했지만, 그는 좀 더 치열한 것을 원했다.
‘나 역시 안온함에 녹아버렸다는 건가.’
돌이켜 보면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과거의 바토르라면 이들과 웃고 떠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학을 익히겠다는 이들이 다치거나 죽을까 봐 우려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학이란 그런 것이니까.
치열하지 못한 자는 도태된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강진호가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사직에 올라서 누굴 가르치는 입장이라고 해서 스스로를 단련하는 데 소홀하지 마라.”
“최선을 다하고…….”
방진훈이 입을 다물었다.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는 순간, 강진호의 시선이 그에게 와닿았다. 그 서늘한 눈을 보는 순간, 나오던 말이 쏙 들어갔다.
그 눈이 묻는다.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아니겠지.’
얼마 전이었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무공을 창안해 낸 이후로 방진훈은 무공을 창안할 때처럼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들지는 않고 있었다.
스스로 수련을 하는 것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더 이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강진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조금 더 고삐를 죄면서 스스로의 수련도 박차를 가하라 말하고 있었다.
“노력하겠습니다.”
조금은 가혹할지 모른다. 하지만 강진호가 원한다면 해내야 한다. 그게 총회의 방식이니까.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모두를 돌아본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때로는 무리한 일이라도 해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마존이시여, 최선을 다해 마존께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대답하지 않은 이들도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강진호가 그 모습을 돌아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나가보지. 이현수는 남고.”
강진호의 말이 끝나자 이현수를 제외한 이들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강진호가 이현수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이현수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강진호의 미소는 말이다.
그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현수는 지금 강진호가 하려는 말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방 안의 공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현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