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20
#1119.
대응하다 (4)
시간은 절대적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같은 시간을 적용받는다. 나에게 있어서 1초는 다른 이들의 1초와 다를 게 없다. 바닥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들은 절대적인 시간에 속해 살아간다.
하지만 시간은 상대적이다.
같은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그 시간을 겪는 인간의 감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 벨링거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째깍째깍.
어디선가 초침 소리가 들린다.
초침 소리는 일정하다.
그의 감각대로라면 지금 그의 귀에 들리는 초침 소리는 평소 그가 듣던 소리와 같은 속도다.
한데…….
그런데 왜 이렇게 시간이 느리단 말인가.
나이트 벨링거가 떨리는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셋.
세 구의 시체.
그래, 겨우 세 구의 시체다.
저 시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저 하나의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원탁이 더 이상 강진호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저 시체의 면면을 본다면, 이미 강진호가 나이트 벨링거의 동조자들을 완벽하게 파악했다는 뜻도 될 수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의미가 있겠지.
하지만 지금 나이트 벨링거에게 가장 크게 와닿는 의미는 단 하나였다.
‘네 시간인가.’
겨우?
겨우 네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이 억겁 같은 시간이?
나이트 졸탄이 죽는 데까지 30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30분.
평소라면 길지 않은 시간이다.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이들은 30분이라는 시간을 그리 길지 않게 느낀다.
하지만…….
그 30분 동안 지옥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어떤가.
불과 몇 초간 고통을 겪는 것만으로 혀를 깨물고 심장을 잡아 뽑아버리고 싶을 고통이 30분 동안이나 지속된다면?
그럼에도 의식을 잃을 수 없고, 생생히 그 고통을 전신으로 만끽해야 한다면?
그래도 그 30분이 짧은 시간이겠는가?
아니, 절대로 아니다.
직접 고통을 겪는 게 아니라 그저 지켜볼 뿐이었던 나이트 벨링거에게도 그 30분이라는 시간은 억겁처럼 길었다. 너무도 길고 길어 영혼이 풍화되어 사라질 것처럼 길었다.
이윽고 나이트 졸탄이 죽었을 때, 그들이 느낀 것은 슬픔이 아니라 안도였다.
겨우, 겨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나이트 졸탄이?
아니, 그들 모두가.
육체로 고통을 겪는 이도 지옥을 봤겠지만, 그걸 지켜보는 이들의 정신도 황폐해진다. 핏덩어리가 되어버린 나이트 졸탄의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그가 느꼈을 그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하겠는가.
하지만 그건 해방이 아니었다.
시작은 안도. 하지만 곧 이어진 것은 불안과 초조였다.
강진호는 한 시간마다 한 명씩을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그 말은 30분이 지나면 다시 한 명이 강진호에게 불려 나간다는 소리다.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또 다른 지옥이 찾아왔다.
30분 뒤에는 내가 나이트 졸탄과 같은 꼴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공포.
이토록 간절한 적이 있던가.
살면서 이토록 그 30분이라는 시간이 소중한 적이 있던가.
우스운 일이다.
나이트 졸탄이 죽어갈 때는 그리도 느리던 시간이, 나이트 졸탄이 죽고 나자 쏜살같이 흐르기 시작했다.
같은 30분이다.
하지만 빨리 흐르기를 간절히 바랄 때는 더없이 느리던 시간이, 느리게 가기를 바라는 순간 과격하게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다시…….
그 과정이 벌써 세 번 반복됐다.
나이트 벨링거는 마치 십 년은 늙어버린 듯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불과 네 시간, 겨우 네 시간이다.
그 네 시간 만에 나이트들이 미쳐 가고 있다.
반응은 각양각색.
자신의 목을 너무 긁어 대 붉은 속살이 드러난 이.
쉴 새 없이 뭔가를 중얼대는 이.
그리고 기이한 웃음을 흘리다가 울기를 반복하는 이.
미쳐 간다.
다들.
무학이란 그저 육체를 단련하는 게 아니다. 정신도 단련하는 게 무학이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나이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불과 네 시간 만에 광인처럼 변하고 있다.
공포만 지속되었다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공포와 절망, 안도와 희망.
그리고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저열한 기쁨과 동료가 눈앞에서 죽어가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슬픔과 절망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생에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크기로 다가와 격렬히 그들을 휩쓸었다. 그러고는 직전에 느낀 감정이 무색하도록 또 다른 감정이 다시 같은 강도로 찾아온다.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나는 지금 제정신인가?’
모르지.
이미 미쳐 있는지도.
이 상황에서 냉정함을 찾는다는 게 웃기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그도 이미 정상은 아닐 것이다.
그가 나이트들 중에서는 나름 인망을 얻는 자라고 하나, 그들에 비해 특별할 정도로 뛰어난 건 아니다.
다른 나이트들이 모두 미쳐 가는데, 그라고 해서 멀쩡할 리가 있겠는가.
지금 이곳에서 멀쩡한 이는 단 하나였다.
마스터조차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의 시선이 격렬하게 이곳저곳으로 움직인다. 다른 나이트들에 비한다면 상태가 나쁘지 않지만, 확실히 이상 행동이 보인다.
그리고 위긴스는 더는 지켜보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우습다.
애초에 이 모든 일은 그가 강진호를 원탁에 데려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봐야지!
그 두 눈에 새겨야지!
원탁이 어떤 꼴이 되어가는지! 그 가증스러운 눈으로 봐야지!
나이트 벨링거의 떨리는 눈이 강진호에게로 향했다.
“후우…….”
강진호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이질적이다.
세 눈박이가 사는 세상에 두 눈을 가진 자가 가면, 두 눈을 가진 자가 이상한 취급을 받는 것처럼.
모두가 미쳐 가는 곳에서 태연자약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는 강진호의 모습은 이질적이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나이트 벨링거는 이제야 자신의 실책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진호는 강하다.
나이트 벨링거는 그 강함에 시선을 빼앗겼다. 홀리고 집착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경계해야 했던 것은 강진호의 강함이 아니었다.
이자는 미쳤다.
이현수에 대해서도 비슷한 보고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다르다. 강진호는 이현수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미쳐 있다.
이현수의 이질적임이 인간으로서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라면, 강진호는 애초에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태연하게 저지를 수는 없다.
차라리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독재자들이 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저자는 악마다.
악마가 아니라고 해도 인간은 아니다.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무언가다.
그리고…….
이제 3분.
단 3분이 남았을 뿐이다. 3분이 지나면 또 누군가가 죽는다.
그럴 거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애초에 이 모든 일을 벌인 게 나이트 벨링거 자신이니까?
그러니 그 책임을 지고 그가 지적당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지적을 당한다?
스스로 나서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직접 나서서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어째서?
죽음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죽음까지 가는 과정 동안 겪어야 할 고통이 너무 무섭기 때문에?
그게 아니면 그저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공포스러워서?
아니면 이 삶에 미련이라도 남았나?
‘나는…….’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아가고 싶다.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살고 싶다.
하지만 살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까드득.
손톱이 부러져 나간다.
고개를 내려 손을 보니, 이미 세 개의 손톱이 뽑혀 나가 있다. 손톱이 뽑혀진 곳에서 피가 줄줄 흘러 옷을 적시고 있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미쳐 버렸다.
그 역시.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든 나이트 벨링거의 눈에 시계가 들어온다.
초침은 무정하게 움직인다.
저 초침이 하늘을 가리키는 순간, 또 하나의 목숨이 사라진다. 그것도 인세에서 겪을 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고통과 함께.
시간은 상대적이다.
똑같은 1초.
하지만 그 1초는 결코 평소의 1초와는 다르다.
시간이 정신없는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째깍.
시간이 다시 느려지는 순간이 왔다.
모두가 반사적으로 강진호를 바라본다. 두 눈에 핏발이 서고, 이가 덜덜 떨리며 맞부딪친다.
강진호의 시선은 나이트 벨링거에게 향해 있었다.
가만히 나이트 벨링거를 보며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악마가 웃는다면 저렇게 웃겠지.
조롱하듯 섬뜩하게.
나이트 벨링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한다.
“다음.”
담배를 튕겨낸 강진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리다.
시간이 너무도 늦게 흐른다.
강진호가 일어나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일 정도다.
그럴 수밖에.
죽음이란 언제나 그런 법이니까.
삶에 집착하는 인간을 조롱하듯 천천히 느긋하게 다가온다. 결코 닿지 않을 것처럼,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등 뒤에 서 있는 게 죽음이다.
지금의 강진호처럼 말이다.
강진호가 다시 손을 뻗는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나이트 벨링거를 가리킨다.
저 손가락.
저 손가락에 얼마나 무거운 것이 실려 있는가.
나이트 벨링거는 혼이 빠진 듯한 눈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강진호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나는…….’
무엇을 했던가.
지금 죽는다면 후회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어떻게든 살고 싶다.
어떻…….
그 순간, 강진호의 손끝이 미묘하게 옆으로 움직였다.
“아…….”
바로 옆자리에서 들썩이는 경련이 느껴진다.
강진호의 손끝이 가리킨 이는 나이트 벨링거가 아니다.
나이트 크라머르.
강진호에게 지적당한 나이트 크라머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간다.
그럴 수밖에.
저건 죽음의 선고니까.
아직 살아 있음에도 자신의 죽음을 봐야 하는 인간이 어떤 심정이겠는가.
“이리 와.”
너무도 무감정해서 기계음처럼 들리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이트 크라머르가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나이트 벨링거를 바라본다.
“…….”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아니야.”
나이트 크라머르가 전신을 덜덜 떨며 경련하기 시작했다.
“나, 나는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이 미친 새끼야! 내가 아니야! 내가! 내가아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절규.
나이트 크라머르가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그의 얼굴이 축축하게 젖어든다.
“다 너 때문이야! 다!”
나이트 크라머르가 나이트 벨링거에게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를 막았지만, 나이트 크라머르는 짐승처럼 나이트 벨링거의 팔을 물어뜯었다.
“네가 죽어! 내가 아니라 네가 죽어야지! 왜 나야! 왜! 다 니가 한 일이잖아!”
“크라머르!”
나이트 크라머르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 나이트 벨링거에게 달려들던 기세가 거짓말 같다.
“살려주십시오! 저는 아닙니다! 제가 아닙니다! 다! 다 이자가 한 일입니다. 제발! 제발 전…… 저는!”
원망하고, 소리치고, 미친 듯이 웃어 젖힌 나이트 크라머르가 무릎걸음으로 강진호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잡고 늘어진다.
“죽고 싶지 않아! 나,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으아아아아아아아!”
강진호는 무심한 얼굴로 그런 나이트 크라머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히, 히이이익…….”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 나이트 크라머르가 경련을 일으킨다. 손발이 애초러울 정도로 덜덜 떨렸다.
그리고 그 순간.
“……제가 졌습니다.”
나이트 벨링거가 고개를 늘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