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22
#1121.
전달하다 (1)
‘멍청한 놈.’
나이트 베슬리는 굳은 얼굴로 복도를 걸었다. 원탁을 지킨 대부분의 나이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지만, 나이트 베슬리 일파는 개중에서는 가장 평온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이트 베슬리가 그들보다 굳건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아니. 그런 건 아니다.
그가 그나마 인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강진호의 칼날이 단 한 번도 그를 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에게 나이트 벨링거와 같은 수준의 압박이 가해졌다면, 지금쯤 나이트 베슬리는 자신이 누군지조차 잊은 광인이 됐을 것이다.
그러니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이트 벨링거를 힐난할 수 없다. 그가 한심하게 느끼는 부분은 빤한 결말이 보이는 일에 승부를 건 나이트 벨링거의 판단력이었다.
왜 모른단 말인가.
인간은 역지사지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이트들은 우쭐함에 빠져 있다.
자신들이 강한다는 사실을 과신한다. 게다가 그 과신은 단순한 무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해할 만한 일이기는 하다.
만약 나이트 르보나 나이트 위긴스, 그리고 나이트 벨링거 같은 이들이 무학을 익히지 않고 평범한 사회를 살아갔다면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았을까?
천만에.
어느 분야에서든 그들은 두각을 드러냈을 것이다. 스포츠를 했다면 전설적인 스포츠 스타가 되었을 것이고, 학문을 연구했다면 노벨상에 근접한 연구 성과를 냈겠지.
그리고 기업을 운영했다 하더라도 세계를 뒤흔드는 기업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왜?
나이트란 자리는 단순히 무학이 강하다고 해서 얻어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
무인들은 때때로 착각한다.
무학은 몸을 쓰는 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기초적인 단계에서라면 몰라도, 상승에 오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육체적 적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과 세상에 대한 이해력, 그리고 철학적이기까지 한 고뇌를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무학의 강함이라는 건 인간의 강함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이트들은 자신에게는 그 사실을 적용하여 스스로는 높이고, 자신보다 강한 강진호는 무학만 강한 멍청이쯤이라 생각했다.
진짜 멍청한 게 누군지도 모르고 말이다.
나이트 베슬리가 실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강진호의 ‘강함’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강진호라는 존재를 자신보다 위에 놓고 휘두를 수 없다고 인정했다면, 지금쯤 그의 처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안 되니 무인이겠지.’
나이트 베슬리가 침음을 흘렸다.
직접 검을 맞대보지 못한 상대를 자신보다 위라고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
무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나이트 베슬리와 나이트 벨링거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강진호와 직접 검을 맞대보았는가’라는 아주 간단한 부분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나이트 베슬리가 강진호와 직접 상대해 보지 않았다면, 이번 일을 벌인 것은 나이트 벨링거가 아니라 나이트 베슬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이트 베슬리가 깊이 심호흡을 하고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커다란 문을 바라보았다. 이내 헛기침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나이트 베슬리입니다.”
“들어오시오, 나이트 베슬리.”
마스터의 허가가 떨어졌다. 하지만 나이트 베슬리는 이 허가를 내린 것이 마스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 나이트 베슬리가 긴장한 얼굴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스터의 집무실.
그곳에는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상석에 앉은 이는 마스터가 아닌 강진호, 그 좌우로 마스터와 위긴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
나이트 베슬리의 긴장한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의 시선이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현수에게로 향했다.
‘저자는 왜 저러고 있지?’
납치를 당해 목숨을 위협받았음에도 태연함을 잃지 않은 그의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 이현수는 얼굴에 불만이란 불만은 모조리 다 담은 채 궁시렁대고 있다.
“……저분은 왜?”
마스터가 겸연쩍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요즘은 다섯 살짜리 애들도 사탕 준다고 해서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는 않는다는군.”
“…….”
매우 적절하지만, 매우 이상한 이유였다.
“아니, 낯선 사람이 아니었잖습니까! 비서였다구요!”
위긴스가 피식 웃었다.
“그 비서를 낯설게 여기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지. 최소한의 경계도 하지 않은 건 확실히 네 잘못이 맞다.”
“아니! 며칠을 같이 지냈는데 의심합니까! 그 정도면 당연히 친하다고 여겨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 말, 이 부장에게 해줘도 되는 건가?”
“제가 실수한 게 분명합니다! 손도 들까요?”
“…….”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이현수가 자체적으로 손을 들어 올린다. 그 광경을 보며 위긴스가 혀를 찼다.
“그러고 싶냐?”
“……뭐가요?”
“그래도 사내자식인데, 여자에게 그렇게 약해서 어디 써먹겠냐?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인들도 여자에게 그렇게 약하지는 않다.”
“신사의 나라는 얼어 죽을. 훌리건의 나라겠죠. 저녁만 되면 마누라고 여자 친구고 다 내다 버리고 펍에 모여 축구 보면서 맥주 빨기 바쁘신 분들이 신사는 뭔 놈의 신사입니까? 이탈리아인들이 들으면 웃다가 죽겠네요.”
“…….”
할 말이 없어진 위긴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제가 대가 약한 게 아니라, 걔가 대가 센 겁니다! 이중걸 손녀를 제가 무슨 수로 감당합니까! 맞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애초에 주먹 대 주먹으로 붙어도 내가 못 이기는데, 깝치다가 맞기라도 하면 사부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강진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지.”
뭔가 이상한 부분에서 공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크흐흠.”
다른 이들 앞에서 더는 총회의 수치스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위긴스가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사람을 불렀으니, 해야 할 이야기부터 하세.”
“……그럼 들어오기 전에 일으켜라도 주든가.”
인마, 그건 내 권한이 아니잖아!
위긴스가 슬쩍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강진호가 미간을 좁히고는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이리 와.”
나이트 베슬리의 얼굴이 살짝 썩었다.
저 ‘이리 와’라는 말은 오늘 꽤나 많이 들은 말이건만, 아까 전에 들은 것과는 느낌이 너무 달랐다.
“옙!”
그리고 듣는 이의 반응도 달랐다.
이현수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강진호의 앞으로 달려갔다.
“앞으로는 주의해.”
“명심하겠습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이현수에게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현수가 경계만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른 이들이 이현수를 신경 써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무인인 이상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
이현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딱히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이현수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 앉자 그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나이트 베슬리 이상으로 초췌해 보였다.
“이쪽으로 앉게.”
“예, 마스터.”
나이트 베슬리가 자리에 앉자 마스터가 손뼉을 쳤다. 문을 열고 들어온 새 비서에게 마실 것을 주문한 마스터가 이내 가라앉은 눈으로 나이트 베슬리를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을 거라 생각하네.”
“…….”
차마 ‘아닙니다’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놀라기는 엄청 놀랐으니까.
그런 일을 겪고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강심장인 게 아니라 어디 한 군데가 잘못된 사람이다.
“나이트들의 상황은 어떤가?”
나이트 베슬리가 미묘한 얼굴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마스터로서 나이트에게 하는 질문으로는 잘못된 게 없다. 하지만 원탁을 장악하고 독재하려 드는 마스터가 아직 포섭한 게 확실하지 않은 나이트에게 하는 질문으로는 조금 앞서 나갔다.
최소한 나이트 베슬리에게 함께하자는 권유 정도는 먼저 하는 게 옳다.
하지만 나이트 베슬리 역시 그 부분을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첫째로 나이트 베슬리 역시 이제 원탁은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전에는 당연하던 예의와 과정은 이제 당연하지 않아질 것이다. 원탁을 지탱해 온 시스템과 절차는 사라지고, 효율과 속도, 이득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런 방향에서 보자면 이건 당연한 변화였다.
둘째로 나이트 베슬리가 그런 것처럼 마스터 역시 많이 지쳐 있었다.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절차와 예의를 논할 정도로 나이트 베슬리는 냉혈한이 아니었다.
“상황이라……. 뭐라 대답을 해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으음.”
“며칠이 지나면 웬만큼은 회복하겠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나이트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교체가 필요합니다.”
“그렇구만.”
마스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아무리 그에게 적대하는 이들이라고는 하나, 나이트는 원탁을 지키는 핵심이다. 그런 이들이 단체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몇몇은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자네와 함께하는 이들은 어떤가?”
나이트 베슬리가 슬쩍 시선을 둘려 강진호는 한 번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회주님께서 신경을 써주신 덕분에 며칠만 정양하면 괜찮을 듯합니다.”
“다행이구만.”
나이트 베슬리는 단 한 번도 마스터나 강진호에게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 하지만 강진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을 보호했고, 마스터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이트 베슬리에게 상황을 묻고 있다.
“나이트 베슬리.”
“예, 마스터.”
“도와주게나.”
“…….”
그러고는 뒤늦게 있어야만 했던 과정을 다시 밟는다.
마스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원탁은 변화하고 있네. 게다가 오늘의 사건으로 인해 더욱 급격하게 변하게 되겠지.”
이건 베슬리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원탁은 이제 더 이상은 과거와 같을 수 없다. 나이트의 변화는 원탁의 변화를 의미하니까. 나이트들이 예전과 같을 수 없는 이상, 원탁도 예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원탁과 마스터는 달리는 호랑이 위에 올라탔다. 이제는 내릴 수 없다.
“이 일은 나 혼자는 감당할 수 없어.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도움이라고는 하셔도…… 제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무슨 그런 말을 하는가.”
“하나…….”
나이트 베슬리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정말 저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도와달라고 하시면 도와야겠지요. 하지만 제가 제 목에 칼을 꽂을 수는 없잖습니까, 마스터.”
“…….”
나이트 베슬리가 마스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마스터께서 하시는 일은 정말 원탁을 위한 것입니까?”
결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이트 베슬리는 결국 묻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는 마스터가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 차례였다.
가만히 나이트 베슬리를 바라보던 마스터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