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30
#1129.
다가오다 (4)
시간은 부드럽게 흘러갔다.
공기가 조금 차가워진다 싶더니, 이내 코끝이 시린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총회는 강처럼 흐르고 있었다.
겉으로 본다면 그저 똑같은 강일 뿐이지만 그 안에 흐르는 물은 한시도 같지 않은 것처럼, 총회는 여전히 총회일 뿐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회의실에 많은 이들이 모였다.
언제나와 같은 얼굴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달라진 점이라면 그동안은 회의에는 참가하지 않던 이명환이 회의에 그 얼굴을 내보였다는 점이다.
이현수는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일선의 무인들에게도 직위를 부여했다.
그동안 실장이니 과장이니 하는 직책들은 사무직의 전유물과 같았다. 이사급으로 올라가지 않는 이상은 일선 무인들에게는 딱히 직위가 부여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팀장 자리 하나 던져 주고 대충 알아서 정비하라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체계가 잡히지 않는다.
서로 정한 암묵적인 서열과 총회에서 생각하는 서열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반드시 트러블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 서열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꽤나 잡음이 생기긴 했지만, 이현수는 강하게 밀어붙여 체제를 정비했다.
덕분에 이명환에게도 부장이라는 직위가 떨어졌다. 나이를 감안한다면 과한 직위일지도 모르지만, 강진호의 친위대를 일반 무력대와 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중요도에 걸맞은 대접이 필요한 법이다.
덕분에 이명환은 부장 자리를 얻음과 동시에 마염들의 수장으로 완전히 공인받게 된 것이다.
“네놈이 여기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다된 것 같군.”
바토르가 이죽거렸다.
“하하하, 원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법 아니겠습니까?”
“뭐? 밀어내? 그 잘난 얼굴, 바닥에 밀려볼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물론 부장이 되었다고 입지가 상승했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사진들의 힘이 너무도 막강하다.
강진호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이현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음.”
“중요 안건만 추렸습니다. 일단 먼저 보고드려야 할 것은 법인 설립에 관한 건입니다. 이번 주 내로 모든 준비가 끝나고, 다음 주중에 설립을 마칠 생각입니다.”
강진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회사를 새로 설립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의외로 이름을 정하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기업이란 작은 곳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크기를 키워가는 법이다. 그 와중에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로고를 바꾸기도 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설립해 간다.
하지만 총회가 출자한 기업의 경우에는 시작부터 중견 기업 이상의 자금력과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름을 정하는 것 역시 좀 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진짜 MK로 가는 겁니까?”
“최악인데.”
“……진짜 최악인데.”
그리고 여전히 잡음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방진훈이 살짝 불만을 표하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 기업인데, 왜 영어 약자로 이름을 짓는 겁니까? 이왕이면 한국어로 하면 좋지 않습니까?”
“마샬아츠 코리아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한무(韓武)해! 한무!”
“……농담이시죠?”
“아니면 명광(明光)으로 하든가!”
“제발 자비 좀…….”
이현수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방진훈의 한글 사랑이야 널리 권장해야 할 만한 일이지만, 한글이 센스 없는 글자는 아닐진대 대체 어디서 저런 것들만 골라 온다는 말인가.
한무라니, 세상에.
사방에서 비난이 날아들었다.
“어디 가서 이름 짓지 마라!”
“자식이 없으니 망정이지, 저 양반이 애들 이름 짓는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방한무 같은 이름으로 지을 거 아냐. 방명광이나.”
“방광도 아니고.”
방진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럼 의견을 내시든가요! 남의 의견 비난하는 거야 누가 못합니까! 그리고 나름 센스 있는 이름입니다!”
“퍽이나.”
“아아, 이것이 센스라는 것이다.”
바토르도 새로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본디 집단의 이름이란 그 집단의 정체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는 법이지. 그런데 영 정체성이라는 측면이…….”
“한국이랑 무술이 들어가면 그게 총회지, 더 이상의 정체성이 어디 있습니까!”
“내공이라든가, 암약이라든가 그런 느낌이 들어가게 하면 안 될까? 삼합회나 흑사회 같은 이름은 듣는 것만으로 파워가 느껴지잖아, 파워가!”
“이거, 기업이에요! 암흑가 아니라구요!”
“일본 놈들도 칠성조니 어쩌니 그런 거 하던데.”
이현수가 머리가 어질어질하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 양반들은 기업을 설립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한국 무도 총회 서울 지부도 아니고.
그리고 더 미친 인간은 따로 있었다.
“마존의 것이라는 게 드러나지 않는다! 진호 그룹이나 JH 그룹으로 가는 건 어떠냐?”
“아오…….”
이현수가 막 한마디 하려는 순간, 포격이 날아들었다.
“나쁘지 않은데?”
“MK보다는 JH가 낫지 않습니까? 어감도 그렇고?”
“아무래도 MK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MK는 뭔가 그 오래된 음악 재생 프로그램 같은 느낌도 들고.”
“…….”
이현수가 움찔했다.
할 말이 궁해진 이현수가 강진호에게 도움을 청했다.
“회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진호가 살짝 벙벙한 얼굴을 했다.
“나는 한무 괜찮은데…….”
“…….”
“…….”
“…….”
강진호가 총회에 온 이후로 이렇게 적대적인 시선을 받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살짝 쫄린 강진호가 소파에 파묻혔다.
“거 보십시오! 회주님도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방진훈은 빼고 말이다.
“회주님과 방 이사님은 작명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 걸로 합시다.”
“찬성.”
“그거 좋은 생각이군.”
센스는 없어도 분위기는 파악할 줄 아는 강진호다. 강진호가 깔끔하게 입을 닫았다. 스스로 이런 쪽에 재능이 없다는 것은 인정하는 강진호였다.
“그러면…….”
강진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진호는 죽어도 싫다. JH도 마찬가지야.”
지옥 같다.
자기 이름을 적은 그룹명이라니. 최악 중의 최악이다.
“마존이시여! 마존의 위엄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이보다 좋은…….”
“쉿.”
“넵!”
장민이 찌그러졌다.
강진호가 불타오르는 눈으로 다시 말했다.
“어감이고 나발이고, 진호나 JH는 절대 싫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싫기도 하겠지.
이현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등록하면 변경하는 절차가 번거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변경이 가능하긴 합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 있으시면 의견을 취합해서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견이 모이면 변경하겠습니다.”
절대 안 바뀌겠지.
판을 깔아주면 비난을 쏟아내는 양반들이지만, 자기들더러 판을 깔라고 하면 귀찮아서라도 절대 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잉여 인간들 같으니.’
이현주가 입으로 나오려는 말을 속으로 꾹꾹 눌러 삼켰다.
“그럼 일단 이 안건은 넘어가겠습니다. 차후에 다시 회의를 하시죠.”
차후에.
아주 차후에.
한 이십 년 뒤쯤에.
“이의 없으시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음.”
간단하게 몇 가지를 더 보고받은 강진호가 상황을 조율해 주고는 이현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연수는?”
“내일 마무리됩니다.”
“성과는 어떻지?”
“제가 아직 평가를 해본 건 아니라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 실장님의 말대로라면 굉장히 우수한 성적이 나왔다고 합니다. 역대 신입 사원 연수 중 최고의 성적으로 봐도 무방하답니다.”
“그래?”
이현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거기에 간 이들은 신입 사원이 아니니까요. 어설프든 중구난방이든 실무를 경험해 본 이들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사원들과 비교한다면, 당연히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합니다.”
“……진짜?”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게 상식이기는 하지만, 총회의 사무직들의 능력이 끔찍할 정도였다는 걸 감안하면 말이 조금 달라지기는 한다.
“어쨌든 성적이 높다는 건 좋은 일이죠.”
“그렇군.”
“다만, 탈락자가 좀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하던 방식과 다르다 보니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지?”
“열에 하나 정도는 교육과정을 끝까지 수료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흐음.”
강진호가 턱을 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총회의 사무직들은 적성에 맞아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자신의 의지로 회사에 입사한 이들도 회사라는 체제와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기도 하는데, 본인의 의지와 별 상관없이 이런 업무를 해오던 이들이 10%밖에 탈락하지 않았다는 건 오히려 굉장한 일이었다.
“어떻게 할 셈이지?”
“……본인들을 위해서도 다른 일을 주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은 다들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고 앞서 나가는데, 본인들만 뒤처진다면 자괴감을 견디기 어려울 겁니다. 아니면 악성 종양이 되든가요.”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학을 배울 때도 흔히 있던 일이다.
단체로 무학을 배움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나아가기를 포기한 자들이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무학에 더 이상 전념하지 않는 이들.
문제는 그런 이들이 꼭 주변을 물들인다는 점이다.
자신만 탈락할 수 없다는 억울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게 사람의 본성인지는 몰라도…… 나아가기를 포기한 이들은 꼭 자신의 주변인들도 자신이 있는 곳까지 끌어내리려는 경향을 보인다.
타인의 노력을 폄하하고 비웃으며 말이다.
“2차 연수는 언제 시작하지?”
“다음 주에 바로 시작합니다. 인원 선발은 진즉에 마무리해 뒀습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1차에서 탈락한 이들 중 지원자를 받아서 2차 연수에 합류시켜.”
“예?”
“기회를 한 번 더 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의욕이 없는 것을 강제로 끌고 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의욕은 있지만 능력이 떨어지는 거라면, 한 번의 기회는 더 줘도 된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진행하겠습니다.”
“음.”
“1차 연수에서 돌아오는 인원들을 중심으로 MK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일은 지금처럼 총회에서 해결하게 될 테니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정치권은?”
이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잘 정리되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한 제안을 총리께서 전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흠.”
강진호가 볼을 긁었다.
‘귀찮은 일이 많아지는군.’
정계와는 얽히고 싶지 않다. 정말 얽히고 싶지 않았다. 강진호는 힘을 바탕으로 정계를 뒤흔들고 싶다는 야심도 없고, 그들에게 바라는 것도 없다.
그냥 서로 간섭하지 않는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손대는 영역이 늘어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얽혀야 하는 면이 생긴다.
“그럼 그대로 진행해.”
“예, 회주님.”
길고 긴 법인화의 과정도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럼.”
강진호가 위긴스를 돌아보았다.
“이제 좀 민감한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장내에 살짝 긴장된 공기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