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15
#1114.
겁박하다 (4)
“끄으응.”
이현수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자, 이 정도면 오늘 일은 다 끝났고…….’
그의 눈이 정리된 서류를 훑었다.
‘확실히 이거, 도움이 되네.’
위긴스가 왜 그를 이곳으로 보냈는지 알겠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확실히 원탁의 체계를 경험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나중에 총회를 돌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흐음.”
이현수가 전화를 꺼냈다.
[여보세요.]“어때, 그쪽은?”
[어떻긴 어때요. 죽어나죠.]이현수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이현주였다.
[회주님이 계실 때야 문제가 없었는데, 회주님까지 자리를 비우니까 일이 크게 터지기 시작하네요.]“조금만 버텨. 곧 연수 갔던 애들이 돌아올 테니까.”
[그거 아니었으면 벌써 사표 쓰고 도망갔을 거예요. 일단 한 삼사 일은 문제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걱정은 무슨. 알아서 잘해줄 사람이 있는데.”
건너편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야 그렇다 치고, 그쪽은 어때요? 배울 만해요?]“적용하고 싶은 게 엄청 많다. 돌아가면 할 일이 많을 것 같아.”
지금도 퇴근하고 틈틈이 시스템을 손 보고 있지만, 아직은 크게 일을 벌이지 못했다. 연수생들이 돌아오는 시점에 맞춰서 총회의 시스템을 크게 한 번 뒤집어야 한다.
‘매번 이런 식이네.’
하기야 다들 그렇지 않겠는가.
이렇게 바꾸고, 바꾸고, 또 바꾸다 보면, 발전하고 또 발전하는 것이다. 때로는 방향을 잘못 잡아서 퇴보하는 경우도 생기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아가게 된다.
물론 그 변화의 와중에 이현수는 갈려 나가겠지만.
[힘내세요.]“아, 그래.”
[그리고 거기 금발 미녀 많다는데, 어설픈 짓 하다 걸리면 모가지 뽑는다.]“…….”
[끊어요. 바쁘니까.]“네.”
전화를 끊고 이현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밖에도 못 나가는 판인데, 뭔 놈의 금발 미녀.’
아, 물론 있긴 하다.
마스터의 비서가 꽤나 그…….
‘아니, 아니지. 생각하지 말자.’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각오는 하고 있지만, 이현주에게 목이 뽑혀 죽는 건 사양이다.
‘농담으로 안 들린다니까.’
피식 웃은 이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음.”
할 일이 많다.
마스터가 맡긴 일이야 다 끝냈지만, 그것만 할 거라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다. 업무를 빨리 끝냈다고 놀아버리면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남는 시간에는 원탁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얻어낼 것이 있으면 얻어내야 한다. 다 빨아버린 아이스크림의 막대를 핥듯이 이현수는 원탁을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결국은 동맹이란 말이지.’
동맹이란 힘을 합친다는 것. 한 식구가 될 수는 있지만, 가족이 될 수는 없는 사이다. 결국 언제든 틀어질 수 있는 게 동맹이다.
애초에 총회는 지금 홍왕계와도 동맹을 맺고 있다. 하지만 동맹을 맺었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책사는 모든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이현수의 머리에는 마스터가 그들을 배신하고 적대하는 상황까지 그려져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최적의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탁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지금 최대한 많은 것을 봐둬야 한다.
‘천문학적이네, 정말.’
보면 볼수록 놀랍다.
원탁이 가지고 있는 재력은 총회를 아득하게 능가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총회는 역사가 오십 년도 되지 않는 신흥 문파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관여한 지는 채 삼십 년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만으로도 웬만한 대기업급의 부를 끌어모으지 않았던가.
반면, 원탁은 그 역사가 천 년을 가볍게 넘는다.
“국가와의 연계가 중요하군.”
원탁은 여러 개의 사업체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 사업체들은 대외적으로 다른 이들의 소유로 알려져 있다. 국가와 EU가 배려를 해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총회가 그런 것처럼 원탁 역시 외부 세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바깥세상과 무인계를 철저하게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현수가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미 다른 곳들에서는 그 경계가 모호해져 있던 것이다.
‘이현주가 잘해줬어.’
그녀가 총회의 법인화를 주장하지 않았다면, 총회는 아직까지도 예전 그대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뭔가를 해보겠다고 허둥대지 않았을까?
믿을 만한 동료가 있다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마스터의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긴 백금발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차차, 웃으면 안 되지.’
목이 뽑힐지도 모르니까.
“마스터께서 찾으십니다.”
“훈련이 벌써 끝나신 겁니까?”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지금 모셔오라는 지시만 받았습니다.”
“예. 잠시만.”
컴퓨터를 정리한 이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비서가 빙긋 웃고 앞장을 섰다.
‘하, 거참…….’
자꾸 이런 기분을 느끼면 안 되는데.
이현수가 자꾸 나오는 아빠 미소를 억지로 내리눌렀다.
아름다운 미인이 함께 있어서 즐겁냐고?
그런 게 아니다.
‘원래는 이게 당연한 건데 말이야.’
이현수 정도면 총회에서도 꽤나 중요 인사다. 그리고 총회쯤 되는 거대 단체의 중요 인사라면 그에 걸맞은 대접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까놓고 말해보자.
총회에서 이현수가 가지는 입지는 원탁에서 나이트들이 가지는 입지를 훨씬 능가한다. 하지만 총회에서 이현수가 받는 대접은 원탁에서 나이트들이 받는 대접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니다.
이곳에서는 이현수를 확실히 중요 인사로 대접해 주고 있었다. 딱히 대단한 걸 제공하는 게 아니라도 그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에서 존중과 어려움이 묻어나지 않는가.
아랫사람한테 일로 치이고, 윗사람에게는 성격으로 치이는 이현수다 보니 이런 작은 배려 하나에도 절로 미소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내가 무슨 전용기를 바랐나, 연봉을 수십억 달라 그랬나.’
나이트들은 당연히 제공받는 것들이다. 물론 총회와 원탁의 재력이 같지 않으니 그들이 받는 것을 모두 요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차라도 한 대 뽑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차라도!
기사는 안 딸리더라도 법인 차량 한 대 정도는 좀!
“쯧.”
이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문제가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이현수가 쓴웃음을 머금고는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성함이?”
“미첼입니다.”
“아, 미스?”
“그냥 미첼이라 불러주십시오.”
“그러죠, 미첼.”
이현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미첼과 얼굴을 보고 지낸 지가 꽤나 됐는데, 아직까지 이름도 제대로 몰랐다. 바쁘기도 했지만, 크게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저, 죄송합니다만…… 무인이신가요?”
“모르셨습니까?”
“아, 제 무공 수위가 그리 높지 않아서…….”
“당연히 무인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마스터를 호위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죠.”
“제가 그분을 호위한다는 게 우습기는 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게 이 세계니까요.”
“공감합니다.”
그래서 이현수도 강진호에게 호위를 붙이는 것이다. 강한 자가 반드시 이기는 세계가 아니다. 약자가 강자를 위기에 빠뜨릴 방법 정도는 얼마든지 있다.
주변에 사람을 쌓아놓으면 최소한 그런 위기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
“이 실장님께서 오신 뒤부터 마스터가 편해지셨습니다. 굉장히 유능하신 것 같더군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이현수가 한껏 웃었다.
‘그래, 칭찬 좀 해라, 칭찬 좀.’
한국인들은 칭찬에 인색하다. 칭찬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 병이라도 걸렸는지, 잘해도 잘했다 소리를 듣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쪽 사람들은 감정 표현에 솔직하다. 그러니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상한 건 이 실장님께서 너무 유능하다는 거지요. 그런 분이 원탁으로 오셔서 교육을 받는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분야가 다르니까요.”
“그러신가요?”
“네.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꽤 멀리까지 온 느낌이다.
‘여긴 지하가 뭐 이리 넓어?’
이만한 지하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원탁의 저력이다. 총회가 이만한 공사를 해야 한다면, 몇 년 동안 다른 일은 아예 할 수 없게 될 테니까.
얼마나 넓은지 아직도 혼자서는 원탁을 돌아다니기 힘들다. 지하의 특성상 어디가 어딘지를 잘 모르겠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미첼의 말에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강진호 회주님은 어떤 분이시죠?”
“에…….”
이현수가 머리를 긁는다.
“그거 좀 어려운 질문이네요. ‘어떤 분이다’라고 딱히 정의하기 어려우신 분입니다.”
“이 실장님은 그분을 오래 모시지 않았나요?”
“아니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기껏 1년쯤 됐죠.”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관계가 깊어 보입니다.”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사람이 사람을 신뢰하고 믿는 데 시간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미첼이 활짝 웃었다.
“그러네요. 저도 마스터의 비서가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하지만 조금 다른 생각입니다.”
“예?”
미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시간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뢰라는 건 성향으로도 결정되지만, 사람이 얼마나 자신을 위해 일해왔는가도 중요한 요소가 될 테니까요. 그런 면에서 저는 아직 마스터에게 크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그냥 예의상 하는 말 이상이 될 수 없다.
“말씀하신 대로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요.”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자, 여기입니다.”
“아!”
미첼이 복도 한쪽에 서서 커다란 문을 가리켰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여기는?”
“휴게실입니다. 들어가시죠.”
“아, 네.”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 이현수가 문으로 다가갔다. 전에는 이런 곳으로 부른 적이 없던 것 같은데?
문을 연 이현수가 안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그를 미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억!”
쿵!
그리고 금세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이현수가 고개를 잽싸게 들었다.
“…….”
익숙하다면 익숙하고, 낯설다면 낯선 이의 얼굴이 보인다.
나이트 크라머르.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 미첼?”
“아쉽네요. 말씀하신 대로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마스터의 신뢰를 완전히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여기서 그만둬야 한다는 점이.”
“하하…….”
이현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상황이 엿같이 흐르고 있다.
“자네가 이현수로군.”
“아, 예. 다시 뵙는군요, 나이트 크라머르.”
“그때와는 어투가 다르군. 어때? 조금 더 당당하게 말해보지 않겠나?”
“……그래도 됩니까?”
“안 되겠지.”
“…….”
나이트 크라머르가 빙그레 웃었다.
“자, 이곳은 방음이 철저한 곳이지. 그러니 반항해도 괜찮네. 지금부터 나는 자네를 구속할 생각이니까. 일단은 그 주둥아리부터 비틀어볼까?”
나이트 크라머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현수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