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05
#1104.
대치하다 (4)
“이대로 참으실 겁니까?”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나이트 벨링거(Wellinger)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이건 정도를 넘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대체 뭐란 말입니까? 우린 그저 마스터의 명을 따르는 부하가 아닙니다.”
눈두덩이가 아려온다.
나이트 벨링거가 자신의 눈 주위를 꾹꾹 눌렀다.
“무슨 말씀들이신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스터는 현재 폭정을 펼치고 있었다.
그래, 우습게도 말이다.
‘그 마스터가…….’
벨링거는 마스터를 존중한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존경한다고 하는 게 맞다.
마스터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힘이 있음에도 휘두르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음에도 손을 뻗지 않는다. 자신의 국가에 이득을 줄 수 있음에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손해를 감수했고, 이익을 논하기 이전에 균형을 논하는 자였다.
그러니 존경할 수 있는 자다.
하지만 지금의 마스터는 그렇지 않았다.
“손발이 잘리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몇 달 내에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집니다. 그저 마스터가 짖으라면 짖고, 기라면 기는 개가 되어버립니다.”
“표현을 조금 주의해 주시오.”
“……죄송합니다, 나이트.”
나이트 벨링거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한국의 총회가 원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그날을 기점으로 마스터는 변했다.
과거 조화와 균형, 그리고 평등을 무엇보다 중히 여기던 마스터는 말이 통하지 않는 절대의 권력자로 스스로를 변모시켰다.
납득이 가지 않는 변화. 사람이 바뀐 건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다.
나이트 벨링거가 눈가를 주무르며 몸을 의자에 기댔다.
원인을 찾는 것?
의미가 없다.
나이트 벨링거는 알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성군이 폭군으로 변한 일은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그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그 이유의 근본 원인은 하나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거지.’
인간은 누구나 가슴속에 폭군을 품고 산다. 그 폭군을 얼마나 내리누르냐가 그 사람의 인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마스터는 그저 어떠한 계기로 그 폭군을 더는 누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적어도 나이트 벨링거가 알기로는 폭군으로 타락한 군주가 다시 성군이 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 권력의 맛을 보고, 자신의 힘을 느껴 버린 군주는 절대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럼 남는 것은 둘 중 하나.
“폭군으로 죽든가. 폭군으로 실각하든가.”
“……예?”
“아니, 아니요.”
나이트 벨링거가 손을 내저었다.
의미가 없겠지, 이런 말.
저쪽은 이미 주사위를 던졌다. 그럼 이제는 이쪽에서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일주일입니다.”
나이트 벨링거가 고개를 들었다.
나이트 크라머르(Kramer)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손발이 다 잘려 나가고 있습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큰 것까지. 이제는 각 국가의 병력을 운용하는 데도 마스터의 재가를 받아야 할 지경에 왔습니다.”
“음…….”
“나이트 벨링거, 우리는 연합입니다. 마스터라는 황제를 모시는 제후가 아닙니다. 이건 월권이고, 또한 겁박입니다. 제자리에 묶여 말라 죽으라는 소리가 아닙니까?”
“후우.”
참으려고 했건만, 결국 입술을 뚫고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동안은 그래도 참을 만했습니다. 하지만 지난주부터 갑자기 말이 안 되는 명령들이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사태를 알아보려고 움직이는 동안 상황은 몇 배나 더 악화됐습니다. 먼저 터진 일에 대응하는 동안 더 큰 게 터집니다.”
나이트 크라머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이건…….”
“발언을 주의하시오, 나이트 크라머르.”
“나이트 벨링거!”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나이트 크라머르가 입을 꾹 닫았다.
여기에서 벨링거와 대립각을 세우는 건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화가 풀리지 않는다는 듯 거친 숨이 토해져 나온다.
그 모습을 보며 나이트 벨링거도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마스터.’
이건 도발이다.
아니, 선전포고일지도 모른다.
마스터의 명령들은 누가 봐도 과하다. 그동안 나이트들이 누리던 권리를 모조리 없애고, 그 권리를 마스터에게 집중시킨다.
조금 전, 크라머르가 말한 것처럼 이대로 간다면 그들은 마스터의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루이 14세인가.’
절대왕정.
웃기는 일이다.
21세기에 절대권력이라니.
인간의 사회는 한 사람이 가지는 권력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그런데 이 시대에 왕정시대로 돌아가자는 걸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나이트 벨링거, 우물쭈물하다가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알고 있소.”
“그런데 왜 계속 참으시는 겁니까?”
나이트 벨링거가 눈을 찌푸렸다.
“이보시오, 나이트 크라이머.”
“예.”
“우리가 아는 것을 마스터가 모를 것 같소?”
“그건…….”
“알지, 안단 말이오. 이대로 내리누르기만 하면 언젠가는 터진다는 걸 그분이 모르실 리가 없단 말이외다. 아시지 않습니까, 마스터가 얼마나 현명한 분인지.”
나이트 크라머르가 입을 닫았다.
원탁에 소속된 이들치고 마스터를 인정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그는 수십 년간 잡음 없이 원탁을 유지해 왔다. 원탁이 수많은 나라의 연합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건 굉장한 일이다.
그런 마스터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나 그 마스터가 나이로 인해 총기를 잃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스터 역시 반발을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알고도 행한다는 것은 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오. 그런데 우리는 그 대비가 무언지 전혀 모르지 않소이까. 어설프게 저항하려 했다가는 더 큰 것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이렇게 말라 죽자는 소립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만.”
나이트 벨링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스터.’
대체 마스터는 무엇을 하려 드는 것인가.
생각만 해도 속이 답답해져 온다.
“하나 이해가 안 가는 게…… 왜 최근 들어 갑자기 더 과격해지신 건지 혹시 짐작 가시는 일이 있습니까?”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나이트 크라이머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마스터의 집무실 주변에서 나이트 위긴스를 목격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긴스?”
크라이머가 눈을 찌푸렸다.
“그가 왜 원탁에 들어와 있단 말입니까. 이제는 나이트도 아닌 자가.”
“……총회의 사절이라는 명목으로 들어온다면 막을 수 없습니다.”
“으음…….”
나이트 벨링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폭군 옆에는 반드시 간신이 있기 마련이다.
‘위긴스, 거기까지 타락했는가?’
과거의 위긴스는 나이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젊은 나이에 나이트가 되어 훗날 마스터가 될 이. 영국이 마스터를 2대에 걸쳐 독점한다는 우려가 있었음에도 딱히 반발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위긴스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났고, 그의 인간됨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위긴스는 타락했다. 그 마스터와 함께 말이다.
“게다가 웬 동양인이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동양인?”
“예. 그도 총회에서 온 것 같더군요. 마스터의 집무실 옆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고 일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일?”
나이트 벨링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예……. 그 일이라는 게 총회와 관련된 사항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벨링거가 결코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말을 내뱉고 말았다.
“원탁을 좌지우지하기 위해서 전문가를 불렀다는 겁니까?”
“예상은 그렇습니다.”
“……마스터.”
나이트 벨링거가 얼굴을 감쌌다.
마스터가 원탁을 손에 움켜쥐고 제멋대로 흔들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고 해도 실행의 단계에서는 주춤할 수밖에 없다. 원탁은 완벽한 민주주의를 이루고 있고, 어찌해야 그 체계를 마스터에게 집중시킬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총회는 다르다.
총회는 회주에게 집중되는 체제를 가지고 있다. 마스터가 원탁을 그런 체제로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면, 실제 그 체제를 운용하고 있는 총회에게 조언을 구하는 쪽이 빠르다.
그런데 그 수준이 아니라 직접 사람을 불러들인다?
“나이트들을 불러주시오.”
“결심하신 겁니까?”
“일단은…….”
벨링거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좌시할 수는 없다. 이대로 반년만 더 지나 버린다면 마스터는 원탁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공포정치를 펼칠 것이다. 아니, 반년까지 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전에 막아야 한다.
“우리의 손을 잡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됩니까?”
“대부분은 공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새로 나이트의 자리에 오른 프랑스와 영국의 나이트들은 대화조차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인 게 나이트 베슬리가 두문불출하는 중입니다.”
벨링거가 주먹을 쥐었다 핀다.
‘나이트 베슬리가?’
영국과 프랑스는 이해할 수 있다.
영국은 마스터의 나라, 그리고 위긴스의 나라다. 위긴스에게 적대적이었던 나이트 채드윅이 전투 중에 사망해 버렸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더는 마스터나 위긴스에게 적대하는 세력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손발이 모두 잘려 나갔다. 설사 마스터에게 대적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움직이기는 힘들 것이다.
문제는…….
“나이트 베슬리가 두문불출한다는 말입니까?”
“예. 그 와중에 마스터와는 연락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친마스터파로 돌아섰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날 살아남은 나이트들도 나이트 베슬리를 중심으로 뭉친 채 일체의 대외 활동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으음…….”
그날 그곳에 있던 나이트들은 나이트 르보를 중심으로 마스터에게 반역을 한 이들이다. 반역자를 중히 쓴다는 건 소설에나 나오는 소리. 그들은 더 이상 중용받을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런데 마스터의 편을 든다?
‘대체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엘더 나이트들이 패배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리고 저 총회의 회주인 강진호가 얼마나 악마 같은 놈인지도 질릴 정도로 들었다.
하지만 저 굳건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나이트들이 힘에 굴복하여 자존심마저 버린다?
이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
나이트 벨링거가 이를 악물었다.
“우리 쪽에 찬성하는 나이트들의 중지를 모아주십시오. 그리고 찬성하지 않는 나이트들이라도 회의를 소집하는 걸 반대하지는 않겠지. 그들의 의견도 모아주시오. 전체 회의를 소집하고, 마스터에게 직접 따져야겠소.”
“현명하신 결단입니다.”
나이트 벨링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뭘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냄비 안의 개구리가 될 생각은 없다. 물이 끓어 살이 익어버리기 전에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우선은 마스터의 의중부터.
“원탁은 원탁에 속한 자들의 것이다.”
저 가증스런 총회의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