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26
#1125.
전달하다 (5)
“장로님.”
“일없다.”
“조금만 깎아주시면…….”
“어허!”
장민은 단호했다.
그의 몸에서 마교의 대장로다운 위엄이 줄줄이 뿜어져 나온다. 천하의 위긴스마저 순간적으로 움츠러들 정도였다.
하기야.
마스터가 아무리 위대하고, 위긴스가 아무리 천재라고는 해도 장민 앞에서는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하다. 무력을 떠나 그에게는 긴 세월 동안 마교를 지키고 이끌어온 경륜과 깊이가 있지 않은가.
그 경륜과 깊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으로 장민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한 푼도 못 깎아준다!”
“…….”
에이, 빌어먹을.
위긴스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무인이라는 놈이 신외지물에 연연하다니! 무인이란 하루 쌀 세 홉에 몸 덮을 거적때기 하나면 충분한 것을!”
내가 당신 저녁에 전신에 명품 줄줄이 두르고 놀러 나가는 걸 몇 번이나 봤는데!
뭐? 신외지물?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양심이!
백 년이 넘게 살아온 대요괴는 과연 그 낯짝마저도 두껍기 짝이 없었다.
“아, 아니, 그렇다고 전 재산을…….”
“간절하면 된다, 간절하면.”
“…….”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은데?
“아니, 이거, 사이비…….”
“어허?”
“아니, 그렇잖습니까. 사이비…….”
“어허!”
위긴스가 뚱한 얼굴로 장민을 바라보았다.
‘사이비네.’
‘뭔가를 내려줄 테니 전 재산을 바쳐라’는 사이비 종교에서 주로 써먹는 레퍼토리가 아니던가.
마교의 장로라는 사람이 사이비나 하는 짓을 하다니!
“그 종교에서 재산 갈취를 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갈취?”
장민의 눈이 희번덕댔다.
위긴스가 바로 눈을 깔았다.
“아니요. 갈취가 아니라, 그…….”
“갈취와 기부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느냐?”
“……예?”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지.”
“…….”
“그리고 걱정할 것 없다. 나는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을 테니까.”
“네? 그럼 왜 돈을…….”
장민이 한숨을 쉬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이제 봄가을이 없어지고 여름 겨울이 길지 않느냐. 이제 곧 겨울인데, 타지에 와서 고생하는 애들 옷이나 한 벌 사 주고, 장판이나 하나씩 챙겨 주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지. 사실 내가 돈 나올 구석이 없지 않느냐. 그렇다고 매번 손을 벌릴 수도 없고…….”
위긴스가 살기 띤 눈으로 이현수를 돌아보았다.
“이 실장?”
“……예?”
“지원 똑바로 안 해?”
“…….”
위긴스의 눈이 불을 뿜었다.
“총회에 돈이 넘쳐 나는데, 왜 교에 제대로 지원을 안 해줘서 이런 말이 나오게 만들어! 제대로 신경 안 써?”
아니, 당신이 언제부터 마교도들의 복지까지 신경 썼다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봤으면서!
“장로님!”
애절하다.
저 자세 봐라. 애절하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그래?”
장민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럼 절반.”
“……끄윽.”
“간절하면 내놓을 수 있는 거야, 간절하면.”
간절하다. 정말 간절하다.
하지만 이건 뭔가 사기당하는 느낌이 아닌가.
장민이 낄낄대며 웃었다.
“무학을 얻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대체 어느 문파에서 자신들이 가진 무학을 남에게 베푼단 말인가. 특히나 교는 교도가 아닌 이들에게 무학을 베풀지 않네. 하지만 내가 특별히 친분을 감안하여 싸게 넘기는 걸세. 싸게.”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어떤 문파도 제자가 아닌 자에게 자신들의 무학을 알려주지는 않으니까. 전 세계 모든 문파를 통틀어 가장 개방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총회조차도 타인에게 무학을 전수하다 발각된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아니, 니들 거 아니잖아! 훔쳤다며!’
양의심공이 왜 마교의 무학인가.
무당에서 들었다면 피를 토하며 달려올 일이었다. 아무리 무당이 이제는 유명무실해져 관광지가 되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역사가 있는데!
이게 역사 왜곡이지! 이게!
하고 싶은 말은 무지하게 많지만, 칼자루를 쥔 사람은 장민이었다. 어설프게 지적을 하다가 수틀리면 다 뒤집어엎어 버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 그렇습죠. 그럼요.”
위긴스가 인생에 다시없을 비굴함을 담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런저런 거 다 치우고 깔끔하게 가자, 깔끔하게! 딱 절반만 내놓아라.”
“거참.”
지켜보던 바토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사기꾼이 따로 없구만. 어이, 영감. 체통 좀 지켜, 체통 좀. 손자뻘도 안 되는 사람 붙들고 그러고 싶어?”
“손자와도 금전 관계는 정확해야 하는 법이지.”
말은 항상 맞는 말만 하시네.
장민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러니 한 푼도 못 깎아준다! 내가 세무사를 동원해서 네놈의 재산을 낱낱이 파헤칠 테니, 속여 먹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정확하게…….”
그때였다.
끼이이이이익.
조금 음산해 보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열린 문 뒤로 강진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장민을 바라보았다.
장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 마존이시여, 이, 이건 제가…….”
“잠깐.”
강진호가 미묘한 미소를 띠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잠깐 나 좀 보지.”
“……네.”
장민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강진호를 따라 나섰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도 저보다는 생기가 넘칠 것 같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토르가 혀를 찼다.
“쯧쯧, 그러게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썼어야지.”
조금 늦어버린 충고였다.
말은 잠깐이라고 했지만, 장민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실 만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돌아온 장민은 세상을 다 잃은 얼굴로 위긴스를 바라보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수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위긴스의 대답도 미묘했다.
진작에 그냥 전수해 줬으면 온갖 감사는 다 받았을 텐데, 이제는 딱히 고마운 마음도 들지 않는다.
“농담이었던 건 알고 있겠지?”
“아, 네. 뭐, 그렇겠죠.”
위긴스가 삐딱한 얼굴로 대답했지만, 장민은 헛기침을 두어 번 했을 뿐, 그 태도를 지적하지 못했다.
양심이 있으면 그럴 수 없지.
“저, 그…… 애들 지원에 관한 약속은?”
“그건 지켜 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셨으면 진즉 해드렸을 텐데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이현수에게 말하시는 게 껄끄러우시면, 앞으로는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적절하게 대처하겠습니다.”
“……고맙군.”
장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위긴스에게 구결을 읊어주었다.
한 번 구결을 완전히 통독한 장민이 목을 가다듬었다.
“자, 다시 한 번 읊어주겠네.”
“아닙니다. 다 외웠습니다.”
“엥? 한 번 만에?”
“예.”
장민이 슬쩍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위긴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겠지. 자네도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이 구결을 익히면 되네. 모르는 게 있으면…….”
“자, 잠시만요.”
위긴스가 당황한 얼굴로 장민을 만류했다.
“외우긴 다 외웠는데, 이걸 뭐 어떻게 익혀야 한다는 겁니까?”
“응?”
장민이 이게 뭔 개소리냐는 얼굴로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구결을 다 알려줬잖은가.”
“그, 그렇죠. 이게 구결이라면 다 외운 건 맞습니다.”
“그런데 왜 못 익힌다는 건가?”
“저는 이런 식으로 무학을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하!”
장민의 눈이 인간을 보는 눈에서 벌레를 보는 눈으로 바뀌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위긴스는 억울함에 속이 뒤집어졌다.
‘아니, 이건 내 잘못이 아니지!’
그저 서양과 동양의 차이일 뿐 아닌가.
서양의 무학에서는 이런 식의 글자 몇 개를 바탕으로 무학을 풀어내는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식을 바탕으로 본다면, 이쪽이 더 이상하단 말이다.
“쯧쯧, 뭔 무학을 동네 난전에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기초가 없네, 기초가 없어.”
“…….”
“그렇다고 내가 일일이 가르쳐 주기는 좀 바쁜 것 같고. 적당한…….”
주위를 둘러본던 장민의 눈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사내가 들어왔다. 장민도 그 사내를 보며 함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위긴스.”
“……예, 장로님.”
“내가 친히 가르쳐 주고 싶지만, 무학을 전수하는 거라면 몰라도 무학을 익히는 방식까지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지. 인정하나?”
“그, 그렇습니다.”
따져 보자면 이건 세계를 주름잡는 석학에게 ABC를 가르쳐 달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르치지 못할 건 없지만, 시간과 인력의 크나큰 낭비다.
장민은 그를 가르치는 것 말고도 할 게 많은 사람이다. 우는소리를 하지 않고, 불평불만이 없어서 그렇지, 일만에 달하는 마교도들을 단속하고 챙기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이에게 이런 사소한 것까지 의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수준에 맞는 이를 붙이자니, 자네의 체면 문제가 좀 걸리는군. 아무리 배움에는 고하가 없다지만, 그래도 최소한은 챙겨야지.”
“……그도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장민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적임자가 스스로 한발 나서서 흐뭇하게 웃어 제꼈으니까.
“제가 적임자로군요.”
“…….”
위긴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물론 나선 이의 이름은 이현수였다.
“아, 아니…….”
“인정하십시오, 사부님. 지금 총회에서 사부님께 구결 익히는 법을 가르쳐 줄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으으…….”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맞는 말이었다.
구결을 통해 무학을 익히는 법 따위는 기초 중의 기초다. 아무리 위긴스가 동양 무학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다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간단한 것을 이사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강진호?
당장 강진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바토르가 그의 등짝에 정권을 날릴 게 빤하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들고 배우는 것도 문제다.
자존심이야 별것 아니지만, 일단 총회의 이사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이상 지켜야 할 체면이라는 게 존재한다.
일반적인 회사에서도 이사가 신입 사원 붙들고 ‘컴퓨터를 처음 배우려는데 타자를 어떻게 쳐야 하느냐’ 소리를 하면 회사 이미지가 나락으로 처박히기 마련 아닌가.
그러니 비밀이 엄수 가능하고 적당히 친분이 있는 이를 찾아야 하는데…….
‘왜 너냐!’
왜 하필!
세상에 썩어나는 수많은 무인들을 두고 왜!
“후후후후, 걱정하지 마십시오. 방금 저도 구결은 다 외웠으니까요. 제가 성심성의껏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는 제가 사부님에게 이미 충분히 배우지 않았습니까?”
배워?
내가 이현수를 어떻게 가르쳤더라?
“왜 듣고도 모르냐? 머리는 옵션으로 끼워 넣었냐?”
“차라리 엘레나가 키우는 3개월짜리 개가 너보다 말귀를 더 잘 알아먹겠다.”
“마법은 똑똑한 놈들만 배우는 거다. 너는 글렀다. 저리 가서 칼 쓰는 법이나 배워라. 그 머리로 할 수 있다면 말이다.”
“…….”
위긴스는 보았다.
이현수의 눈에 살기가 어리는 걸.
“제가! 배운! 그대로! 완벽하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부님!”
“…….”
주위를 한 번 둘러본 위긴스가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잘 부탁한다.”
이래서 인생이란 재미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