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11
#1110.
짓누르다 (5)
“이런, 이런. 진정 좀 하게.”
명백한 적의가 느껴졌지만, 마스터는 흥분하지 않았다. 그가 흥분할 이유가 없다. 칼자루를 잡은 건 마스터 자신이니까 말이다.
그가 쥔 칼은 더없이 날카롭고, 더없이 위험한 마검이다. 잘못 휘둘렀을 경우에는 그의 목마저 베어버리는 마검.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마검의 날이 저들을 향해 있다. 그러니 두려울 게 없다.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은가.”
마스터는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나이트 벨링거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터.”
“말씀하시게나, 나이트 벨링거.”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흐음?”
나이트 벨링거가 가만히 마스터와 시선을 마주쳤다.
“저는 마스터를 존경했습니다. 마스터께서 원탁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신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나이트로서 자신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지.”
그건 마스터도 인정하는 바였다.
나이트 벨링거는 마스터에게도 힘이 되는 나이트 중 하나였다. 그는 명예를 알았고, 책임을 알았다. 이권에 휘둘리지 않았으며, 언제나 균형을 중시했다.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할 수 있던 나이트 르보가 아니었다면, 원탁의 중지를 모으는 역할은 나이트 벨링거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그런데 왜 이러시는 겁니까?”
“…….”
나이트 벨링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폭력을 쓰는 자는 언제나 폭력에 휘둘릴 수 있다. 그렇기에 원탁에서만큼은 서로 가진 힘에도, 국력의 차이에도 휘둘리지 않고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해야 한다. 힘으로 무언가를 풀기 전에 대화로서 먼저 해결을 해야 한다. 그게 마스터의 지론이 아니셨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왜!”
나이트 벨링거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높아졌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희는 나이트입니다. 마스터께서 무언가를 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상의하고 가장 먼저 의논해야 할 이들은 저들이 아니라 우리 나이트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의논 한 번! 대화 한 번도 없이 저희를 억압하려 드십니까!”
폭력적이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울분과 분노, 그리고 격정.
나이트 벨링거의 목소리에는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원탁에 들어서기까지 냉정하기 짝이 없던 그의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나이트 벨링거는 순수한 분노를 마스터에게 뿜어내고 있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마스터!”
하지만 마스터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북극의 빙하처럼 싸늘한 눈으로 분노를 받아낸 마스터가 나이트 벨링거와 대조적인,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나이트 벨링거.”
“예, 마스터.”
“자네도 이제 현실을 좀 깨달을 때가 되었네.”
“……예?”
마스터가 차가운 눈으로 나이트 벨링거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대들과 상의하면, 그대들은 내게 병권을 내놓겠는가?”
“…….”
나이트 벨링거가 입을 다물었다.
해야 할 대답은 알고 있다.
그렇다.
적절한 이유가 있고, 그 방법이 최선이라 생각된다면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다. 나이트들이 바라는 것은 원탁의 발전이지, 결코 각국의 이권이 아니다.
그래, 답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이트 벨링거는 그 대답을 차마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었다.
그게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놓을 수 없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병권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어떤 나이트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보게, 대화란 건 무엇인가?”
“대화는…….”
“서로의 의견을 조율해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을 때, 대화가 의미 있는 것일세. 그런데 우리에게 다른 방향이 있을까?”
“…….”
마스터가 빙그레 웃는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네. 하지만 나는 그저 시간을 조금 단축하고 싶었을 뿐이라네. 지루한 대화와 진척 없는 회의, 그리고 결코 양보하지 못할 이견. 그 긴 시간을 거쳐 우리는 이곳에 도달했겠지. 그렇지 않은가?”
“저는…….”
“대화를 했다고 치세나. 그래도 다를 것은 없으니까.”
“애초에!”
나이트 벨링거가 목소리가 다시 격해졌다.
“마스터께서 억지를 부리고 계신 것 아닙니까! 기사단을 움직일 권한이 마스터에게 돌아간다면, 나이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손발을 잘라낸다면, 나이트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할 일이 없다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마스터가 가만히 웃으며 나이트 벨링거를 바라보았다. 나이트 벨링거는 그 눈빛을 참아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니지. 할 일은 너무나도 많네. 나이트가 하는 일은 기사단을 이끌고 나가서 싸우는 것만이 아니니까. 그리고 내게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말이 앞으로 자네들이 기사단을 이끌지 못한다는 말도 아닐세. 그렇지 않은가?”
나이트 벨링거는 말없이 마스터를 노려보았다.
“결국은 그거지. 먼저 허가를 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 간단한 절차 하나일세. 이 많은 이들이 이곳에 몰려온 이유는 말이야, 그 별것 아닌 절차 하나를 지키고 싶지 않다는 거지.”
“그래서 비난하고 싶으십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닐세. 내가 자네의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굴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네와 나는 입장이 다르네. 자네는 손에 쥔 것을 놓을 수 없지. 그건 온전히 자네의 힘으로 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 인심 쓰듯 던져 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말일세.”
마스터의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나는 그걸 가져야겠네.”
“마스터.”
“노욕이라 불러도 좋고, 노망이 났다고 욕을 해도 좋네. 하지만 내 결정은 바뀌지 않아. 나는 가져야겠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마스터가 웃어버렸다.
“당연히 중요하지 않지.”
“…….”
“이보게, 이제는 그만 서로 솔직해질 때가 되지 않았나. 내가 정당하고 좋은 이유가 있다면 자네들이 내게 기사단을 넘겨주겠나?”
나이트 벨링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이유가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무슨 이유를 대든 자네들의 선택은 달라질 게 없는데. 나도 예전이었다면 어떻게든 자네들을 설득하려 했을 거야. 그게 옳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닐세.”
“…….”
마스터가 선언하듯 말했다.
“때로는 ‘옳음’을 따라가는 것이 최악의 결과를 낳기도 하지. 결과만이 모든 것일 수는 없지만, 과정만을 추구할 수도 없네. 그러니 물러서게.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설득도 나를 물러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나이트 벨링거가 가만히 마스터와 눈을 마주쳤다.
싸늘한 눈빛.
하지만 그 안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느껴진다.
그 순간, 나이트 벨링거는 깨달았다.
마스터의 말대로 그와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나이트 벨링거가, 그리고 다른 나이트들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마스터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마스터.”
그러니 나이트 벨링거도 결정해야 한다.
“대화로 풀지 못한 일이 어찌 흘러가는지 마스터도 아시겠지요?”
“물론이네, 나이트 벨링거.”
마스터가 빙그레 웃었다.
“어찌 보면 모순이었지. 그 누구보다 힘을 숭상하는 이들이 힘이 아닌 대화만으로 자신들의 일을 결정한다는 게 말이야. 그 모순은 내 안에서 쌓이고 또 쌓여왔네. 그리고 마침내 터져 버린 거지.”
“인간은 짐승이 아닙니다. 짐승이 아니기에 대화할 수 있는 겁니다.”
“또 틀렸네. 짐승도 대화를 하네. 그리고 인간만큼 서로를 힘으로 억누르고 죽이는 동물은 없지.”
“그래서…….”
나이트 벨링거가 고개들 들었다.
“서로 죽고 죽이자는 겁니까?”
“이보게, 나이트 벨링거.”
마스터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게 두려웠다면 내가 여기까지 왔을 것 같나? 자네들에게 나를 이해하라고는 하지 않겠네.”
이현수의 말대로였다.
이해는 필요하지 않다. 상대를 이해하는 순간, 상대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는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나이트 벨링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알던 마스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군요. 저는 이 순간부터 마스터를 인정…….”
그때였다.
“앉아.”
낮은 목소리가 나이트 벨링거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담긴 말의 의미를 미처 해석하기도 전에 나이트 벨링거는 자리에 도로 앉아 있었다.
“…….”
나이트 벨링거가 눈을 부릅뜨고 말을 한 이를 바라봤다.
강진호.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댄 강진호가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답잖군.”
강진호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빼낸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강진호가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였다.
“후우.”
천천히 연기를 뿜어낸 강진호가 나이트들을 바라보았다.
“이야기야 나중에 천천히 나누지. 그럴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닐 테니까. 여기서 결정하고 가야 할 건 그런 게 아니겠지.”
나이트 벨링거가 멍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이자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선택해야 할 건 하나뿐이지. 따를 것인가, 따르지 않을 것인가.”
“…….”
뭘 들은 건가?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지금까지의 대화를 들었다면 그가,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나이트들이 무슨 선택을 했는지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 것을 보면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는데.
“선택해라.”
그런 나이트 벨링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진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따를 것인지, 아닌지.”
아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게 아니다.
강진호의 의도를 이해한 나이트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렵다.
그래, 강진호는 두렵다. 그저 동양에 있는 소국의 무인이라 무시하기에는 그가 이룬 것이 너무도 많고, 지금 그들에게 뿜어지는 압박감이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원탁에 앉아 나이트들을 협박할 수는 없다! 결코!
“보자 보자 하니 해도 너무하는군!”
나이트 벨링거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가 몰려 붉어진 얼굴.
상기되어 오르락내리락 하는 어깨.
두려움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한 모습이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 가득한 얼굴이 그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나이트 얀코바가 기세를 내뿜으며 소리쳤다.
“따르지 않겠다면 어쩌겠다는 건가! 원탁의 소속도 아닌 이가 감히 원탁에서…….”
나이트 얀코바의 말이 끊겼다.
나이트 벨링거는 그가 너무 흥분해서 말을 가다듬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이트 얀코바의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의문을 품고 고개를 돌린 나이트 벨링거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붉은 선.
조금 멍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이트 얀코바의 목에 선명한 붉은 선이 생겨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만큼 가늘던 선이 점점 더 굵어진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그라고는…….
쩌억.
말라붙은 무언가를 떼어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나이트 얀코바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툭.
모두가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마치 나이트 얀코바를 제외한 모두의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다.
털썩.
마침내 나이트 얀코바의 육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새하얀 대리석 바닥을 선명한 핏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게…….’
굳어버린 머리.
경악이라기보다는 당황이다.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낮은 목소리가 그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다음.”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심드렁한 얼굴로 담배를 물고 있는 강진호가 있었다.
그제야 모두는 깨달았다.
애초에 저자가 이곳에 나타난 순간부터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는 걸 말이다.
악마와의 거래는 언제나 그런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