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21
#1120.
대응하다 (5)
숙여진 고개.
시체처럼 늘어진 목에서 힘없는 음성이 새어 나온다.
“이현수를 납치한 건 접니다. 그를…… 그를 놓아주십시오. 제가, 제가 저지른 일입니다.”
산 채로 탈색되는 느낌이다.
나이트 벨링거는 이 순간 자신에게서 뭔가가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패기일 수도 있고, 그의 젊은 날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원탁을 지키려던 그의 의지일지도 모른다.
이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이제 그에게는 그런 것들이 필요 없으니까. 죽은 이에게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후욱, 후욱! 후욱!”
나이트 크라머르가 격렬하게 숨을 내뿜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가 돌아온 기분일 것이다.
“모든 죄는 제가 받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해 주십시오. 제가…… 제가 졌습니다.”
나이트들의 시선이 나이트 벨링거에게 꽂혔다.
각양각색의 시선이.
원망, 분노, 연민, 그리고 서글픔.
어찌 하나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겠는가.
나이트 벨링거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들은 너무도 많은 것을 겪었다. 하지만 그저 나이트 벨링거에게 분노하고 그를 욕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어떤 심정으로 이 일을 저질렀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끝난다.
나이트 벨링거가 쓰러지면서 원탁에는 더 이상 강진호에게 대항할 사람이 남지 않을 것이다. 강진호가 원탁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을 이제 그저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차라리…….
차라리 처음부터 힘을 합쳐 그에게 대항했다면, 결과가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대항할 수 없다.
그들은 강진호에 대한 공포를 학습해 버렸으니까. 이제 이곳에 있던 이들은 감히 강진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할 것이다. 공포란 그런 것이다.
“사, 살려! 살려주십시오! 제가 아닙니다! 제가! 저자입니다! 나이트 벨링거가 시켰습니다! 제가 아니라!”
정신을 차린 나이트 크라머르가 필사적으로 소리치고 절규했다. 강진호의 손이 그의 얼굴을 여전히 움켜잡고 있다. 단두대에 목을 내민 이처럼 나이트 크라머르가 혼이 나간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나이트 벨링거는 책임을 느꼈다.
오히려 말을 해버리고 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살고 싶다는 집착이 사라졌으니까. 인간이 가장 고뇌할 때는 할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할 때다. 이미 선택해 버린 이는 더 이상 고뇌할 게 없다.
나이트 벨링거를 충동질한 게 나이트 크라머르라고 해도, 그 충동을 받고 일을 만든 것은 나이트 벨링거다. 책임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타인에게 책임을 돌릴 것이라면 애초에 시작하지 말아야 했다.
“제 목을 가져가십시오.”
나이트 벨링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놓아주십시오. 그는 그저 제 명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는 이제 다시는 당신에게 대항하지 못할 겁니다. 회주님, 제 한목숨으로 그만 끝내주십시오. 당신이 원한 건 모두 이뤄지지 않았습니까.”
강진호가 가만히 나이트 벨링거를 바라보았다.
모든 미혹을 떨쳐 낸 그의 모습은 여유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강진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아무 말 없이 나이트 벨링거를 바라보던 강진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알아.”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이트 크라머르가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경련했다.
“무슨!”
나이트 벨링거가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이미 끝나지 않았는가!
죄는 그가 받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현수를 납치한 것도 자신이라 고백했다. 그렇다면 자신을 죽이면 될 일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왜!
그저 괴롭히고 싶은 것뿐인가?
그저 죽이고 싶은 것뿐인가?
“나를 죽이라 하지 않았소이까! 나를! 강진호오오오오오오오!”
나이트 벨링거의 고함과 나이트 크라머르의 비명이 한데 섞여들며 홀을 울렸다.
한 손으로 나이트 크라머르를 움켜잡은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머리가 나쁘군.”
“그, 그만…….”
“내가 뭐라 했지?”
“…….”
나이트 벨링거의 눈이 떨렸다.
강진호가 뭐라고 했지? 강진호가?
“이, 이현수를 데려오…….”
“아는군.”
뿌드드득.
나이트 크라머르의 얼굴에서 괴이한 뼛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나이트 크라머르가 덜덜 경련한다. 축 늘어진 그의 몸이 갈라지고 찢어지며 사방으로 피를 뿌린다.
“그런데 뭘 하고 있나?”
“나, 나는…….”
“아무것도 바뀐 건 없다. 나는 범인을 잡아오라고 한 적 없어. 이현수를 데려오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내가 멈춰야 하지?”
이자는 악마다.
악마.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악마다.
“이상한 일이지. 원하는 것을 말해주고 조건까지 말해준다. 그런데 그 현명하다는 이들이 하나같이 이상한 답을 내놓는군. 재미있지 않나?”
아무 말을 할 수가 없다.
“이놈을 살리고 싶나? 그럼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이현수가 빨리 도착한다면,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전신을 피로 물들인 강진호가 더없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 * *
“일어나라.”
“흠?”
“원탁으로 돌아간다. 일어나라.”
“아, 네, 뭐…….”
이현수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잘 풀린 모양이네요.”
“일어나라고 했다!”
“그런데 어쩌죠?”
이현수가 침대에 드러눕는다.
“나는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는데?”
빌헬름의 눈에 핏발이 섰다.
“지금 당장!”
이현수의 멱살을 잡으려 뻗던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
이현수가 빙그레 웃으며 스스로의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제가 무인치고는 좀 한심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자해 정도는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좀 물러나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빌헬름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받은 명령은 이현수를 상처 하나 없이 데리고 오라는 것이다. 만약 이현수가 자해를 한다면, 그는 그 명령을 지킬 수 없게 된다.
아니, 그 이전에…….
어떻게 이런 반응을 하는 거지?
이현수가 그와 나이트 벨링거의 통화를 들은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가.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된다는 걸 예상했나?”
“뭔 소린지 모르겠군요. 저는 지금 그냥 배알이 뒤틀린 것뿐입니다. 제멋대로 납치해오더니, 제멋대로 돌아가라니. 짜증 날 만하지 않습니까?”
이현수가 빙그레 웃는다.
“그러니 어디 한 번 엿먹어보라는 거죠. 잘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으드득.
빌헬름이 이가 부서질 듯 힘을 주었다.
“그래도 예상은 할 수 있죠. 아마 지금쯤 회주님이 원탁을 개박살 내놓는 중이겠죠. 그러게 조사를 하려면 똑바로 했어야지. 그분이 원탁을 내버려 둔 게 힘이 없어서가 아닌데. 개를 키우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인을 물려는 개는 삶아버리는 법이죠.”
“이…….”
빌헬름이 분노를 내리눌렀다.
죽여 버리고 싶다.
당장에라도 저 간악한 놈의 머리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되겠나?”
“흐음.”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한다.
“이쯤 되면 협박할 게 아니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죠. 그런데 부탁하는 상황치고는 대가리가 너무 높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제가 그랬죠, 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개처럼 바닥도 기겠다고. 당신도 그럴 수 있을까?”
빌헬름의 무릎에 힘이 빠진다.
쿵.
바닥에 무릎을 꿇은 빌헬름이 덜덜 떨리는 손을 바닥에 짚고는 머리를 숙였다.
“제발…….”
“에이, 너무 쉽게 하시네. 재미없게.”
이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명령 듣는 사람을 괴롭혀 봤자지. 갑시다.”
“……생각보다 더했네.”
이현수가 원탁의 모습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충 예상은 했다. 저들의 다급한 모습만 봐도 강진호가 뭘 하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눈에 보이는 광경은 이현수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생각보다 죽은 이는 많지 않고, 피바다가 되어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피는 적당히 흐른 편이었다.
하지만…….
‘이걸 피해가 적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죽은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바닥에 쓰러진 이가 모두 죽었다고 해도 겨우 네 명이다. 강진호의 손속을 감안하면, 정말 적게 죽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죽은 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이었다.
나이트.
각국의 가장 우수한 무인으로 채워진 원탁의 핵심.
그들의 상태가 극도로 이상하다.
생기가 빨려 나간 것 같다.
대체 무슨 짓을 해야 불과 하루 남짓한 시간 만에 모두 저런 꼴이 된단 말인가.
심지어 마스터조차 그새 십 년은 늙어버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휘휘 저은 이현수가 강진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 앞에 고개를 숙였다.
“걱정 끼쳐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그러지.”
말을 마친 이현수가 강진호의 뒤로 가 섰다.
“남은 이들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이현수의 물음에 강진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나이트들이 들어왔다.
“굳이?”
“확실히.”
이현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나이트라는 건 선출되는 이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새로운 나이트가 생겨날 뿐이다. 물론 급작스레 새로 채워 넣어야 하니 인재의 질은 떨어지겠지만, 그렇다고 나이트의 역할을 소화 못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럼 차라리 이들을 유지하는 게 낫다.
이들은 이제 절대로 강진호에게 대항하지 못할 테니까.
‘예상처럼 흐르지는 않았지만, 생각 이상의 성과군.’
이현수가 그린 어떤 시나리오도 이런 파격적인 결말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전화위복이라면 전화위복이겠지만…….
이현수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강진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어 나이트 벨링거를 향해 다가갔다.
‘……몰랐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내.
다른 이들은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데 홀로 저러고 있어서 눈에 띄기는 했지만, 이현수는 저자가 나이트 벨링거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이전에 본 모습과 너무도 달랐으니까.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와 주름진 얼굴.
그리고 축 처진 어깨.
패기와 생기가 모두 빠져나가 버린 나이트 벨링거의 모습은 과거의 그를 전혀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변해 버렸다.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겪어야 사람이 하루아침에 저리 변할 수 있는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저벅저벅.
강진호가 나이트 벨링거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나이트 벨링거의 고개가 천천히 들려진다. 생기가 모두 빠져나가 흐리멍덩해진 눈이 강진호를 응시한다.
강진호가 그런 나이트 벨링거를 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나름 재미있었어.”
나이트 벨링거의 어깨를 두드려 준 강진호가 몸을 돌렸다.
“가자.”
“예.”
이현수가 두말없이 강진호를 따라나섰다.
강진호를 따라 홀을 벗어나던 이현수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바래 버린 듯한 원탁의 모습이 들어온다. 축 늘어진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나이트들과 단숨에 늙어버린 마스터.
그리고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의 몰골이 아닌 나이트 벨링거까지.
‘끝났군.’
설사 원탁이 그 명맥을 이어간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과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고개를 되돌린 이현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