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28
#1127.
다가오다 (2)
“정리해야 할 건 이게 다인가?”
“그렇습니다.”
피곤에 쩔어 있는 눈.
반쯤 감긴 눈에서 무거움이 느껴진다. 나이트 베슬리는 그 눈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피곤할 만도 하겠지.’
마스터는 지금 굉장한 양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나이트들의 협조(?)를 구하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진짜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들에게 쏠려 있는 업무의 관할을 옮겨온다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수십 개국으로 퍼져 있는 명령 체계를 원탁으로 일원화시켜야 하고, 지금까지 그들이 해오던 일들을 파악해야 한다.
웬만한 기업이라면 그 업무의 방대함에 혀를 내두르고, 체계를 뒤바꿔 버릴 정도의 업무량이다.
나이트 베슬리에게 이만한 업무가 떨어졌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파업을 하든가.
하지만 마스터는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 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저 원탁의 발전을 위해서 이런 일을 벌였다는 마스터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나이트들의 반응은 어떤가?”
“딱히 반응이랄 게 있겠습니까? 다들 자국으로 돌아가기 바쁘죠.”
“으음.”
“마스터.”
“음?”
마스터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나이트 베슬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그렇게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문제라도?”
나이트 베슬리가 마스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생각을 못하는 건지, 나이트 베슬리를 떠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예전의 마스터였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모습은 같을지언정 과거의 마스터가 아니니까.
“자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일단은 위협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이야 공포에 질려 있지만, 자국으로 돌아가 이성을 회복한 그들이 무엇을 할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네, 내게 그런 말을 해도 괜찮겠나?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은 나이트들을 제대로 속박하기 위해서 감금도 불사해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맞습니다.”
마스터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나이트 베슬리가 자신과 한 배를 타기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발언까지 서슴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설프게 한 발 걸치고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기왕 하기로 한 이상 확실하게 해볼 생각입니다.”
마스터가 나이트 베슬리가 한 발언의 진위를 확인하겠다는 듯이 가만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
지금 그의 눈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서두르지 말게나.”
적절한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나는 원탁을 재편하고 싶은 거지, 무너뜨리고 싶은 게 아니네. 나이트는 원탁에 있어서는 중요한 축이야.”
“하지만 위험한 축이기도 합니다.”
“안고 가는 게 위험하다고 없애는 걸 반복한다면, 결국은 반 토막이 난 원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그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닐세.”
정론이다.
하지만 크게 와닿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마스터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마스터와 나이트들 사이에는 이미 신뢰 관계가 붕괴됐습니다. 마스터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고, 무엇을 생각하시든 나이트들은 이제 마스터를 믿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신뢰하지 않는 이들을 따르게 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굴복시키는 것이죠. 마스터, 그들을 굴복시키십시오.”
“이보게, 베슬리.”
“예, 마스터.”
마스터가 가만히 베슬리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이미 끝나지 않았는가.”
“…….”
“그들은 내게 저항하지 못하네. 총회의 회주님이 내 뒤에 있는 이상, 그들은 절대 내게 반발하지 못할 걸세.”
그 역시 맞는 말이다.
나이트 베슬리 역시 마찬가지니까.
마스터에게는 이렇게 의견이라도 낼 수 있다. 하지만 눈앞에 강진호가 있다면, 나이트 베슬리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는 폭력.
악의를 뭉쳐 놓은 것 같은 존재.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이와 의견을 교환한다는 것은 나이트 베슬리에게는 무리였다.
‘단순히 두려운 것만이 아니라는 게 더 문제지.’
두려움은 극복의 대상이다.
하지만 나이트 베슬리에게 있어 강진호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이트 벨리거가 강진호에게 품는 심정은 차라리 동경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겠는가.
누구나 파격적이고 싶다.
누구나 경이롭고 싶다.
일검으로 대군을 무너뜨리고, 형식과 억압을 부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무학을 익혀 나가면서 누구나 자신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 견고한 시스템을 깰 수 없다는 걸 알아버린 이들은 시스템에 순응해 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아니었다.
그는 시스템을 부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 그러면서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뒤엎는다.
그 파격성은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빛났다.
베슬리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나이트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원래 그러니까.
합리와 평등을 논하지만, 그건 자신이 불합리와 독재의 화신이 될 수 없기 때문임에 불과하다.
압도적인 폭력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매료시킨다.
그러니 나이트들은 강진호에게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이들을 가둬둔다고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적당히 안정을 찾게 하고 다시 써먹어야지. 예전 같을 수는 없다고 해도 그들 역시 소중한 인력 아닌가.”
마스터는 알고 있을까?
온건하게 말하려고 하지만, 그의 말투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전의 마스터였다면 절대로 저렇게 사람을 도구처럼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서운 건 급격한 변화가 아니지.’
스며드는 것이다.
마스터가 어떤 의도로 이 일을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의도와 지금의 의도는 같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강진호들과 어울리고 대화하면서 은연중에 그들에게 물들고 말았으니까.
나이트 베슬리는 그 부분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일단은 마스터에게서 느껴지는 기질부터가 예전과는 다르다.
예전에는 온화한 상사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날카로운 왕 같은 느낌이 나고 있었다.
‘다만, 그걸 나쁜 변화라 할 수 있을까?’
원탁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건 나이트 베슬리 역시 느끼고 있었다. 변화를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마스터 개인으로서는 좋은 변화가 아닐지 몰라도, 원탁을 이끌어줄 사람이 과감해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말을 꺼내야 할까?
나이트 베슬리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무엇을 위해 협력하는가를 잊지 말자.’
원탁의 발전이 중요한지, 일신의 안위가 중요한지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
“다만, 마스터.”
나이트 베슬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동료이지만, 동료가 아니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가?”
“그들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세상에 호의로 이루어지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많은 것이 걸릴수록 호의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게 뭔지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이용만 당하다가 끝날 수도 있다는 말이겠지.”
“예. 정확합니다.”
조금 위험한 발언이다.
나이트 베슬리는 아직 자신이 어디까지 발언해도 되는가를 확정하지 못했다. 마스터가 이 말을 강진호에 대한 반기 정도로 해석한다면 나이트 베슬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그거 아는가, 나이트 베슬리?”
“무슨 말씀이신지?”
마스터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들을 믿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네.”
“…….”
“믿음이라는 것은 참 이상한 말이지. 아무런 효력이 없으면서도 뭔가 대단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하지만 나는 현실주의자네. 서명되지 않은 계약서를 믿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아.”
“하면 어째서?”
“자네는 강진호가 왜 원탁을 손에 넣으려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닐세.”
마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반응에 나이트 베슬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득 때문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강진호는 뭐 하러 원탁에 들락거린다는 말인가. 그저 귀찮기만 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탁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건 사실이겠지. 하지만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란 말이지.”
나이트 베슬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럼 주된 이유가 뭡니까?”
“자네, 벌을 싫어하나?”
“……예?”
“벌. 그중에서도 말벌 말일세. 쏘이면 크게 다칠 수 있는 말벌.”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살짝 의아하지만, 일단은 순순히 대답했다.
“딱히 싫어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알짱댄다면 쳐내거나 밀어내기는 하겠지만, 봤다고 해서 굳이 죽이러 달려들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지.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그럼 이렇게 말해보세. 자네의 집 정원에 가족들이 나와 있는데, 정원 주변에서 말벌 두어 마리가 앵앵대며 날고 있다고 생각해 보게.”
“…….”
“그럼 그 말벌을 그냥 두겠는가?”
“아니요.”
나이트 베슬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건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벌을 벌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 벌이 자신과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다.
산속에 있는 말벌 집은 자연의 일부지만, 내 집 처마에 지어진 말벌 집은 위협이 된다. 위협은 제거하는 것이 맞다.
“제거하겠습니다.”
“그런 거지.”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그런 존재일세.”
“예?”
“조금 떨어진 옆집 처마에 달린 말벌 집 같은 걸세. 딱히 제거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지만, 이대로 방치하다 보면 언제 우리 집으로 말벌 한두 마리가 날아 들어올지 모르는.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나이트 베슬리가 살짝 멍해졌다.
강진호에게 원탁이 그런 존재라는 뜻이다.
“제거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두자니 찝찝한 게지. 그리니 적당히 손을 봐서 애완용으로 키우는 걸세.”
“…….”
굴욕적이다.
그저 마스터의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듣는 순간 모멸감이 가슴을 차고 올랐다.
“그걸 아시고도…….”
“오해하지 말게.”
마스터가 단호하게 나이트 베슬리의 발언을 끊었다.
“중요한 건 자존심이 아니야. 생존이지.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산속에서 살아가는 벌은 수많은 위협에 시달려야 하지만, 벌통 속에서 사육되는 벌들은 그런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지. 적당히 꿀을 나눠 주기만 한다면 치열한 야생에서 살아가는 벌 이상으로 수를 불릴 수도 있고 말이야. 그게 양봉업자의 이득으로 시작된 일이라고 할지라도 벌의 입장에서 꼭 나쁘지는 않은 이야기란 소리지.”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나이트 베슬리가 가라앉은 눈으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거꾸로 말하면 늑대의 길을 버리고 개가 되겠다는 말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군요. 천적의 위협과 굶주림에서 벗어나 사료를 퍼먹는 대신 아양을 떨어야겠지요.”
“너무 극단적이군.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마스터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자네 말일세…….”
마스터가 가만히 나이트 베슬리를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