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43
#1142.
개업하다 (2)
서울을 빼곡 채우고 있는 빌딩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MK 빌딩의 최상층에 지금 몇 사람이 모여 있다.
“황 회장님은?”
“일정이 있다고 먼저 가셨습니다.”
강진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황 회장이 여기에 있었다면, 지금까지도 잔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딱 봐도 입이 근질근질해 보이지 않았는가.
강진호가 고소를 머금었다.
황정후와 그의 관계는 계약으로 시작한 관계다. 강진호는 황정후의 병을 고쳐 주고, 황정후는 강진호에게 돈을 지불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관계였다.
하지만 그 관계가 발전하고 또 발전하더니, 여기까지 와버렸다.
강진호도, 황정후도 이제는 서로를 단순히 계약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다.
‘재미있는 일이지.’
가장 담백하게 이어져야 할 관계가 가장 진하게 얽혀들었다. 이래서 세상은 재미있는 것이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조금 그렇군.”
이현수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강진호에게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한다거나, 강진호가 그 사실을 인정한다거나 하는 일은 평소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강진호가 사람을 상대하는 걸 어려워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지금이야 강진호가 이런 자리에 나와서 정치인들을 상대하는 게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지만, 이현수가 처음 강진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면 상전벽해나 다름없는 변화였다.
이현수가 처음 받은 강진호의 정보는 뭐라고 해야 할까,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아웃사이더지.’
그것도 제대로 아싸다.
자신이 편안함을 느끼는 특정인들과만 관계를 유지한 채 관계를 더 늘려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해 그 안으로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많이 나아지셨지.’
아니, 나아졌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을지 모른다. 아웃사이더라고 해서 잘못된 건 아니니까. 그건 그저 성향일 뿐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강진호가 나아진 게 아니라 총회의 회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다는 쪽이 맞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외향적으로 확장하는 상황에서는 강진호가 반드시 이런 역할을 맡아주어야 한다.
“이제 된 건가?”
“그렇습니다.”
이현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주님. 회사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좀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제가 대신할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한 자리에만 참석해 주시면 됩니다.”
“최근 들은 말 중에 제일 좋은 말이로군.”
강진호가 한숨을 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전신이 노곤노곤한 느낌이다.
강진호가 가장 상대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은, 안면이 없는데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늘 개업식에 참여한 총리라든가 국회의원들이 딱 그런 타입이다.
“총리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윗분도 관심을 가지며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윗분이라…….
강진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총리가 윗분이라 지칭할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나는 분명한 한국 사람이로군.’
실감이 난다.
과거 강진호가 마교를 이끌 때, 천하를 지배하고 있던 이는 중국의 황제였다.
당시의 황제와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가지는 힘과 권한을 비교한다면, 지금의 대통령은 감히 황제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중국이 대단하고 어쩌고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의 차이가 있다. 지금의 대통령은 법이라는 절대적인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황제는 법을 무시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적당히 구실을 엮어 구족을 멸해 버릴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권한을 휘두르던 이가 황제다. 현대의 대통령은 국민의 대표나 대변자와 같은 이치라면, 당시의 황제는 반신(半神)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당시의 강진호는 황제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때때로 마교 측으로 뭔가를 전달해 오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황제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잡아 죽일 수 있는 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권한이 미약한 대통령이 지켜보고 있다는 말에는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이게 강진호가 한국인이라는 가장 큰 증거일지도 모른다.
“부담되는군.”
“이해합니다.”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이제는 마음을 좀 놓으셔도 될 겁니다. 어쨌든 가장 큰 문제는 넘어갔으니까요.”
“이제 시작이 아니고?”
“일반적인 기업이라면 개업이 시작이죠. 하지만 저희는 경우가 좀 다르지 않습니까. 사실 사업 확장을 위해서 뭔가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일단 앞으로는…….”
이현수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이 부장이 알아서 할 겁니다.”
“네. 맡겨주십시오, 회장님.”
이현주가 단호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MK의 대부분은 이현주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외적으로 이현수와 강진호가 움직여서 일처리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실무적인 부분은 거의 모두 이현주의 공이다.
그러니 지금 이현주가 저리 의욕을 보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긴 시간 동안 고생해서 마침내 그 결과를 본 상황이다. 완벽하게 마무리를 짓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가 아니겠는가.
“시행착오를 겪을 수는 있겠지만, 큰 문제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삼 개월 정도 내로 적응을 마치겠습니다. MK의 운영은 절대 문제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어머, 그거 말이 좀 이상한데?”
모두의 고개가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최연하가 음료 캐리어를 끌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사님.”
이현수가 인사를 했지만, 이현주는 살짝 주춤했다.
“여기 커피 드세요. 사 왔어요.”
“아, 감사합니다. 제가 준비했어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커피 입맛 까다로운 사람이 맹물만 마시고 있을 것 같아서 사 오는 김에 겸사겸사 산 거니까.”
최연하가 빙그레 웃는다.
커피를 받아 든 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카페인이 땡기던 참이었다. 특히나 강진호의 반응은 조금 더 극적이었다. 그 무뚝뚝한 사람이 감로수를 받듯 커피를 받아 드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진다.
“그런데 어떤 부분이 이상하신지?”
“여기 회장은 진호 씨 아니에요?”
“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운영을 그…… 죄송하지만 직함이?”
“이현주 부장입니다.”
“네, 이 부장님. 이 부장님이 문제없이 처리하면, 진호 씨는 뭘 하죠?”
이현주가 살짝 안경을 치켜올렸다.
“일단 회사 내에서 호칭은 진호 씨가 아니라 회장님으로 부탁드립니다, 이사님. 조금 어색하시겠지만, 앞으로는 지켜 나가야 할 부분이니까요.”
기분이 나쁘지 않게 배려가 담긴 정중한 말이었다.
“아, 실례했어요. 주의할게요.”
“네. 당연히 회사의 운영은 회장님께서 하십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죠. 다만, 회장님께서는 MK 말고도 다른 곳의 업무도 보셔야 하기에 일반적인 실무나 회장님 선까지 올라갈 일이 없는 업무는 아래쪽에서 해결할 생각입니다.”
“그래요? 그럼 그쪽이 그걸 하고?”
“……네, 이사님.”
이현주와 최연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흐응.”
최연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회장님.”
“……응?”
“이쪽 이 부장님이 실무를 맡는 게 맞아요?”
“그렇게 될 거야.”
“그럼 이러면 안 되죠.”
“응?”
“부장이잖아요.”
최연하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무를 맡는다는 건 협력하는 쪽과 연락을 취해야 한다는 건데, 부장 직함 달고 뭘 하겠어요.”
“…….”
강진호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이현수를 돌아보았다.
이현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신 설명에 나섰다.
“아, 그 부분은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일반적인 회사와는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 부장이 전반적인 업무를 맡기는 하지만, 실제 사장직이나 이사직은 다른 사람들이 맡을 겁니다. 그쪽을 통해서 대외 작업을 하면…….”
“왜요?”
“……네?”
“왜 그걸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냐구요.”
“아, 아무래도 이 부장이 나이가 어리다 보니 높은 직급을 맡기에는 보이는 면이…….”
최연하의 시선이 삐딱하게 돌아갔다. 그 시선에 포착된 강진호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회장이 더 어린데?”
“…….”
아, 아니…….
그건 좀 논외죠.
논왼데…….
이현수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뻐끔거렸다.
논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근거로 가져오면 이쪽이 할 말이 없다.
“굳이 왜 그렇게 비효율적인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죠. 사람을 쓸려면 제대로 써야죠. 업무를 맡기려면 맡은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윗사람이 해야 할 일 아닌가요?”
이현주의 입꼬리가 씰룩인다.
생각이야 수도 없이 했지만, 감히 꺼내지 못한 말을 최연하가 그녀 대신에 퍼부어주고 있다.
아무리 이현수가 그녀의 남자 친구라고는 하지만, 업무적으로는 상관이다. 그것도 그저 직책만 상관인 게 아니라 압도적인 실권을 쥐고 있는 상관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이런 부분을 요구하긴 어렵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막힌 체증이 내려가고 있었다.
“사장이 어려우면 최소한 실장 자리는 줘야죠. 기왕이면 이사라든가.”
“이, 이사요? 이사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왜요?”
“…….”
왜긴 이 사람아!
내가 실장인데 쟤가 이사가 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회장님!”
강진호가 핼쓱해진 얼굴로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부분에 대해서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네!”
강진호의 시선이 이현주와 이현수에게로 향했다.
“나, 꼭 회장을 해야 하나?”
“…….”
“…….”
강진호가 세상 잃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들을 때마다 한 오십 년은 늙은 느낌이라 기분이 좀……. 좀 많이 그런데. 다른 호칭 같은 거 없을까? 회주님이랑은 또 다르게 사람을 힘들게 하는데.”
“나이만 따지면 이상한 것도 아닌데요?”
“…….”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이현수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여하튼.”
최연하가 상황을 정리했다.
“이 부분은 한 번 짚어주세요. 저도 이제부터 MK 이름 달고 움직여야 하는데, 실제로 상의를 해야 할 사람의 직급이 낮으면 저도 면이 안 서요. 안 그래요? 제가 부장 허락받고 움직일 수는 없잖아요. 그럴 거면 여기 안 들어왔지.”
들어오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이상하다. 왜 내가 모셔온 기분이 들지?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이 부장님?”
“네? 네! 이사님.”
“우리는 우리끼리 할 말이 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때요? 기껏 사 온 커피 식기 전에 휴게실 가서 이야기 좀 할까요?”
“네, 이사님!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가실까요?”
“그러죠.”
이현주가 벌떡 일어나 최연하의 뒤에 붙었다.
처음 말을 섞었을 때의 기묘한 긴장감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현주가 비빌 언덕을 찾았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최연하를 바라본다.
“그럼 이따 봬요.”
최연하가 이현주를 끌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겨진 강진호와 이현수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본다.
“……5분 만에 사람을 꼬시네.”
“그런 거죠?”
“…….”
단번에 실무자를 찾아내 포섭하는 최연하가 대단한 건지, 실권자를 바로 알아보고 찰싹 달라붙는 이현주가 대단한 건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어버린 두 남자의 한숨이 회장실을 가득 울렸다.